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오늘을 말한다 -36] 마태오5,17-37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 그리고 바리사이들과 툭하면 충돌을 일으켰습니다. 그분은 그 충돌을 피하지도 않았고, 그 충돌에서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도 않았습니다. 물론 그 대가는 ‘십자가 죽음’이었지만 말입니다. 그 충돌은 예수님께서 지상의 삶을 꾸려가는 한, 신학의 언어로 말해서, 강생의 그 순간부터 피할 수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분께서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 오신 이유가 바로 ‘인간과 세상의 해방’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해방은 ‘인간과 세상에 대한 억압’과 충돌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거룩한 하느님의 시간인 안식일도, 거룩한 하느님의 공간인 성전도, 그리고 하느님 백성의 삶의 규칙인 율법도 모두 사람과 세상을 위한 것이라 주장하며, 그것들을 사람의 참된 삶을 위한 수단으로 삼으려 하셨지만, 율법학자들은 거꾸로 그것들을 목적으로 삼고 사람의 삶을 그에 끼워 맞춤으로써 자기들의 기득권을 유지하려 했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충돌하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법이 그 자체로 문제가 되는 악법인 경우는 언제나 있을 수 있습니다. 정도에 차이가 있겠지만, 언제든지 그리고 어느 곳에서든지 법은 그 자체로 완결 무결한 질서를 보장하지 못합니다. 그 법을 만들고 운용하는 주체가 바로 사람이며, 사람으로 구성된 사회이기 때문입니다. 그나마 다행히 역사는 지성과 자유의지를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우리 인류에게 교훈을 남겼습니다. 곧 세계 제2차 대전을 일으킨 독일의 법이 그랬고, 우리나라를 강점한 일본의 식민지배법이 그랬고, 유신독재시절의 유신헌법이나 긴급조치 같은 것이 그랬습니다. 교훈을 얻었음에도 인류는 곳곳에서 이성에 반하는 ‘악법’이 기승을 부립니다. 역사의 완성, 그 순간까지 인류가 극복해야 할 도전 가운데 하나일 것입니다. 이런 악법들은 아무리 그럴듯한 명분으로 포장해도, 언제나 사람과 사람의 사회를 폭력으로 억누르는 공통점을 갖습니다.

게다가 법을 만들고 이를 적용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문제인 경우는 더 많을 것입니다. 아무리 괜찮은 법을 갖고 있더라도, 이 법을 공정하게 적용하지 않는다면, 속된 말로 유전무죄, 무전유죄란 말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죄를 범했는데, 대기업 회장님들은 집행유예로 풀려나고 노동자들은 감옥에 가거나 천문학적 액수의 벌금을 물린다면, 권력자와 친분이 있으면 무죄가 되고 밉보이면 중형으로 옥살이를 하거나, 시민의 정치적 기본권리(인권)가 아무렇지도 않게, 혹은 조작된 여론을 등에 업고 심각하게 침해된다면, 그건 법이 문제라기보다는 그 법을 마음대로 적용하는 사람이나 집단의 문제인 것입니다. 어쩌면 사람이 함께 살아야 할 사회의 질서를 위해 마련한 최소한의 규칙이라 할 이 법을 소수의 지배집단의 사적이익이나, 권력획득이나, 권력 유지를 위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탄압하는데 악용한다면, 그 법은 더 이상 법이라기보다 ‘폭력’으로 보는 게 적절합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사이와 율법학자와 지도자들이 그랬을 것입니다. 율법이 그 자체로 문제가 아니라, 그 율법을 갖고 자기들의 이익과 권력을 유지하고 강화하려는 사람들이 태도, 곧 불의가 문제였을 것입니다.

▲ 지난 2013년 12월 23일, 정의평화민주 가톨릭행동이 ‘가톨릭 신자 여러분, 모두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제목으로 시국미사를 봉헌했다. ⓒ문양효숙 기자

