[조민아의 일상과 신비-11]강기훈 씨 무죄선고를 지켜 보며

1991년 봄. 더위가 유난히 일찍 찾아 왔던 그 해 봄은 우울하고 두렵고 잔인했습니다. 그 봄에 우리는 많은 목숨들을 잃었습니다. 명지대 신입생 강경대 씨가 시위에 참가했다가 백골단의 집단구타로 사망했고, 이어 노태우 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가 전국적으로 격렬하게 일어나는 와중에 학생들과 노동자들이 잇따라 분신했지요. 그리고 5월, 전국민족민주연합(전민련) 사회부장이었던 김기설 씨가 분신하자 정부는 이 모든 죽음에 ‘배후세력’이 개입되어 있다는 주장을 내놓습니다. 김기설 씨의 유서를 전민련 동료인 강기훈 씨가 대필했다는 것이 그 근거로 제시 되었지요. 유서대필이란 전대미문의 사건을 통해 검찰은 공안정국을 주도했고, 그 도움을 받은 노태우 정권은 폭력과 공포에 기대어 ‘안정’을 구축합니다.

동료의 유서를 대신 써 주었다는 혐의로 징역 3년을 선고 받고 복역했던 그 강기훈 씨가 지난 2월 13일 서울 고등법원 재심 재판에서 23년 만에 무죄판결을 받았습니다. 그 당시 증거로 채택되었던 전대협 노트와 낙서장 필적을 국립과학수사연구소가 다시 감정한 결과, 혐의가 인정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린 것입니다. 법도 공의도 인권도 없던 시대가 벌인 잔혹극의 제물이 되어, 원치 않았던 무대에 갇혀 23년이란 긴 시간을 외롭게 싸워 왔던 강기훈 씨는 이제야 무대 밖으로 걸어 나왔지만, 현재 암 투병 중입니다.

▲ 노태우 정권 퇴진을 요구하며 분신자살한 김기설 씨의 유서를 대필했다는 혐의(자살방조)로 1992년 징역 3년을 선고받았던 강기훈 씨가 지난 13일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재심 결심공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뒤 법정을 나오고 있다. ⓒ오마이뉴스

“언젠가는 누명이 풀리리라”고, 그 때 우리는 그렇게 이야기 했지요. 그러나 이제야 누명이, 아니 저주가 풀린 그가 그의 삶에서 감당해야 했던 시련은 너무도 가혹했습니다. 재심법정 최후진술에서 강기훈 씨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법정에서 제가 진술하는 기회도 오늘로서 끝입니다. 너무 오랜 기간 동안 화제의 중심에 섰습니다. 이제는 좀 놓여나고 싶습니다. 잔혹한 시간들도, 끝도 없이 지속됐던 불면도, 여러 사람들을 저주하며 보냈던 시간과도 이별하고 싶습니다.” (오마이뉴스 2014년 2월 13일자 기사 참고). 시대는 그의 마음에 건강하게 살아 숨 쉴 수 있었던 평화와 꿈과 웃음들을 증오와 불면과 불안으로 바꾸어 놓았고, 이제 만신창이가 된 그를 그다지 바뀐 것 없어 보이는 세상으로 돌려 보냈습니다. (1991년 당시 법무부장관으로 공안정국의 선봉장이었던 김기춘은 얼마전 박근혜 정부의 청와대에 재입성했습니다)

한 시인의 몰락, 그러나 시는 여전히 남아서

1991년 봄의 기억이 제게 그토록 깊게 각인되어 남아 있는 까닭이 또 있습니다. 그 때 저는 한 시인의 몰락을 목격했습니다. “타는 목마름으로 숨죽여 흐느끼며” 민주주의를 노래하던 그 시인은 당시 <조선일보>에 기고한 칼럼에서 학생들의 죽음을 “경박스러운” 죽음, “철부지”같은 행동, “시체 선호증,” “싹쓸이 충동,” “자살 특공대,” “자살 전염”이라 평하고, “죽음의 굿판을 당장 걷어 치우라”고 주장했습니다.(http://www.catholic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8771). 한 때 저항시인으로 불리며 호쾌한 풍자로 시대의 어둠을 걸러 시를 짓던 그의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 천박한 언어들이 연일 신문의 헤드라인이 되는 것을 지켜보던 쓰디 쓴 기억은 꽤 오랜 시간 저를 괴롭혔습니다. 한 시인의 몰락이 마치 시의 패배인 것처럼 느껴져 한동안 저는 시에 감흥을 느끼지 못했지요.

