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라의 마을에서 살아남기-마지막회]

화순으로 이사 온 지 2년 하고도 4개월,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에 연재를 시작한 지 1년 하고도 10개월 가까이 되었다. 처음 연재를 시작하던 때 ‘마을에서 살아남기’란 간판을 내걸었던 건, 철새인 내가 텃새인 이웃들 사이에서 잘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는 조마조마하고 두려운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는 가운데 태풍을 만나 난리를 겪고, 눈독 들였던 밭을 어렵사리 극적으로 장만하고, 다랑이라고 하는 새로운 식구를 맞이하여 우여곡절 끝에 엄마로서 거듭나고…, 자세히 들여다보면 나름 파란만장한 나날을 보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집은 몇 번에 걸친 리모델링을 겪는다. 이사 오던 순간부터 시작했던 부엌 (가마솥 걸린) 벽난로 작업, 이듬해 봄부터 가을까지 사랑방 공사, 태풍 덕분에 슬레이트 지붕을 양철로 눈물겹게 교체, 기름보일러 떼고 안방에 (온수까지 쓸 수 있는) 구들 놓는 작업까지, 심심할 틈 없이 우리 집은 늘상 공사판이었고, 아직까지도 집 정리가 끝나지 않았다.

요즘은 농한기를 이용하여 그동안 미루고 미루었던 도배를 하고 있다. 이사 올 때는 이삿짐 정리하느라 여력이 없어서 못하고, 태풍 피해를 입어 벽지에 물이 스미고 곰팡이가 피었는데도 농사일이 바빠서 못하고, 그러다 이제 겨우 손을 대게 된 것이다.

이런 우리를 가까이서 지켜보는 앞집 아주머니 왈, “아따, 심란하다. 심란해서 못 보겄다.” 가끔 찾아오시는 친정 엄마도 도대체 어느 세월에 일이 마무리가 되겠냐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신다. 하지만 한 가지 일을 끝내고 나면 다들 “워메, 그래도 재주가 메주네.” 하며 놀라워한다.

 ⓒ정청라

농사도 그렇다. ‘땅을 갈아야지, 비료를 조금씩이라도 넣어야지’ 하며 걱정 어린 잔소리를 하시지만, 암 것도 안 해도 먹을 건 나온다며 신기한 눈으로 보시기도 한다. 불 때서 밥 해 먹는 것도 처음엔 편한 세상을 왜 거꾸로 사느냐며 눈살을 찌푸리셨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가스 값은 안 들어서 좋겠다든가 밥이 맛나겠다며 차츰 좋은 쪽으로 바라봐 주신다.

그러고 보면 이웃들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지나치게 신경을 곤두세울 필요는 없는 것 같다. 누군가 듣기 싫은 말을 하면 순간순간 욱 하고 화가 치밀기도 했고 외롭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내가 우직하게 내 길을 가면 결국은 이해받게 되는 것 같다. 시골 사람들일수록 다른 것을 틀리게 바라보는 완고함과 적개심이 더욱 강한 것이 사실이지만, 적개심이 꼬리를 내리는 것도 순식간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다울이와 다랑이라는 두 아이가 있어서 더욱 쉽게 이웃들 사이에 뿌리를 내리게 되지 않았나 싶다. 인생의 종착점 정도로 여겨지는 시골 마을에 생기발랄한 아이들이 있으니 존재 자체로 50점은 먹고 들어간다. 조금 별나긴 해도, 많이 고집스럽긴 해도, 인사를 잘 못 챙기기는 해도, 애기 엄마 아빠니까 용납해 주시는 거다.

다울이가 머리 숙여 꾸벅 인사를 하면 얼굴에 주름꽃이 활짝 피도록 웃으시는 동티 할아버지, 다랑이가 입을 벌리고 먹을 것을 받아먹으면 “아따, 저 째깐한 입도 입이라고…. 저것 잔 보랑께. 우스워 죽겄네.” 하시며 다랑이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시는 할머니들…. 마을 사람들 모두 다울이와 다랑이를 친손자처럼 아껴 주신다. 나와 신랑이 사는 모습을 보고 마음에 안 들어서 눈을 치켜뜨시다가도 다울이 다랑이만 보면 햇살에 눈 녹듯이 마음이 녹는지 어느덧 눈길이 순해지신다.

