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오늘을 말한다 - 35] 마태 25,31-46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마태 25,35-36)

두 가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는 인간성과 사회성의 황폐화에 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인, 그리고 우리 교회의 정체성과 존재 이유에 대한 것입니다.

앞의 예수님의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그리스도인다움, 혹은 교회 생활의 교회다움의 분명한 표지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렇지만 냉정히 말하면 이는 인간의 인간다움입니다. 적어도 수천, 수만 년 동안 그렇게 믿었습니다. 금수만도 못한 인간,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지른 인간이라고 그렇게 격하게 분노하고 손가락질하는 사람조차도 그 마음에는 ‘연민의 정’ 혹은 ‘동정심’이라는 것이 있을 것이라고 그렇게 믿었습니다.

‘사람’을 ‘거지’라고 불렀다가 야단맞던 시절

굳이 인류 역사의 발전과정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필자의 기억만을 더듬어보아도 이는 분명합니다. 국민(?)학생 시절, 중학생 시절, 그러니까 60년대, 70년대 필자는 이른바 달동네, 산동네에 살았습니다. 하나도 유별하지 않았습니다. 대부분 그랬기 때문입니다. 그나마 잘사는 동네에 사는 친구들이라야 별 것 없었습니다. 이 나라의 최고 권좌에 오른 분이 다녔던 국민학교나 제가 다녔던 학교나 길 하나 사이에 두고 있었지만, 아이들의 행색이나 생활은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비록 길이 두 학교를 갈라놓았지만, 동네서 아이들끼리 섞이는 데에는 아무런 어려움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섞이지 않는 것이 유난했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그 시절 등하교 길에서도, 동네에서도 ‘거지’가 있었습니다. 아이들끼리는 그렇게 불렀지만, 어른들이 들으면 혼이 나곤 했습니다. “그러는 것 아니라고……. ‘사람’한테 그러는 것 아니라고…….” 그 사람은 동네 가가호호를 다니면서 동냥을 했습니다. 어른들은 비록 찬밥 혹은 쉰밥이지만 빈손으로 보내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찬밥을 먹기 다반사였고, 때로는 쉰밥이라도 물에 여러 차례 헹궈서 먹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찬밥 혹은 쉰밥을 준다는 것은 그를 냉대하는 것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냥 ‘있는 것’ 나눠먹었던 셈입니다.

ⓒ박홍기

제가 살던 산동네 꼭대기에는 ‘움막’이 있었습니다. 낡은 거죽 같은 것을 들추고 들어가면 그곳에 동네 친구가 살았습니다. 그 움막에 들어가면 있을 것은 다 있었습니다. 학기 초에 ‘가정환경조사서’를 작성해 제출했고, 집에 ‘자전거’, ‘라디오’ 그런 것이 있는지 표시하는 난이 있었는데, 보통의 산동네 집이나 그 움막이나 그런 것이 있고 없고 별 차이가 없었습니다. 그냥 지붕이 있는 집과 지붕 대신 흙이 지붕인 집 사이의 차이만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배고픈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고, 헐벗은 사람에게 입을 것을 주는 것은 유별나게 착한 일도 못되었습니다. 그냥 사람끼리 사는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모습일 뿐이었습니다. 사람이라면 그냥 그렇게 살아야 했던 것입니다. ‘거지’든 ‘움막’에 살든, 그는 그냥 ‘또 다른 나’였을 뿐입니다. 대학을 나오지 않아도, 고관대작이 되지 않아도 꼬마들도 알고 있었습니다.

복지국가는 시기상조?