그 때 저는 열여덟이었고, 아마도 글쟁이로 살아가게 될지 모른다는, 그러고 싶다는 예감 혹은 소망을 어렴풋이 품고 있었습니다. 그 시절 제게 시(詩)는 벼린 칼날처럼 날카로워야 했고, 반역의 세상에 숨구멍을 틔어 줄 불온한 꿈이어야 했으며, 시인이란 시대와 타협할 수 없는 서늘하고 맑은 존재여야 했습니다. 몰락한 그 시인의 곁에는 “지금 우리 사회에는 죽음을 선동하는 어둠의 세력이 있다”며 성경 위에 손을 올리고 기자회견을 했던 사제도 한 사람 있었지요. 그렇게 한 시인과 한 사제가 벌인 말과 행동들이 우스꽝스럽고 저질스럽지만 그로테스크하고 자극적인 삼류 잡지의 삽화처럼 마음에 찍혀 버리니, 그 후로 오랫동안 제 생각과 말에서 비어져 나오는 것은 냉소뿐이더군요. 시를 향해서도, 교회를 향해서도 말입니다.

열여덟이던 저도 23년의 시간이 지나 사십대가 되었습니다. 참으로 다행인 것은, 그 한 때 저는 시인의 몰락을 보았으되, 차마 시를 떠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 함께 했던 많은 사람들과 글들은 세상이 아무리 천박한 욕망과 언어로 들끓어도 시는 모독당하지 않는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저는 여전히 시에 매료당하고 가슴이 내려앉도록 설레어 합니다. 게다가 시심(詩心)이라는 것을 언어 밖에서 찾을 수 있는 식견도 얻었습니다. 마음에 차오르는 것을 어찌할 줄 몰라 밖으로 내어 놓을 때 시가 된다던가요.

시인 예수

어찌할 줄 모를 만큼 마음을 달아 오르게 하는 것은 제가 생각하기론 두 가지 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연심(戀心)과 시심(詩心)입니다. 지극히 그리워하고 애틋해 하는 이 마음으로 사람과 세상을 보면 다른 이들이 못 보는 그 무엇이 보입니다. 아메바처럼 형체가 없는 그 무언가를 발견하고, 그것들에게 언어를 주고, 보듬고 일으켜 움직임을 주는 모든 마음이 시심입니다. 이름을 얻지 못한 것들에게 이름을 주는 행위는 아직도 반역으로 얼룩진 세상에서 불온할 수밖에 없기에 시는, 시인의 마음은 불온한 꿈이어야 한다고 저는 여전히 믿습니다.

그렇게 시인의 마음으로 예수를 만나니, 복음은 교리와 당위가 아니라 시로 다가오더군요. 그리고 그토록 살뜰하게 사람을 사랑하고 그리워하며 하늘의 말을 몸으로 살다 결국 목숨을 던져버리고 우리들 마음으로 내려앉은 시인, 예수가 보입니다. 하늘이 귀히 여겨 우리에게 내어 준, 이름 없는 것들에게 이름을 주고, 굳어 있는 우리의 마음을 어루만지며, 함께 그리워하도록 우리를 시의 세계로 초대하고 있는 그 가난하고 외롭고 쓸쓸한 시인 예수 말입니다.

아마도 그런 예수 닮은 이들의 세상, 시인들의 세상에서만이 강기훈 씨와 같은 우리의 아픈 이웃들의 상처가 보듬어 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법도, 명예회복도, 복권도 보상해주지 못한 그의 잃어버린 꿈들은 피어나지 못했지만, 그래도 이 세상 많은 시인들의 가슴에 싹을 틔울 것입니다. 시심이 우리의 마음에 살아 있다면 그의 꿈은, 그 꿈을 볼 수 있는 시심은 모독당하지도, 몰락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노시인이 청년보다 더 씩씩하게 그의 시를 통해 고백하듯 말입니다.

시인은 절도 살인 사기 폭력
그런 것들의 범죄 틈에 끼어서
이 세계의 한 모퉁이에서 태어났다

시인의 말은 청계천 창신동 종삼 밤거리
그런 곳의 욕지거리 쌍말의 틈에 끼어서
이 세상의 한 임무를 맡는다

시인의 마음은 모든 악과 허위의 대낮에
이 시대의 진실 몇 개를 찾아온다
그리고 그 마음은
다른 마음에 맞아 죽는다

시인의 마음은 이윽고 불멸이다

-고은, '시인의 마음' <피안감성(彼岸感性)> 중에서 


 
 

조민아
미국 미네소타의 세인트 캐서린 대학교에서 신학과 영성을 가르치고 있다. 제도교회와 신앙인의 삶 사이에서 발생하는 작고 큰 움직임, 갈등, 투쟁, 타협, 화해와 그 과정에서 새롭게 탄생하는 언어와 상징에 관심이 많다. “지금”, “여기”에서 할 수 있는 역할이 무엇인가 늘 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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