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 - 한상봉]

2014년,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창립된지 40주년이 된다. 최근에 사제단과 관련해 ‘종북사제단’이라는 말이 심심찮게 들려온다. 임의적으로 결성된 보수단체들뿐 아니라, 정부 · 여당 인사들의 입에서조차 ‘종북’은 유행어처럼 저항세력에 붙이는 접두사가 되었다. 그러나 민주공화국에서 민주주의를 제대로 하자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현 정부와 국가기관이 ‘민주주의에 저항하는 세력’일 수도 있겠다. 특히 국가정보원은 지난 대선 개입 문제가 아니더라도 최근 ‘탈북 화교 출신 서울시 공무원 간첩사건’과 관련해 공문서 위조 혐의까지 받고 있다.

한편 정의구현사제단과 박근혜 대통령 부녀간은 악연이다. 박정희 유신정권과 그 하수인이었던 중앙정보부에 의해 원주교구의 지학순 주교가 구속되면서 만들어진 게 정의구현사제단인데, 이제 박근혜 정부와 국정원이 정의구현사제단과 다시 결전을 치르고 있는 인상이 짙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의구현사제단이 천주교의 저항세력을 대표하는 것은 아니다. 지난 7월부터 천주교 평신도를 비롯해 수도자들과 사제들, 각 교구 정의평화위원회가 나섰다. 이미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인 이용훈 주교는 국가기관의 대선 개입을 ‘불법’으로 못 박았다.

▲ 정의구현사제단을 비롯한 천주교 사제들과 평신도들은 거의 매주 월요일 저녁 전국을 돌며 시국미사를 봉헌하고 있다. ⓒ한상봉 기자

이 마당에 천주교 주교들 가운데 한 사람은 “모든 사람들이 대한민국의 앞날을 밝게 보고 있는데도 정의구현사제단만이 대한민국이 내일이라도 망할 것처럼 말하고 있다”며, 사제단을 “우리의 희망을 깎아먹고 대한민국의 희망을 깎아먹는 이들”이라 비난했다. 대한민국을 수호한다는 일부 천주교인들도 정의구현사제단 신부들에게 “사제복을 벗고 정치를 하라”고 윽박지르고 있다. 이들은 시국미사가 열리는 곳마다 몰려다니며 난장을 부리지만, 오히려 프란치스코 교황은 “공동선을 위한 정치 참여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의무”라고 분명히 말하며, 교회가 세상으로 나가 복음을 증언하라고 재촉하고 있다.

성당에 모여 나라를 위해 기도하겠다는 사제들에게 ‘종북’과 ‘정치사제’ 딱지를 붙이는 이들에게 “시국기도회는 독재정권이 흔히 써먹던 조찬기도회보다 훨씬 복음적인 한국 천주교회의 미풍양속”이라고 말하고 싶다. 조찬기도회는 정치권력을 축복해왔지만, 시국미사는 세상의 가난하고 무력한 이들을 위해 자신을 봉헌하기 때문이다. 한편에선 특혜와 비리가 들끓고 있겠지만, 한편에선 고난 속에서도 희망이 피어나기 때문이다.

2009년 김수환 추기경이 선종했을 때, 당시 한나라당 대표였던 박근혜 대통령은 “우리의 종교적 정신적 지도자께서 우리 곁을 떠나시니 슬프고 허전합니다. 마지막 전화를 드렸을 때 나라 걱정을 많이 하셨습니다. 나라가 편안해지도록 노력하라고 당부의 말씀을 하셨는데 그 말씀이 유언같이 됐습니다. 앞으로 노력을 해서 김 추기경님이 하늘나라에서 나라 걱정 국민 걱정 하지 않으시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라고 추모 메시지를 남겼다. 지금 그분이 대통령이 되었는데, 아직 그 노력이 부족했는지 나라가 편안한 날이 하루도 없다. 복지정책은 후퇴하고, 국가기관이 국민을 능멸하며, 그중에서도 군부 출신과 정보기관이 득세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이 만들어낸 종북주의자가 갑자기 수북해졌다.

▲ 시국미사를 봉헌하는 성당마다 대한민국수호천주교인모임뿐 아니라 보수단체 회원들이 군복을 입고 위협적인 태도로 몰려들고 있지만, 정작 성당에서는 미사에 참석한 교우들이 민주주의를 위해 묵묵히 기도하고 있다. ⓒ한상봉 기자

아무래도 박근혜 대통령이 아버지를 쉽게 저승으로 떠나 보내드리지 못한 까닭인지도 모른다. 박근혜 대통령은 김수환 추기경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전한 말을 기억해야 살 길이 열릴 것이다. 유신정권이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하고, 대통령에게 비상대권을 부여하는 ‘국보법’을 통과시키자 당시 한국 천주교 주교단은 1972년을 ‘정의평화의 해’로 선포했다.

김수환 추기경은 그해 성탄절 메시지를 통해 이 법이 “북괴의 남침을 막기 위해서입니까? 아니면 국민의 양심적인 외침을 막기 위해서입니까?”라고 물었다. 또한 1972년 광복절 메시지에서는 “우리는 국민 상호간과 정부와 국민 간에 불화만을 조장하므로 전 국민의 단합에 금이 가게 하는 졸렬한 정보정치의 지양을 엄중히 요구한다”며 “보위법이나 정보정치는 결과적으로 정부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말살시킬 위험이 크다”고 질타했다. 결국 박정희 대통령은 끔찍한 최후를 맞이했다.

그러니, 이제 아버지를 편안하게 저승으로 보내드리고, 박근혜 대통령은 ‘정상적인’ 정치를 시작해야 한다. 성경에 이런 말이 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 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그런데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마르 10,29-31)

여기서 버릴 항목에는 ‘아버지’가 들어있지만, 희한하게도 받을 목록에는 ‘아버지’만 빠져 있다. 당시 가부장 사회에서 아버지는 ‘권력’이다. 힘에 의존하는 존재는 복음에 합당하지 않다는 게 예수의 소신이었다. 아버지는 평화를 가져오지 않는다. 참된 평화는 어머니다운 자비와 공정에서 오기 때문이다. 사회적 엘리트가 아니라 보잘 것 없는 이들을 품어낼 줄 알 때 평화가 온다. 그래서 예수는 “나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고 말했다. 일각에서 “우리는 대통령을 뽑은 게 아니라 여왕을 뽑았다”는 말이 들리기 시작한 지 오래다. 이 마당에 첫째가 꼴찌가 될 수 있다는 말을 기억해 두기로 하자.


한상봉 (이시도로)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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