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만사 인생사]


금연 캠페인은 매우 무비판적으로 수용되었다. 그런데 설혹 그것이 무비판적이고 맹목적으로 수용되었다 하더라도 금연이라는 것은 결코 나쁘지는 않은 것이다. 굳이 간접흡연의 폐해를 들먹이면서 목울대를 세워 젖히지 않더라도 누구나 다 안다. 담배를 피우는 인간들도 그것이 이롭지 않다는 것을 잘 안다. 그렇기 때문에 금연 캠페인은 무비판적으로 수용되었다.

결국 애연가들은 조자룡 칼날 앞의 모가지들처럼 줄줄이 떨어져 나갔다. 요컨대 그들에게는, 담배를 피우는 것의 합리적 이유와 금연 주장에 대한 과학적 오류를 증명할 능력이 없었던 것이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허나 금연을 결심한, 그리고 금연을 결심하다 만, 중요하게는 금연을 결심하지 못하는 이 시대 가장들의 생각은 어떨지 궁금하다. (물론, 아주 흔쾌히, 보란 듯이, 별 어려움 없이 당당히 금연에 성공한 역사적 승리자들도 많이 있다는 것을 내 모르는 바 아니다)

나는 어느 편이냐 하면 담배를 끊네 마네 하는 고민 자체를 해 본 적이 없어서, 사람들이 매년 연초에 금연을 결심한다는 사실도 몰랐고 그러는 이유는 더더욱 몰랐다. 물론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그런데.... 며칠 전 식탁에서 뭔가 깨달은 바 있어 지금까지 머리 속에 ‘가장’ ‘금연’ ‘금주’ 뭐 이런 단어들이 사라지지 않는다.

건강과 몸매를 관리하는 분야에서 나름의 입지를 가지고 일을 하고 있는 마누라가 언제부터인가 저녁을 통 먹지 않더니 어느 순간 몰라보게 날씬해졌다. 남들에게 뭘 권하려면 자기가 먼저 체험해야 한다는 지론을 가지고 열심히 용맹정진 한 모양이다. 주위 사람들은 침이 마르도록 ‘예뻐졌다’를 반복했고 토마스는 참 좋겠다는 말도 했다. (내가 왜 좋지?)

그러더니 이제 건강에도 안 좋고 실수나 하게 하는 술을 끊겠다고 선언하더니 근 한 달째 술을 입에도 대지 않고 있는 중이다. (부부 모임에 나가면 내가 제 몫까지 다 퍼 마셔야 한다는 사실을 그 아낙은 전혀 모르고 있다. 아 불쌍한 내 간이여)

어쨌든 마누라는 날씬해지고 술도 안 마시고 틈틈이 밸리댄스로 몸을 가꾸는 여자가 되었다. 말하자면 술 담배에, 폭식에, 음담패설에, 상식 이하의 옷차림과 때, 냄새에 절어 있는 나로부터 이륙하여 중상류 여인들의 꼴값을 갖추며 바야흐로 거듭나고 있었던 것이다.

아... 나는 나에 꼭 맞는 아낙을 만났으나 이제 나로서는 언감생심, 쳐다보지도 못할 여자와 살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독하기는 제 에미를 닮아, 둘째가라면 서럽게 독한 딸내미가 갑자기 언제부터인지 절식을 선언하고, 뺄 살이 어디 있다고, 몇 킬로는 감량해야 한다며 냅다 저녁을 굶기 시작했다. 이제 우리 집안에서 저녁을 먹어야 하는 서글프고, 한심한 족속은 나 하나 남게 되었다.

그리고 문제의 그날, 나는 밖에서 술을 먹고 들어왔다. 여러분에게 장담할 수 있다. 나는 술을 아무리 많이 먹어도 혀가 꼬부라지거나 실수를 하거나 하지는 않는다는 얘기를 자주 듣는다. 따라서 그 날도 나는 실수하지 않았고 자판 좀 두드리다가 이내 잠들었을 뿐이다.

다음날 아침 식탁에 앉았을 때, 마누라와 딸내미는 내게 눈길도 주지 않고 피망과 당근, 사과를 우걱대며 씹고 있었고 속 쓰린 나는 생선찌개 국물을 들이키며 계란을 먹고 밥을 먹고 방으로 들어왔다. 그 조용했던 식탁이 내가 사라짐과 동시에 떠들썩한 자리로 변해 왈왈 웃는 소리가 들렸고 화기애애한 대화로 가득 찼다. 외로웠다. 정말 외로웠다....

바로 그때 퍼뜩 든 생각이다.
아....
이 시대 가장들은 이래서 담배를 끊는 모양이다.
이래서 술을 끊는 모양이다.

나도 가장이지만 이 나라 사내들이 고집이 얼마나 센가. 여간한 말로는 그들의 고집을 꺾을 수 없는 법이다. 따라서 그들이 그렇게 줄줄이 금연의 진영으로 투항해 들어가는 이유를 나는 몰랐던 것인데 그날 아침, 마치 염화시중의 미소처럼 이유 없이, 삽시간에 어떤 깨달음이 머리를 스치게 된 것인데, 그러나 그 깨달음은 몹시 이로웠다.

‘마누라와 딸내미에게 온전히 섞이려면 금연을 하고 술을 끊어 일단 냄새부터 없애야 하나?’ ‘아니 그러다가 지들처럼 저녁도 굶으라고 그러면 어쩌지?’ ‘아예 밥을 주지 않거나 집에 쌀을 들여놓지 않으면?’ ‘으악.... 나보고 밸리 댄스를 하라고 하면 어쩌지?’

금연은 나쁜 것은 아니다. 그리고 사회적 풍습, 혹은 유행, 그리고 건강을 챙기는 것도 물론 나쁜 것이 아니다. 그러나 마치 남북 분단 같은, 서글픈 구분과 단절은 정말 너무 싫다. 

 

변영국/ 토마스 아퀴나스, 서울 수송국민학교를 졸업했으며 희곡 쓰고 연출하는 연극인인 동시에 주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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