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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얼굴[여성과 신학]

 

   
어제는 남편의 생일이었다. 평소 같으면 동네가게에서 술과 안주거리, 아이들 음료수를 사와서 주거니 받거니 주님을 즐겁게 모셨으련만, 며칠 전에 몸살이 찾아와 끙끙 앓고 난 뒤끝이라 어제는 남편의 불쾌해진 얼굴을 한번 쓰다듬어주는 것으로 대신했다. 거의 알코올 의존증에 가까운 남편과 대작하려면 하루 걸러 한번쯤 마시는 셈인데, 그리되면 가족과 함께 먹는 밥상이 술상에 훨씬 못 미치지 싶다.

술을 함께 마실 때,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통해 앞으로 얼마만큼 마시면 괜찮을지 가늠하곤 한다. 나와 남편은 술이 약한 편이다. 맥주 1.6리터짜리 한 병 혹은 백세주나 산사춘 두 병쯤 사다가 사이좋게 나눠 마시면 기분 좋게 몸과 마음이 이완된다. 부부가 벌게진 얼굴로 마주앉아 이러쿵저러쿵 이야기 나누는 모습을 아이들이 지켜보다가 대화에 끼어들기도 하면서 우리는 고단한 하루를 접곤 한다. 아이들은 엄마 아빠의 변해버린 얼굴이 이젠 아무렇지도 않다.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 때론 이상하게 다가올 때가 있다. 그중 하나는 내가 내 얼굴을 내 눈으로 직접 보지 못한다는 점이다. 일생 동안 나 자신을 대표하는 내 얼굴은 직접 보지 못한 채 타인 얼굴만 본다는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내 것으로 부여받은 게 분명한 내 얼굴과 내 이름을 나보다 타인들이 더 보고 부른다는 것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남편의 술 취한 얼굴을 보면서 그의 외로움과 어려움을 헤아리고 나의 고민과 문제를 털어놓는 우리의 술자리에서, 나는 우리 모습을 한 뼘 해부하여 신학과 연관시켜 본다.

내가 신학공부를 하면서 고민했던 것은 나와 타인의 관계, 특수성과 보편성의 연관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석사논문을 쓰면서, 나는 여러 종교가 어우러진 한국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미국신학자인 폴 니터(Paul Knitter)를 빌어 생각해보았다. 그는 '신언회'라는 선교회에 속해 있으면서 종교적 타자인 비그리스도인들을 어떤 태도로 만나고 관계 맺을 것인지 고심하였다. 또한 고통 받는 타자인 남미의 가난한 이들과 파괴되어가는 자연 생태계를 돌아보면서, 종교의 벽을 넘어 여러 종교인들이 어떻게 연대하여 하느님 나라를 지구별에 꽃피울 수 있을지 모색하고 있다.

종교적 타자, 고통 받는 타자를 나와 무관한 이들이라고 볼 수 있을까? 유대인 철학자 엠마누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는 타인은 결코 '나'로 환원될 수 없는 사람이라고 강조하면서도 나는 타인과의 열린 관계를 통해서만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고 말했다. 타인은 나와 너의 친밀한 관계 속에서 용해될 수 없는 가난과 고통 속에 있는 '낯선 이'로 남아 있으면서, 나에게 '타인을 위한 존재', '타인을 책임지는 존재'로 살아가라고 다가온다. 타인의 얼굴은 내 양심 한가운데로 관통하여 들어와 나의 관심과 보살핌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나는 남편과 아이들이 편히 자는 얼굴을 들여다보고 고른 숨소리를 들으면서, 우리 가족이 생명을 나누고 서로를 지켜주고 있다는 생각에 안심하곤 한다. 내 곁의 타인이 보여주는 얼굴과 편안한 숨소리에 아무 사심 없이 나를 맡길 때 소박한 평화가 나를 채워준다고 체험한다. 니터나 레비나스는 이렇게 친밀한 관계를 더 확장하여 낯설지만 내 손길이 필요한 타인을 향해 자아의 한계를 초월하고 우주적 평화를 위해 힘써 보라고 제안하고 있으니, 타인을 내 이웃으로 맞이하도록 한발 더 내딛는 것이 내가 추구해야 할 신학이 될 것이다.

유정원/ 가톨릭여성신학회 회원, 가톨릭대학교 성심교정 신학박사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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