불과 몇 십 년 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사람’이라고 다 같은 사람이 아닌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배고픈 사람, 목마른 사람, 헐벗은 사람, 떠돌아다니는 사람, 병든 사람, 감옥에 갇힌 사람은 ‘사람’ 축에 끼지도 못하고 ‘짐’이 되어 버렸습니다. 사람의 본성이 변한 것일까요?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짐’이나 ‘물건’, 그것도 쓸모없는, 혹은 다 쓰고 버릴 ‘쓰레기’로 보는 새로운 유전자가 출현한 것일까요? 얼마 전 교황이 이웃의 불행에 ‘슬퍼하는 것조차’ 우리는 잊어버렸다고 개탄한 것이 그 맥락이 아닐까요?

옛날에는 훌륭한 임금님과 못된 임금님의 기준이 ‘백성’을 평안히 살게 하는 것이라고 했답니다. 평안하게 살게 하는 일은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 ‘몸을 누일 공간’ ‘아픈 사람 돌보는 것’, 그런 것을 마련해 주는 것이었으며, 임금이건 고관대작이건 누리는 호사에 걸맞게 그 사명도 엄중했습니다. 오죽하면 농사에 지장을 주는 가뭄을 ‘부덕의 소치’(입바른 소리에 불과했을지 모릅니다만)라고 했겠습니까?

그러다가 이른바 ‘시민국가’가 출현했습니다. 우리는 고집스럽게 ‘국민국가’라고 부르지만 말입니다. 유명한 단어가 ‘야경국가’입니다. 밤에 도둑을 막아주는 일만이 국가가 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도둑은 나라 밖에서도 올 수 있는데 이를 우리는 외침이라고 합니다. 이 외침을 막으려고 ‘군대’를 보유합니다. 도둑은 안에서도 올 수 있는데 우리는 이를 ‘범법’이라 하고, 이를 막기 위해 ‘경찰력’을 보유합니다. 이 야경국가에서는 이 두 가지 말고 다른 모든 일은 ‘시민’들이 알아서 하게 내버려둬야 한다고 합니다.

그럭저럭 세월이 흘러, 우리나라에 툭하면 입에 오르내리는 국가론이 있는데, 바로 ‘복지국가론’이 그것입니다.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겠지만, 극단적으로는 국가라는 ‘정치공동체’의 임무가 ‘시민’의 행복을 위해 모든 것을 책임진다는 내용을 갖습니다. 모든 시민에게 교육, 주거, 직업, 의료 및 보건, 교통…… 곧 시민 생활에 필요한 모든 분야를 최적(최소)의 상태로 제공하는 것이야말로 국가의 임무이며 존재 이유라는 것입니다.

현실은 이 두 국가론, 즉 국가의 최소의 역할(작은 정부론)과 최대의 역할(큰 정부론) 사이에서 어느 지점에 자리할 것이며, 어느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경우는 군사력과 경찰력은 강해지고, 교육, 주거, 직업, 의료, 교통 따위의 분야들은 ‘시민’들이 알아서 자기 능력대로 해결하라는 쪽으로 가고 있다는 의구심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를 점잖게 ‘복지의 후퇴’라고 하고, 다른 쪽에서는 ‘복지국가 시기상조론’이라고도 합니다.

어쨌든 한동안 ‘복지국가를 향하여 가던’ 여파가 남아있어서든, 혹은 노골적으로 파기했다가는 ‘표’가 날아가기 때문에 세련되게 파기시키든, 혹은 현실적으로 조정을 하고 있건, ‘복지’에 대한 욕구를 반영한 정책들이 남아있습니다. 국민기초생활법이 있고, 국민건강보험제도가 있으며, 실업급여가 있고, 산업재해보험제도 따위가 있는데, 이것들은 국가가 법과 제도로 시행하는 것들입니다. 어떤 경우는 시민들이 보험료의 형태로 그 소요 경비를 마련하고, 어떤 경우는 세금의 형태로 그 경비를 마련합니다. 말하자면 ‘배고프고, 목마르고, 떠돌아다니고, 헐벗고, 아프고, 갇힌’ 그런 가장 작은 이들을 돌보는 일을 국가가 상당 부분 떠맡고 있는 셈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모든 시민이 공동으로 떠안은 것입니다. 비록 그것이 ‘법’에 따른 ‘강제’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앞에서 말한 것처럼, 그렇게 ‘가장 작은 이’를 ‘또 다른 나’로 보려는 유전인자가 사라지고 있고, 이를 교묘하게 활용하는 탐욕스러운 권력자들이 이 ‘강제’ 장치마저 무력화하려고 합니다.

