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시대, 평신도 교양 - 2]

원래 2회는 신자 5백만 시대의 다양성에 대해 몇 가지 함께 생각해 보자는 취지로 출발했는데, 때마침 대한민국수호천주교인모임(이하 대수천)의 맹활약(?)과 시기적으로 겹쳤다. 그 단체를 직접적으로 비판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다만 신자 5백만 시대의 교회에서 이런 갈등과 충돌이 계속해서 일어날 것 같은 예감을 공유하고 싶다. 넓게 보면 이 또한 다양성의 표현일 것이다.

신자 5백만 시대

한국 가톨릭은 신자 5백만 시대에 접어들었다. 5천만의 10%이니 5백만이라고 어림잡은 수치다. 정확한 신자의 숫자야 하느님만이 아실 테고, 일단 ‘5백만’이라는 상징적 숫자를 생각해 보자.

5백만은 확실히 큰 숫자다. 교회의 몸이 그만큼 성장했다는 뜻이다. 그런데 지난 글에 썼듯, 한국 천주교 230년 역사 가운데 최근 60여년에 급속히 이룬 성과다. 우리는 결코 점진적으로 성장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직 이런 큰 몸에 익숙하지 않은 듯하다. 이제라도 큰 몸을 진지하게 성찰해야 하지 않을까. 필자는 ‘다양성’을 화두로 제시하고 싶다.

사회적 다양성

신자 5백만 시대의 평신도 구성은 다양하다. 한국 사회의 다양성을 교회 안에서도 그대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민주화와 산업화의 진전으로 한국 사회는 개인의 관심과 취향이 다채로워졌다. 가톨릭 신자들이라고 그런 다양성에서 예외일 수 없다. 사회 구성원과 교회 구성원의 분포가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사회에 존재하는 모든 종류의 개성과 취향이 교회 안에도 있다고 인정해야 할 것이다.

결국 가톨릭 신자들은 그저 평범한 한국 사람들이다. 가톨릭 신자와 비신자들의 구별선이 희미하다. 평범한 사람들로 가득 채워지는 교회의 모습은 분명 바람직하고 감사할 일이다. 그래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5백만 명이나 되는 신자들은 특별히 가톨릭 특유의 영적 갈등이 유별나지 않은 사람일 수 있다. 교회는 엄숙하고 경건한 사람들만 따로 뽑아서 모은 집단이 아니다. 그리고 과거 소수 종교 시절 공유했던 가톨릭 신자 특유의 ‘독특한 믿음의 정서’ 같은 것이 희석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현실은 ‘한국형 세속화’에 대해서 고찰할 필요를 제시한다. 사회에서 통용되는 물신과 선동의 언어가 교회 안에서도 고스란히 통용될 것이다. 평신도들은 세상에서 세속적 방법으로 산다. 세속적 관심, 욕심, 이익 등을 최선을 다해 추구해야 생존할 수 있는 평신도들이다. 그들은 아마도 교회 안에서도 그대로 생각하고 일하는 게 편할 것이다. 교회 안에서도 한국 특유의 ‘빨리빨리 문화’와 ‘상명하복의 군대문화’, ‘군중 동원의 문화’ 등에 익숙한 모습을 발견할 때가 있지 않은가. 그래서 이런 세속의 문화와 다른 문화를 교회 안에서 발견하고 싶은 사람은 실망하기도 한다.

종교 체험의 다양성

둘째는 ‘종교 체험의 다양성’이다. 입교 경로와 현재의 신앙생활이 다양하다는 뜻이다. 수 대째 이어내려 오는 구교 집안이나 순교자 집안이 있는가 하면, 방송이나 영화에 등장하는 이미지에 끌려 입교한 사람이나, 군대에서 집단으로 세례 받은 사람도 있다. 타종교에서 오랫동안 종교적 체험을 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런 점 때문에 과거 소수 종교 시절에 공유하던 가톨릭 신자 특유의 동질성이 묽어진 듯하다.

약현성당의 열심한 평신도셨던 필자의 할아버지는 해방직후 성당 근처에서 장사를 하셨는데, 일단 신자라면 생면부지의 사람이라도 밥이라도 한 끼 먹여 보내셨다고 한다. 성당 열심히 다니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그런 정서가 있었다. 사제의 말씀이라면 지상명령과 같이 받아들이셨고, 성당일이라면 크고 작은 일을 가리지 않고 온 가족이 참여하였다. 아버지와과 작은 아버지 등이 들려주신 이런 일화는 필자가 태어나기 훨씬 전, 대개 광복 직후의 일이다. 돌아보면 박해기(102년)와 고난기(67년)를 겪은 직후이니 그 당시 천주교 신자는 그만큼 강한 유대로 똘똘 뭉친 집단이었을 것 같다.

