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력버튼이 하얀 쌀밥이 되고
알아서 빨래가 삶아져 나오는
기술의 진보에
잔솔가지 군불 지피던
어머니의 부엌에서
해방된 아내는
오늘도
맥도널드 정자점에서
양배추를 썬다
시급 2,100원

-이한주, 하이테크 

 

<노동의 종말>이라는 제레미 리프킨의 저서가 한참 유행했던 적이 있다. 찬찬하고 좋은 책이었다. 하지만 한편 삶의 희망보다는 위기의식을 많이 느끼게 하는 책이었다. 나는 그 제목이 자꾸 노동운동의 종말이라고 읽혀졌다. 곧 떨어져야 할 늦가을의 헐거운 낙옆처럼 ‘노동’이라는 화두를 쫓아 살아왔던 나의 젊은 날이 쓸쓸했다. 정보화, 자동화는 분명 놀라운 인류의 진보였다. 중국 무협지의 축지법을 쓰지 않고도 우리는 이제 인터넷 문명의 혜택을 받아 전세계를 나다닐 수 있다.

하지만 진정 기술의 진보는 인류에게 행복을, 여유를, 자유를 가져다주었는가. 노동으로부터 해방시켜주었는가. 시 속의 주인공인 ‘아내’는 그 기술 진보의 결과가 어떠한 가를 너무도 극명하게 보여준다. 무서울 정도다. 부엌에서 해방된 아내는 이제 ‘시급 2,100원’을 받고 ‘맥도널드 정자점에서/양배추를 썬다’

시를 통해 보듯 정보화, 자동화 시대에 노동은 종말하지 않는다. 다만 더욱 소외될 뿐이다. 이데올로기로부터도 소외되고, 그나마 안정적인 자리에서도 더 낮은 자리로 소외된다. 정보화, 자동화의 과실이 골고루 분배되지 않고 일부의 호주머니 속으로 더 많이 축적되기 때문이다. 결국 세상의 진보는 기술의 진보만으로 비롯되지 않는다. 기술의 진보를 전체 사회의 진보로 이끌 수 있는 사람들의 진보가 병행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 사람들의 힘에 의한 사회 관계의 재조정, 분배 매커니즘의 재조정이 있지 않고는 소외와 착취의 쳇바퀴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기술의 진보에 의해 의도적으로 배신당한 사람들의 다른 이름이 요즈음 흔히 얘기되고 있는 비정규직노동자들이다. 기술의 진보만큼 그들이 스스로 조직화를 이루어 사회의 진보를 이루어 줄 날을 기다려 본다. 노동은 종말하지 않는다. 진정으로 해방된 노동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노동귀족들은 죽을지 모를망정 노동은 죽지 않고 끝끝내 부조리한 이 사회를 고발한다. 

* 이한주 / 1965년 서울 생. 1992년 <윤상원 문학상> 수상. 시집으로 『평화시장』(갈무리)이 있다. 현재 철도노동자로 일하고 있다.

송경동 / 시인. 시집으로 <꿀잠>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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