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태의 추적! 공자(追跡! 孔子) - 25]

논어와 공자를 공부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그 배경시대인 춘추시대와 그 시대를 포괄하고 있던 주(周)나라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다. 주나라가 역사에 등장한 시점은 기원전 1046년으로 알려져 있다. 이 시점은 주나라가 건국한 시점이기도 하지만 사실상 중국의 역사시대가 개시된 시점이기도 하다. 물론 그 이전에 은나라가 있었다. 은나라에 관해서는 <사기> 등에 나름대로 기본적인 사실(史實)과 약간의 일화가 없지는 않다. 또 20세기 초 은허의 발굴로 역사시대에 편입은 되었지만 그 내용은 여전히 빈약하다. 그 이전의 전설시대인 하나라나 삼황오제시대보다 크게 나을 것이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주나라는 다르다. 주나라는 전설시대를 하루아침에 역사시대로 끌어올렸다. 그것도 찬란한 문화의 시대로 말이다. 마치 무성의 흑백영화가 갑자기 유성의 총천연색 시네마스코프 영화로 변한 것 같다. 그 시대의 마지막 단계에서 공자가 배출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주나라는 주목에 값하는 시대다.

주나라는 중국의 역대 왕조 중에서 가장 긴 존속기간을 보여주는 왕조이기도 하다. 끝난 시점을 언제로 볼 것인가에 따라 존속기간은 약간씩 차이가 있다. 전국시대를 배제하면 대략 600여 년이 되고 전국시대를 포함하면 800여 년이 넘는다. 중국의 역대 왕조들이 길어야 300년을 잘 넘기지 못했던 것에 비하면 엄청나게 긴 존속기간이다.

왕권 그 자체로 보면 주나라의 왕들처럼 무력했던 왕들이 없었다. 진시황 이후 군현제로 나라를 다스렸던 여러 왕들은 막강한 중앙집권적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주나라의 왕들은 기본적으로 주변 제후국들로부터 보호를 받아야 하는 입장이었다. 그나마 여의치 못할 때에는 서쪽 또는 북쪽의 오랑캐들에게 속수무책으로 시달리기도 했다. 그런 연약한 왕조가 어떻게 가장 긴 존속기간을 보여주었을까? 그것은 의문이자 신비였다.

그 첫 번째 이유는 봉건제도라는 매우 특수한 정치제도에서 오는 것 같다. 오늘날 우리는 봉건제도에 대해 많은 오해를 하고 있다. 봉건제도라는 말은 부정적인 이미지로 가득 차 있다. 그것은 서양사를 번역하던 사람들이 feudalism의 역어로 동양의 봉건제도라는 말을 함부로 차용한 데에 일차적인 원인이 있다. 서양 중세의 봉건제도와 동양 고대의 봉건제도는 외형상의 유사점에도 불구하고 역사의 물줄기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도저히 같은 이름으로 불릴 수 없는 차이를 가지고 있다. 그것이 혼란과 오해의 가장 큰 원인이었다.

또 동양이 근대화되는 과정에서 낡은 유습에 대해 사람들이 봉건적이라는 말을 무분별하게 사용한 것도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정치적 제도로서의 ‘진짜 봉건주의’는 까마득한 옛날, 전국시대의 개막과 더불어 지구상에서 사라진 제도다. 사라진지 거의 2400년이 되었다는 뜻이다. 고도의 상상력을 동원하지 않으면 추체험조차 하기 어려운 것이 되고 말았으니 잔재니 유습이니 하는 말은 애초부터 성립될 수 없었던 것이다.

주나라 건국시로 돌아가 보자. 무왕은 자신의 많은 피붙이들과 공신들에게 봉토를 나누어 다스리게 하였다. 무왕이 형제들로 하여금 다스리게 한 나라만 해도 노(魯)나라, 위(衛)나라, 채(蔡)나라, 조(曹)나라, 등(滕)나라 등 16개 나라였고 자신의 아들들로 하여금 다스리게 한 나라도 진(晉)나라를 비롯하여 4개 나라였다. 또 아우인 주공의 아들들로 하여금 다스리게 한 나라도 형(邢)나라 등 6개 나라였다.