지금은 그런 정서가 상당히 사라졌다. 때로 그런 강한 동질적 정서를 전제하는 교우들을 만나면 반갑기도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 이런 구교 집안 신자들의 정서가 과연 다수이고 정통일 수 있는지 의문이 들 때도 있다. 나아가 구교 집안에도 냉담중인 후손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제는 그저 ‘다양한 신자들’만이 존재한다는 생각이다. 누구나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수 있고, 누구나 목소리를 낼 것이다.

신앙 체험의 다양성

신자 5백만 시대의 교회의 몸집은 커졌고, 다양한 단체도 많이 생겨났다. 그 과정에서 필자가 주목하는 점은 신앙생활의 터전이 ‘본당 중심’에서 벗어나 훨씬 다채로워졌다는 점이다.

실제로 본당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더라도,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방법은 많다. 다양한 수도회는 전례와 피정 등에 참여할 길을 제공한다. 많이 부족하다고 해도, 특수사목은 양적으로 늘었다. 한국에서 자생한 단체든, 외국에서 도입한 단체든, 다양한 가톨릭 단체들이 존재한다. 본당 밖에서도 의미 있는 신앙적·인격적 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 그래서 절친한 교우가 본당 밖에 있을 수 있다. 이른바 진보적인 단체든, 신심 단체든, 대수천 같은 극우 단체든, ‘중심’이 본당 밖에 있을 수 있다. 다양성과 자유는 본당의 경계를 넘어 끼리끼리 모이는 문화로 표현된다.

교통과 통신 수단의 발달을 고려하면 ‘탈본당의 다양성’은 더욱 증가할 것이다. 인기 있는 신부님의 피정이나 강연은 전국에서 신자들이 모여들지 않는가. 정치적 입장과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신자들의 모임은 교구의 경계를 쉽게 넘는다. 김수환 추기경님이 선종하셨을 때, 명동성당을 둘러쌌던 조문 인파는 서울대교구민들만이 아니었다. 대한문 미사에는 전국의 사제들이 참여해 주셨다. 페이스북이나 인터넷 카페에는 외국에 계신 분들도 실시간으로 친밀하게 소통한다.

이런 의미에서 신자 5백만 시대에는 본당의 의미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성찰해야 할 것이다. 본당은 동질적인 정체성을 형성하고 유지하는 조직이 아닐 것이다. 본당을 포함해서, 각종 교회 조직은 이런 다양성을 수용하고 자유롭게 표현하는 ‘잔치의 무대’로서 기능해야 하지 않을까.

이런 현상은 ‘교회 내의 일치’에 대해서 재고하게 만들 것 같다. 본당을 포함해서 자신이 속하고 활동하는 곳이 전체 교회의 부분일 뿐이요, 타인과의 일치와 조화를 지향하는 곳임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이런 현상은 참된 소속감이나 자부심과 관련될 것이다. 교회 안에서 굳이 내 단체가 최고라는 자부심을 지녀야 할까. 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론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교회 안에서 다른 곳보다 우월하다거나 지배적인 곳은 없다는 상식이 자리잡아야 할 것이다. 생각이 다른 신자를 거슬러 ‘영적 전투’를 벌일 수는 없다. 구원 체험은 배제의 언어에서 발생하지 않는다.

다양한 매체와 대표성

다양성이 높아진 교회는 매체와 대표성에 대해서도 다른 시각을 요구할 것 같다. 우선 가톨릭 언론매체는 더욱 분화될 것 같다. 다양한 개성과 관심을 모두 담아내는 총괄적인 매체는 그 자체로 어렵기도 하거니와, 그런 매체를 건설하고 유지하려는 유효한 노력도 충분하지 않았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의 작은 성공과 대중적 관심도 그런 다양한 관심의 표출이 바탕이 된 것 같다.

하나의 단체가 평신도를 대표하는 일도 어려워질 것 같다. 교구의 평신도협의회가 그 교구의 모든 평신도를 대표할 수 있을까. 천주교정의구현전국연합이 진보적 평신도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을까. 단일한 위계조직보다는 활기찬 시장이나 잔치 같은 분위기가 이런 시대에 어울릴 것이다. 복음은 일방적인 침묵과 중지를 강요하지 않는다.

