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 칼럼 - 강한]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의 시복이 확정됐다. 1791년 신해박해부터 1866년 병인박해까지 순교한 한국 천주교 초기 신자들이다. 지난 8일, 바티칸에서 시복 결정 소식이 전해지자 주교회의 의장을 필두로 기쁨과 감사를 표하는 천주교 신자들의 반응이 쏟아졌고, 한편으로는 시복식 주례를 위한 프란치스코 교황의 한국 방문 가능성에 대한 기대감도 커지는 모양새다.

이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 124위 순교자 명단을 살피며 잠시 가슴이 먹먹해졌다. 참수, 교수, 장사, 옥사… 두 글자만으로도 참혹한 죽음들. 이렇게 성명과 세례명이나마 남아 있는 이들을 곧 복자라 칭하게 될 텐데, 역사에 이름 한 글자 남아 있지 않은 순교자도 수없이 많다고 하지 않나. 그 많은 죽음의 의미는 무엇일까? 절로 하늘을 바라보며, 지상의 순례자와 천상의 복된 이들이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된다는 ‘통공’ 교리를 떠올리게 된다.

이 시점에, 순교 이후 짧게는 120여 년부터 200년 이상 지난 그들의 죽음을 기억하고, 교회가 공경할 복자로 선포하는 것은 2014년 한국에서 살아가는 신앙인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묻지 않을 수 없다. 시복을 기뻐하기만 할 것이 아니라 순교자를 따르겠다는 우리 자신의 삶과 신앙을 돌아보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마침 올해는 1984년 여의도에서 열린 103위 시성식 이후 30주년이 되는 해다. 30년 동안 천주교가 순교 성인의 발자취를 따라 얼마나 나아갔는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 성찰하는 좋은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순교자성월이었을까? 내가 참석했던 어느 미사에서 강론 중이던 주례 사제가 미사를 공동집전한 후배 사제에게 “○○○ 신부는 손톱을 뽑는 고문을 하겠다는데 배교하지 않을 수 있겠어?” 하고 물었던 적이 있다. 짓궂은 말투의 갑작스러운 질문을 듣고 신자석에 잠시 웃음이 번졌지만, 그건 주례 사제를 포함한 우리 모두가 스스로에게 던져야 할 질문이었다. 만약 내가 신앙의 자유 없는 시대를 살아가는 천주교인이었다면, 그래서 서슬 퍼런 박해의 칼날을 마주하게 된다면 나는 목숨을 구걸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 대체 나는, 그리고 우리는 얼마나 자신을 버리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고 있을까? (* 사진은 기사 내용과 직접 관련이 없습니다.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자료사진)

순교자들을 생각할 때면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는 복음 말씀을 떠올리게 되는데, 대체 나는, 그리고 우리는 얼마나 자신을 버리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고 있을까? 우리의 경제 · 정치 · 사회 · 일상생활 전반에서 말이다. 순교자성월이 되면 “저희가 죽을 때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한결같이 믿어 증언하며 비록 피는 흘리지 못할지라도 주님의 은총을 입어 선종하게 하소서” 하고 기도하는데, 이 기도문의 앞부분인 “예수 그리스도를 한결같이 믿어 증언”하는데 (비록 피는 아니지만) 땀을 얼마나 흘렸는지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때로 본당에서 뭔가 ‘직책’을 맡아 조금 더 적극적으로 활동하게 될 때는 천주교회와 본당의 품위에 걸맞은 사람이 되라는 주문을 받기 마련이다. 사소하게는 일상의 언행부터 동네에서 입고 다니는 옷차림과 몸가짐까지 좀 더 신경 쓰라는 말을 들어본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순교자를 따른다는 천주교 신자 노력의 전부라면 얼마나 아쉬운 일일까? 그저 다른 신자들의 눈총을 받지 않기 위해, 또는 성당이나 천주교 이름에 먹칠하는 일은 피하고자 조심스럽게 행동하는 게 다라면 말이다. 타인에게서 “너나 잘하세요”라는 말은 안 듣고 살아야겠지만, 그저 부끄러운 일을 안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돌이켜보면 나는 단 한 사람도 신자가 되도록 교회로 이끌어본 경험이 없는 것 같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영향을 받아 신앙의 길로 접어든 사람이 있었을까? 솔직히 말해 자신 없다. 가장 가까운 관계에 있는 ‘비(非) 가톨릭 신자’들에게도 복음을 전하지 못하면서, 나는 신앙생활에서 무엇을 건져 올리고 있는가? 스스로에게도 미안하고 안타까운 말이지만, 혹시 내가 믿고 따른다는 천주교가 그저 사교생활, 심지어 취미나 패션 같은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겠다. 매일 성호를 긋고, 하느님께 많은 것을 청하고 감사드리지만, 그것이 내 삶을 얼마나 ‘실질적으로’ 변화시키고 있고, 사회와 이웃에 대한 봉사로 이어지고 있는지 다시 생각해봐야 할 때다.


강한 (안토니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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