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민석 신부의 Spring Tree]

보름이 지나면서 양지바른 언덕에는 어느새 푸릇푸릇 풀잎이 돋아나고 있습니다. 파릇파릇 올라오는 새싹이 나를 손짓하는 것 같아 파랗게 싹을 내미는 풀잎을 오래 들여다보았습니다. 꽁꽁 얼었던 땅의 껍질을 뚫고 솟아 나온 풀싹이 어찌나 대견스럽던지, 눈물겹기조차 했습니다.

그 풀싹에서 다시 일어서는 봄의 기운을 느낍니다. 억압을 뚫고 일어나는 풀잎을 보며 요즘 <변호인> 영화에 이어 <또 하나의 약속>이라는 영화를 생각했습니다. 정치 경제적 억압에서 해방하는 이야기입니다. <변호인>이 정치적 억압을 소재한 이야기라면 <또 하나의 약속>은 경제적 폭력을 그려낸 영화입니다. 이 이야기는 꽃다운 나이에 삼성에 취직해서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원인 모를 병에 걸리고 희생된 노동자와 가족의 억울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자본에 대한 교황 프란치스코의 지적입니다. “규제받지 않는 자본은 새로운 독재입니다.” 교황의 이 말처럼 이 나라는 이미 삼성재국이 되어버렸습니다. 삼성의 부패와 비리를 다루는 영화인 탓인지 대형 영화관들이 다들 삼성제국의 눈치를 봅니다. 영화계마저도 탐욕스런 삼성재국의 자본에 자유롭지 못 한가 봅니다. 이 영화를 상영하는 극장이 없어서 천주교 광주교구 정의평화위원회에서 무료상영을 하였습니다.

▲ <또 하나의 약속> 김태윤 감독, 2014

삼성재국의 폭력이 이토록 비열하고 나쁘다는 것을 다시금 알게 되었습니다. 삼성의 비인간적인 폭력이 구체적으로 어디까지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삼성의 패악질로 인하여 우리 사회의 소중한 가치들인 자유, 평등, 인권, 평화의 가치가 어떻게 망가졌고 위협 받고 있는지 알아야만 합니다. 툭하면 삼성이 망하면 대한민국이 망한다며 선동하는 국가 권력의 비호를 받으며 승승장구하고 있는 동안 국민은 삼성의 자본독재로 피를 흘리고 있습니다.

국가 권력을 손에 쥔 정권은 삼성에게 알아서 기면서 온갖 아양을 다 떨면서 얼굴을 비벼대는 애완견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고 국민들을 향해서는 공권력을 무자비하게 휘둘려 대니 이들이야 말로 예수가 성경에서 말하던 독사의 자식들이 분명합니다.

이 나라는 삼성재국이 망하면 나라가 망하는 것처럼 말하지만 그것은 거짓임이 이미 드러났습니다. 핀란드 노키아가 망하면 핀란드가 망한다고 우려했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노키아 정리 후 벤처기업이 400개 생겨나서 고용도 창출되어 건강한 중소기업성장에 도움이 되었습니다. 특정 대기업에 의존했던 핀란드의 경제구조는 중소기업 중심으로 바뀌었습니다.

정치권력이 자본권력에 더 이상 휘둘리지 말아야 합니다. 인간의 소중한 삶과 가치를 위해 인간의 정치 경제적 억압부터 해방되어야 합니다. 저항하는 것이 해방의 첫 걸음이 됩니다.

“누군가 자신의 권리를 위해 싸우지 않고서 천국에 가기만 바라면서 무조건 참는다면, 그는 아편에 심각하게 중독된 사람입니다. 우리는 도덕, 학문, 교육, 노동 등 모든 분야에서 진보를 위해 싸워야 합니다. 아편에 중독되지 않도록 싸워야 합니다.”(교황 프란치스코)

우리 모두가 원하는 것은 삶의 주인으로 당당하게 사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노예의 삶’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미래세대의 아이들의 꿈과 희망을 위해 ‘규제 받지 않는 새로운 독재인 자본’에 저항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부도덕한 자본은 무슨 짓이든 다 할 것입니다. 사람 사는 생명의 길을 가야 합니다. 악의 세력에 굴종하는 노예의 삶을 거부합니다.

이게 생명이라는 거구나!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이 있는 한 결코 생명을 거부할 수 없습니다. 생명은 죽지 않습니다. 여기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풀싹의 주변에는 마른 풀잎들이 환영합니다. 환영하는 마른 풀잎이 따뜻합니다. 새 생명을 맞이하는 마른 풀잎들 사이로 쑥이 쑥쑥 크고 싶어서 파란마음으로 새 시대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마지막은 죽음일 뿐이라고 한 어리석은 사람이 누구입니까? 봄날 돋아나는 풀의 여리고 여린 대가리를 보고도 그런 말을 할 수는 없을 겁니다. 무시무시한 죽음의 밑바닥에 송곳 끝처럼 조금 얄밉게 내어 민 풀잎이 속삭여 주더군요.

“낙심 말아요, 조금씩 자라나는 생명이 갑자기 닥치는 추위를 끝내 이긴답니다. 날 좀 보세요.”

풀잎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자니까 속삭이고 있는 것은 풀잎뿐만이 아니었습니다. 풀잎 옆에서는 마른 풀들이, 풀잎 끝에서는 소리 없이 부서지는 눈부신 햇살이 아지랑이로 피어오르면서 김광석이 부르는 ‘일어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검은 밤의 가운데 서 있어 한치 앞도 보이질 않아
어디로 가야하나 어디에 있을까 둘러봐도 소용없었지.
인생이란 강물 위를 뜻 없이 부초처럼 떠다니다가,
어느 고요한 호숫가에 닿으면 물과 함께 썩어가겠지.
일어나, 일어나, 다시 한 번 해 보는 거야.
일어나, 일어나, 봄의 새싹들처럼.

끝이 없는 날들 속에 나와 너는 지쳐가고
또 다른 행동으로 또 다른 말들로 스스로를 안심시키지.
인정함이 많을수록 새로움은 점점 더 멀어지고,
그저 왔다갔다 시계추와 같이 매일매일 흔들리겠지.
일어나, 일어나, 다시 한 번 해 보는 거야.
일어나, 일어나, 봄의 새싹들처럼.”

햇살의 소리 없는 아우성으로 이른 봄 양지바른 언덕은 그야말로 은총의 바다입니다.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니 새털처럼 부드러운 흰 구름이 한가로이 떠 있었습니다. 은총의 햇살이 푸른 풀잎들을 부르기도 하지만 은빛 비늘처럼 반짝이는 호수위로, 어떤 햇살은 참나무, 벚나무, 향나무 가지위로 봄소식을 전합니다. 그리고 그 무수한 햇살 속에 숨어 있는 아아 무수한 하늘의 은총을 작은 풀잎 하나 겨냥하여 광막한 어둠 속을 외로이 달려온 햇살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살립니다.

일어나, 일어나~ 다시 한 번 해 보는 거야.
일어나, 일어나~ 봄의 새싹들처럼!


 
 
최민석 신부 (첼레스티노)
광주대교구 현애원 담당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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