신자 5백만 시대의 교회에서 서로간의 다양성을 존중하는 문화는 더욱 요긴할 것이다. 교우들의 다양성을 존중하지 않고 배척하는 태도는 결국 줄어들어야 할 것이다. 다름을 사랑하고 하느님과 인간에게 겸손한 태도가 가톨릭 신자의 필수적 교양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자신과 견해가 다른 단체를 꺾거나 주저앉히려는 사고는 복음적이지 않다.

다양성의 적, 순혈주의

이런 면에서 순혈주의가 앞으로 다양성과 충돌을 일으키리라 생각한다. 순혈주의는 오직 순수하게 준비된 사람만이 교회의 중요한 자리를 독점 또는 과점할 수 있다는 태도이다. 순수한 자격 또는 혈통을 갖추지 못한 사람은 사전에 배제되는 순혈주의는 큰 몸에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 ‘직분’은 당연하다. 하지만 ‘골품제’는 복음적 기쁨을 발생시키지 않는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성직자의 출세주의를 배격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한국에서 이 말씀을 진지하게 성찰하는 자라면, 교회 안에 성직자와 관련하여 은연중에 떠도는 ‘라인’이나 ‘성골’ 같은 단어를 지우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물론 출세주의는 성직자에게만 해당하는 말이 아니다.

갈등은 더욱 드러날 것이다

결론적으로 소수 시절의 문화에 익숙한 교회는 아직 교회 안팎의 다양성을 충분히 음미하는 것 같지 않다. 지금까지 언급한 대로, 교회는 짧은 시간동안 5백만이라는 큰 몸을 얻었을 뿐이다. 교회 안에 넓게 퍼진 한국형 세속화 문화-빨리빨리, 상명하복, 군중동원 등-에 대해서도 비판적으로 자각하지 못하는 것 같다. 오히려 단맛과 화학조미료에 중독되듯 세속화된 문화에 편승하여 일을 추진하는 경향도 보일 때가 있다. 배타적 순혈주의와 출세주의에 대해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극복하는 것은 아직 ‘가톨릭 신자의 교양’이 되지 못하였다.

그 사이 교회 내의 갈등과 충돌이 사람들의 눈을 사로잡았다. 대수천은 매우 거칠고 비복음적 언행으로 사제들과 교우들을 비난한다. 당분간은 그들이 원숙하고 점잖은 언행을 보여줄 것 같지 않다. 글머리에서 밝혔듯, 어쩌면 다양성이 드높아진 교회에서 이런 갈등은 일상처럼 재연될 것 같은 예감이다. 한마디로 그보다 더 괴물 같은 집단이 출몰할 수 있다.

다양성이란 말은 그 자체로 전방위적이다. 사회에서 하듯 정치적 입장이 다르거나 다양한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집단이 맞설 것이다. 갈등과 충돌을 일으키는 문제는 대개 예민할 것이다. 장기적 갈등도 있지만 국지적이고 단기적인 충돌도 잦아질 것이라는 말이다. 평신도들끼리 부딪힐 수도 있지만, 이번처럼 일부 신자들이 직접 사제들을 비난하기도 할 거다. 교회의 권위가 이런 갈등을 조정하고 원만히 해결할 수 있을까.

새 신학은?

이런 현상에 맞춰 새로운 신학이 필요할 것 같다. 대수천의 방식이 확산된다면 교회의 품격은 추락할 것이다. 일방주의와 배타성에 같은 방식으로 맞설 수는 없다. 교회에서 양적 민주주의는 대안이 아니다. 다양한 주장과 논거를 민주적으로 조절하는 방법은 보조적 수단으로서만 의미 있을 것이다. 변화한 현실에 맞게, 다양성을 폭넓게 인정하면서도, 무엇인가 신학적이고 복음적 방법이 필요하다. 그것에 대해서 다음 글에서 생각해 보겠다.

참고로, 지난 글을 다시 읽어보니, 생각보다 거창하게 시작된 것 같았다. 거듭 밝히지만, 아직 설익은 생각이라서 죄송하고, 많은 분들의 관심과 질책을 겸손되이 요청하고 싶다.


 
주원준
우리신학연구소 연구위원이며 한님성서연구소의 수석연구원으로 독일에서 구약학과 고대 근동학을 공부했다. 결혼한 지 채 3년이 지나지 않은 공식 신혼생활 중이다. ‘평신도 신학자’라 불리는 걸 가장 행복해하는 한 아이의 아빠이다.

<기사 제휴 / 갈라진 시대의 기쁜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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