그러나 제후국들의 숫자가 대략 140개 정도였다고 하니 모든 나라들을 피붙이들에게만 나누어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를테면 춘추시대에 패자로 이름을 낸 나라들, 제(齊), 진(晉), 초(楚), 오(吳), 진(秦) 중에서 무왕의 피붙이가 제후로 봉해진 나라는 엄밀하게 말하면 진(晉)나라 하나 밖에 없었다. 제나라는 공신인 강태공이 봉해진 나라였고 초나라는 무왕의 아들 성왕(成王) 당시에 건국 공신의 후손인 웅역(熊繹)을 봉한 나라였다. 오나라는 같은 희씨(姬氏)라고는 하나 문왕의 두 큰아버지 태백과 중옹이 형만지방으로 달아나 세운 나라이기 때문에 다른 피붙이 나라와는 사정이 다르다. 심지어 진(秦)나라는 서쪽에 치우쳐 있다 하여 주나라가 건국되고도 봉국의 범위 밖에 놓여 있다가 동주시대가 개막되고 나서야 뒤늦게 봉국으로 편입되었다.

주로 왕도에 가까운 나라에 피붙이들을 봉함으로써 왕을 보필할 수 있도록 하였던 것이 분명하다. 그것이 서로 흩어진 수많은 나라들을 하나로 얽는 기본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이었다면 그 유대는 후대로 갈수록 해이해지는 것이 불가피했을 것이다. 논어에는 건국 초기에 이들 나라에 어떤 질서를 부여할 것인지를 고민했던 흔적이 남아 있다.

주공(周公)이 노공(魯公)에게 말했다.
“군자는 그 친족에게만 편중하지 않아 대신들로 하여금 써주지 않는다고 원망하게 하지 않는다. 오래 함께해온 사람은 큰 문제가 없는 한 버리지 않는다.”
周公謂魯公曰; 君子不施其親, 不使大臣怨乎不以. 故舊無大故, 則不棄也. 18/10

이른바 종법제도를 기초로 하고는 있지만 건국공신들을 소외시키지 않으려는 배려가 곳곳에 드러나 있다. 심지어 요왈편 1장에 보면 “비록 주나라의 친족들이 있다지만 어진 사람만은 못하다”(雖有周親, 不如仁人)는 단호한 입장도 보인다. 이런 배려들이 봉건사회의 취약점을 잘 보완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한다.

그러나 종법제도와 봉건제도는 그 자체로는 단순한 기반에 지나지 않는다. 이 기본 틀을 채운 것은 의미로 충만한 여러 건국신화들이었다. 은나라 마지막 왕 주(紂)를 둘러싼 갖가지 설화가 주나라 건국의 불가피성을 뒷받침하고 있는가 하면 문왕의 전설적 덕정이 왕도정치의 이상을 높이 세웠다. 또 그의 아들이자 주왕조의 실질적인 창건자 무왕의 은정벌 사건은 주왕조가 숨기지 않고 선양한 백이숙제의 수양산 설화와 함께 주나라의 탄탄한 기점을 이루고 있다.

그뿐인가? 무왕의 아우였던 주공(周公)의 예악 정비와 금등(金騰)의 충정이 생생하게 남아 있는가 하면 곧은 낚시로 유명한 강태공의 일화 등등도 건국신화의 생동감을 더해주고 있다. 이 명분과 이상으로 가득한 일화들은 주대 800년 동안 모든 사람들의 정치적 상상력을 휘어잡았다. 그 중에서도 가장 의미 있는 것은 문왕과 무왕을 중심으로 한 왕도정치의 이상이었다.

위나라의 공손조(公孫朝)가 자공에게 물었다.
“중니(仲尼)께서는 어디서 배우셨습니까?”
자공이 말했다.
“문왕과 무왕의 도가 아직 땅에 다 떨어지지 아니하고 사람에게 남아 있어 현명한 자는 그 중 큰 것을 알고 있고 현명하지 못한 자는 그 중 작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문왕과 무왕의 도를 지니지 않은 자가 없으니 우리 선생님께서 어디서인들 배우지 않으셨겠으며 또한 어떻게 일정한 스승이 따로 있었겠습니까?”
衛公孫朝問於子貢曰; 仲尼焉學? 子貢曰; 文武之道, 未墜於地, 在人, 賢者識其大者, 不賢者識其小者. 莫不有文武之道焉, 夫子焉不學? 而亦何常師之有? 19/22

자공의 의식을 사로잡고 있던 것은 비단 자공 한 사람만을 사로잡고 있었던 것이 아님을 알 필요가 있다.