예수님께서는 몇 가지 예를 들어 법이 의로움을 실현하는 수단, 곧 사람을 살리고, 진리를 전하는 수단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면서, 동시에 그렇게 하지 않는 당시의 지도자들을 고발하십니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는 계명이 있는데, 예수님께서는 형제에게 성을 내서도 안 된다고 하시고, 다른 자리에서는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가르치십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오늘날 되새기면, 수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내모는 전쟁을 하자는 것도, 전쟁을 준비하며 대량살상무기를 개발하고 수입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재원을 투입하지만 가난하고 힘없는 이웃이 생활고 때문에 죽음으로 내몰리는데도 이를 외면하는 것도, ‘살인’ 곧 ‘사회적 살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 ‘거짓 맹세를 해서는 안 된다’는 계명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예 맹세도 하지 말고, ‘예’할 것은 ‘예’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라고 하십니다. 오늘날 보통의 서민이나 지도자들이 자신이 처한 어려움을 피하기 위해, 혹은 자신의 탐욕과 불의를 감추기 위해, 그 때 그 때 말을 바꾸는 것도 ‘거짓맹세’일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폭력과 거짓이 이끌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습니다. 법은 강자 편에서 약자를 억누르는 폭력의 수단으로 작동하기 일쑤고, 거짓이 진실로 둔갑되기 일쑤입니다. 게다가 대중매체는 걸핏하면 거짓을 전하거나, 진실을 교묘하게 왜곡하거나, 폭력을 정당화하는 데 익숙해져버렸습니다. 그리고 세상을 움직이는 나쁜 지도자들은 이런 대중매체의 권력과 결탁해서 시민을 꼭두각시처럼 조종하려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거짓이 진실로 둔갑되고, 폭력이 그럴듯하게 미화되는 세상이라 해도, 우리 교회는 그리스도인이 믿고 실천해야 할 교리, 곧 사회교리를 제시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 복음의 기쁨이 교회라는 건물 안에서, 추상적인 것으로, 개인적인 것으로, 그리고 영적인 것으로만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의 강생과 죽음과 부활은 수많은 이데올로기 가운데 하나로 전락되고 말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교회가 그 창립자를 대놓고 배반하는 것과 하나도 다를 것이 없게 됩니다.

복음의 진리 가운데 하나인 사회교리는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이 세상 곳곳에 구체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전파되어야 합니다. 이를 우리 교회는 ‘복음화’라고 합니다. 이 복음화야말로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입니다. 복음화활동을 하지 않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며, 복음화활동을 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제자가 아닙니다. 그런데, 한국 천주교회에서는 사회교리교육이나, 그에 따른 강론을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교회도 하지 않으려하고, 교우들도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왜 신부가, 혹은 교회가, 혹은 종교가 세상일에 끼어드느냐고 수군거리는 것은 이제 하나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빨갱이 신부, 종북주교, 빨갱이 수녀 하며, 이들을 교회에서 척결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교우들까지 생겨났습니다.

이런 분들에게는 믿고 실천해야 할 가톨릭교회의 교리도 신앙도 필요 없습니다. 다만 세상이 전파한 특정 정치이데올로기, 경제이데올로기만 필요합니다. 신앙공동체인 교회도 필요 없습니다. 사사로운 혹은 집단의 이익과 입맛에 따라 운영해야 할 여러 사회 조직 가운데 하나일 뿐입니다.

어떤 사제들은 복음의 진리를 선포해야 할 직무, 그리고 하느님의 뜻에 반하는 불의를 고발해야 할 직무를 포기하고, 듣기 좋은 말, 재미있는 말을 하면서,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식으로 안주합니다. 하느님께서 사랑하는 사람들의 생활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주는 현실들, 곧 정치, 경제, 문화, 제도, 법, 국제관계 따위의 현실들을 복음의 빛으로 해석하고, 사람과 사회가 가야 할 길을 제시하기 보다는, 그런 골치 아픈 문제는 세상이 다 알아서 할 것이고, 우리는 그저 ‘주님, 주님!’ 해야 한다고 가르치기 일쑤입니다. 복음의 진리를 선포하지 않으면서, 불의와 폭력과 거짓에 대해서도 침묵합니다.

한국 천주교회의 평신도, 수도자, 성직자들이 복음과 사회교리를 알려하지 않거나, 외면하거나, 실천하지 않는 이유는 아주 단순하다고 생각합니다. 복음과 복음에서 흘러나온 사회교리를 받아들이고 실천한다는 것이 거추장스럽고 힘들기 때문입니다. 이를 받아들이고 실천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가진 것을 내놓아야 하는데, 내어 놓기에는 이미 너무 많은 것을 갖고 있습니다. 이를 받아들이고 실천하기 위해서는 대접 받는 것을 피해야 하는데, 이미 대접받는 수준이 너무 높아졌습니다. 이를 받아들이고 실천하기 위해서는 낮은 곳으로 내려가야 하는데, 이미 너무 높은 자리에 올라가 버렸습니다. 섬김을 받기 보다는 섬기고, 많은 것을 갖고 누리기보다는 비우고 포기하며, 가장 힘없고 약한 사람과 동행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는 것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말씀대로 신발에 흙을 묻히는 것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결국 얼마 전 프란치스코 교황이 두려운 마음으로 반성한 것처럼, 한국천주교회는 길 위에 초주검이 되어 누워있는 강도당한 사람을 보고도 길 반대편으로 지나가버린 레위와 사제처럼 되 가고 있는 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현실의 불의와 고통을 외면하고, 그 대신 얻을 것과 잃을 것을 계산하느라, ‘예’라고도 않고, ‘아니요’라고도 않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옳고 바름, 곧 의로움을 따르는 용기야말로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이 하느님께 간절히 청해야 할 은총입니다. 우리가 한 마음으로 간절히 ‘의로움’을 청하고, 구하고, 두드리면, 하느님께서 들으시고, 주시고, 문을 열어주신다는 것을 믿는다면 말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나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박동호 신부 (안드레아)
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신정동성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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