ⓒ한상봉 기자

우리 ‘살’을 떠나 ‘성사’를 생각할 수 있나

이 시점에서 그리스도인, 그리고 이 사회에서 교회의 몫은 무엇일까 다시 묻게 됩니다. 첫째, 국가가 ‘배고프고, 목마르고, 헐벗고, 떠돌아다니고’ 하는 가장 작은 이를 돌보고 있다면, ‘교회가 해야 할 몫은 무엇일까’ 묻게 됩니다. 어떤 분들은 말씀하십니다. 국가가 아무리 그 몫을 대신한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가장 작은 이들이 있을 수밖에 없으므로,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그런 이들을 돌봄으로써 그 역할을 다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결과적으로 복지의 후퇴를 추진하려는 이들과 한 편이 되는 것은 아닌가?’ ‘가장 작은 이들이 양산될수록 교회가 할 일이 그만큼 많을 것이라는 속셈이 숨어있는 것은 아닌가?’ ‘세속의 권력이 '차가운 권력'이 되면 될수록, 그만큼 교회는 '시혜'를 베푸는, '사랑을 실천하는' '자비로운' '따뜻한 권력'을 유지 강화할 수 있다고 계산하는 것은 아닐까?’ ‘다시 권력의 분점을 품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의구심이 듭니다.

둘째, 백번 양보해서 교회가 할 일, 그리고 그리스도인이 할 일은 오로지 ‘작은 시혜적 사랑’과 거룩한 ‘성사’의 기념에 있다고 하더라도, 진지하게 물어야 할 신학적 주제가 있습니다. 전통적 의미에서, 적어도 한국 천주교회의 교우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기에, ‘성사’는 그 자체로 ‘효력’이 있다고 믿습니다. 또 그렇게 가르쳤습니다. 그렇다면 그 ‘효력’이란 무엇인가? 물론 ‘하느님의 신비에 참여’ 혹은 ‘하느님과의 일치’ 혹은 ‘영원한 생명에의 초대 및 참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를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가? 깊은 영성으로? 직관으로? 형언할 수 없는 신비로운 체험으로?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럴 경지에 도달한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살을 갖고 사는 사람들, 그러니까 살이 배고프고, 살이 목마르고, 살이 헐벗고, 살이 떠돌아다니고, 살이 병들고, 살이 갇힌 그 상태, 그러니까 현실에서 겪는 살의 비구원의 상태가 ‘흘러 지나갈’ 혹은 ‘외면해도 될’ 어떤 ‘부스러기’ 쯤으로, 혹은 ‘건너가야 할’ 혹은 ‘벗어나야 할’ 어떤 ‘장애물’ 쯤으로 보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한마디로 ‘세상의 번뇌’ 쯤으로 말입니다.

그런데 어쩌겠습니까? 수많은 사람이 그 ‘살’의 영역에서 한평생 몸부림치고 있는 것을. 성사는 그 ‘살들의 전쟁’ 속에서 ‘효력’이 드러나는 것이 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경제 분야에서, 정치 분야에서, 문화 분야에서, 국제관계에서, 하늘과 땅과 물(자연)에서……. 무엇보다도 성사의 원천이신 예수님께서 ‘살’을 갖고 ‘살들’과 만나시면서, 그 ‘살들’을 해방시키심으로써, 그들을 아버지와 결합시키셨으므로.

성사와 성사의 효력을 다시 생각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성사와 같습니다.
 

박동호 신부 (안드레아)
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신정동성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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