사실 이 만큼 올 수 있었던 건 우리 신랑의 황소고집도 한 몫을 단단히 했지 싶다. 다른 사람들 말에 잘 휘둘리고 눈치도 보는 편인 나와 달리 남의 말을 잘 흘려듣고 기억도 못하는 우리 신랑. 그 점이 못마땅해서 싸우기도 많이 싸웠지만 지나고 보니 그 덕을 많이 봤다.

남들이 뭐라고 하든 크게 마음 쓰지 않고 “저는 이런 사람입니다.” 라고 자기 색깔을 확실하게 보여주니까 이웃들도 “저런 사람이구나.”하고 인정을 해 주시는 거다.(인정이 아니라 포기인지도) 그러니 나는 옆에서 “에구, 저 사람 정말 못 말려요. 저도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니까요. 생긴 대로 살아야지 어쩌겠어요.” 라며 별 수 없다는 표정만 지으면 된다. 적이 되지 않으면서 동정표까지 사는 기막힌 수법! 이것이 내 나름의 생존 전략이랄까?

간혹 마을 사람들과 관계 맺기에 실패해서 귀농 생활을 접거나 애초부터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터를 잡는 귀농자를 볼 수가 있는데, 나는 이왕이면 힘들더라도 함께 살아갔으면 좋겠다. 내가 직접 경험해 보니 싫은 것은 피하거나 멀리하고 좋은 것만 취사선택하는 삶은 결국에는 앙상해진다. 그것은 자연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숲에는 밤나무, 참나무, 소나무 따위 여러 나무들이 어우러져 함께 살아가는 것처럼 자연은 모두 다 받아들인다. 절대 내 것만 고집하지 않는다. 자연이 좋아서 가깝게 지내려 한다면 우리가 먼저 자연을 닮아가야 하는 게 아닐는지….

이렇게 말하니까 내가 무척이나 잘해나가고 있는 듯하지만 아직도 멀었다. 이제 겨우 자리매김을 했을 뿐이다. 내가 발 딛고 선 자리를 긍정함으로써 우뚝 일어선 수준이랄까? 앞으로는 한 발작씩 걸음을 떼어 이웃들에게 보다 가까이 가고 싶다. 내 삶에만 머물던 시선을 이웃에게로 보내고, 그러면서 우리들의 보물을 함께 찾아내고 싶다.

돌아가신 시어머니께서 생전에 귀농자끼리만 어울려 살아가는 우리를 못마땅해 하시며 마을에 집을 알아보라 하신 적이 있다. “사람은 남들 사는 거를 보면서 살아야한다.” 하시면서 말이다. 당시에는 고리타분한 잔소리라고만 생각했는데 이제야 그 말씀의 깊은 뜻을 알겠다. 아무리 잘난 사람도 혼자서는 살 수 없으며, 다른 이들과 함께 뒤엉켜 보고 듣고 배우며 살아가야한다는 말씀. 마을에 살아보니 이제야 그 말씀의 뜻을 새록새록 되새긴다.
 

정청라
귀농 7년차, 결혼 5년차 되는 산골 아낙이다. 유기농 이웃들끼리만 사는 안전한 울타리 안에 살다가 두 해 전에 제초제와 비료가 난무하는 산골 마을 무림으로 뛰어들었다. 왕고집 신랑과 날마다 파워레인저로 변신하는 큰 아들 다울이, 삶의 의미를 다시금 깨닫게 해준 작은 아들 다랑이, 이렇게 네 식구가 알콩달콩 투닥투닥 뿌리 내리기 작전을 펼치고 있다.

화순에 귀농한 정청라 선생님의 <청라의 마을에서 살아남기> 연재를 마칩니다. 그동안 집필해 주신 정청라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오는 3월 부터는 정청라 선생님이 마을에서 만난 어르신들 이야기를 이어서 연재해 주실 것입니다. 독자 여러분의 지속적인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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