선생님께서 광(匡) 지방에서 위기에 처하셨을 때 말씀하셨다.
“문왕(文王)은 이미 돌아가셨으나 문(文)은 여기에 남아 있지 않느냐! 하늘이 장차 이 문(文)을 없애고자 했더라면 후에 죽을 자들은 이 문(文)과 함께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하늘도 이 문을 없애지 못한다면 광(匡)의 사람들이 나를 죽인들 무엇하겠느냐?”
子畏於匡, 曰; 文王旣沒, 文不在玆乎! 天之將喪斯文也, 後死者不得與於斯文也. 天之未喪斯文也, 匡人其如予何? 9/5

공자 자신의 의식의 정점(頂點)에 있었던 것도 다름 아닌 문무지도(文武之道)였다. 그 이상과 이념은 아마도 전설시대였던 요순(堯舜)에 대한 남다른 강조를 통해 더 확고히 뒷받침되었을 것이다. 이 점에서 나는 <서경(書經)>의 편찬이 건국 초기부터 의도적으로 시도된 일련의 수준 높은 정치행위였다고 본다. 그리고 그것이 엄청난 성공이었음도 말해두고 싶다. 공자와 그 제자들마저도 시경과 더불어 서경을 일상적으로 공부하고 이야기하였다고 논어는 기록(7/19)하고 있다. 그것은 주대를 일관하여 모든 지식인들에게 높은 정치적 상상력의 기반, 정치적 행동의 전범이 되었을 것이며 이 세상과 인간을 해석하는 굳건한 틀로 자리 잡았을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공자가 수없이 강조해온 저 문(文)이기도 했을 것이다.

주나라의 이 튼튼한 건국이념과 찬란한 문화는 결과적으로 멀리 떨어진 주변부마저도 강한 힘으로 끌어당겼던 것 같다. 무왕이 감히 건드리지 못했던 서쪽의 진(秦)나라도 동주가 시작될 무렵에 가서는 주나라의 제도에 편입되는 것이 유리하고 더 자랑스러운 일임을 깨닫게 된 것 같다. 주의 문물을 받아들여 그 체제에 편입됨으로써 선진문화국이 되느냐 그 바깥에서 반(半) 오랑캐 소리를 듣느냐 하는 것이 거의 모든 외곽국가들의 공통된 생각이었던 것 같다.

그것이 문화의 힘이었다. 서쪽의 진나라는 물론, 남방의 초나라, 오나라, 월나라까지, 북방으로는 저 연(燕)나라까지 주나라의 제도와 문물은 힘을 미쳐갔다. 물론 세월이 흐르고 그 힘은 점점 미약해 갔다. 그렇지만 결코 완전히 죽지는 않았다. 진(晉)나라가 분열될 무렵 주나라는 600년을 넘기고 그 문화적 힘도 광채를 현저히 잃고 있었지만 분열된 세 나라 한(韓), 조(趙), 위(魏)는 주나라의 위열왕(威烈王)으로부터 제후로 임명(B.C. 403)을 받고서야 주나라의 열국 가운데에 끼어들 수 있었다. 주나라가 세운 높은 명분의 질서는 건국 후 643년이 지난 그 시점에서도 여전히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지구상에서 사라진지 2400년이 넘은 신비한 제도 봉건주의를 바탕으로 찬란한 문화를 이룩했던 주나라. 그 나라는 내가 보기에는 아직도 신비의 나라다. 아직까지 한 번도 그 문화적 특성이 제대로 밝혀진 적이 없었다는 뜻이다. 하늘에 대한 맹세와 서로간의 맹약으로 움직여지던 이상한 나라. 약속과 신의, 거북점과 제례의 엄숙함이 살아있던 나라 주나라는 앞으로 끝없는 탐구의 대상으로 떠오를 필요가 있다.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신비의 인간, 공자와 더불어.
 

 
이수태
연세대학교 법학과 졸업 후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32년간 공직생활을 했다. 평생의 관심은 철학과 종교학이었다. 그 동안 낸 책으로는 <새번역 논어>와 <논어의 발견> 외에 에세이집 <어른 되기의 어려움>, <상처는 세상을 내다보는 창이다> 등이 있다. 제5회 객석 예술평론상, 제1회 시대의 에세이스트상 등을 수상한 바 있다. 퇴직 후 현재는 강의와 집필에 전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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