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알청춘일기 - 배선영]

나의 열한 번째 레알청춘일기를 써야 한다. 그런데 무엇을 써야 할지 모르겠다.

이런 고민을 하기 시작한 것은 열 번째 글을 써야 했을 때부터이다. 아홉 번째 글을 쓸 때까지는 글감으로 고민을 해본 적이 없었다. 이전부터 가지고 있던 생각들을 풀어내거나, 마침 그때 유독 끌리는 일상의 소재들로 채워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하고 싶은 이야기가 없다. 오랜 백수 생활로 글의 소재가 떨어졌을 수도 있겠다. 일상에 특별한 자극을 준다면 쓰고 싶은 것들이 좀 생겨날까? 아니면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세상에 이미 다 쏟아낸 것일까. 세상에! 나에게 벌써 한계가 온 것인가?

1년 전 이맘때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로부터 글을 연재해달라는 제안을 받았다. 글이라고는 어쩌다 가끔 일기장에 끄적이는 것이 고작이었음에도 냉큼 승낙을 해버렸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나의 특성인 뻔뻔함이 발휘된 것이다. 청춘일기이니 글자 그대로 일기를 쓰듯이 내 이야기를 쓰면 되는 것이라고 가볍게 생각했다.

막상 글을 쓰려고 하자 내가 글쓰기에 대해 알고 있던 생각들이 얼마나 막연한 것이었는지 깨달았다. 글을 쓰는 과정은 생각을 그대로 적어내려가는 것이 아니다. 이야기를 한다고 생각하고 말하는 순서대로 문장을 써내면 앞뒤가 안 맞고, 논리에도 어긋난 이상한 내용이 되고 만다.

글을 쓰면서 내가 얼마나 엉망진창으로 말을 하는지 알게 되었다. 우선 생각나는 대로 막 써내지만, 나중에 앞뒤 문단의 순서를 바꾸고 내용을 더하고 빼면서 글을 완성해 내는 과정은 나를 흥분시켰다. 다른 사람들도 이해할 수 있는 제법 읽을 만한 글이 되어가는 과정은 참으로 신기했다. 글을 쓰는 것이 좋아졌다.

글을 쓰면서 치유를 하기도 한다는데, 나의 경우에는 속 풀이성 글들이 많아서인지 치유까지는 아니어도 속이 후련해지기는 했다. 덕지덕지 붙어 있던 분노와 미움의 감정들을 되짚어볼 기회가 되었다. 생각지도 못한 위안을 받은 것은 글에 달린 댓글이나 개인적으로 남겨준 소감 덕분이었다. 처음 글을 쓸 때에는 읽는 사람을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은 내 이야기가 누군가의 이야기였으면 좋겠다. ‘공감이 된다’는 말이 참으로 힘이 된다. 글을 쓰고 나누는 것이 좋아졌다.

▲ 다이어리들 ⓒ배선영

글을 쓰는 것은 좋아하지만, 글쓰기를 대하는 나의 태도는 점점 게을러지고 있다.

연재를 시작하고 처음 몇 달간은 머릿속 한 켠에 늘 글에 대한 고민이 있었다. 어떤 내용을, 어떤 형식으로 쓸 것인지 오랫동안 고민한 후, 그 생각들을 정리하는 방식으로 글을 썼다. 하지만 글에 대해 고민하는 시간은 점점 짧아져 간다. 마감 일주일을 남기고 글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하는가 하면, 글을 쓰기 위해 컴퓨터 앞에 앉으면서 고민을 시작한 적도 있다. 생각하는 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손가락이 움직이는 대로 글이 나오기도 한다.

게다가 글을 읽는 것에도 아주 불성실하다. 매번 글을 쓸 때마다 표현력의 한계를 느끼면서도 다른 사람의 글을 읽으려고 하지 않는다. 글을 읽을 때 글쓴이와 나를 비교하는 버릇이 생겼기 때문이다. 어쩜 다들 그렇게 글을 잘 쓰는지, 질투가 나서 내용이 들어오지 않는다.

며칠 전, 내 글을 읽은 친구가 ‘글이 참 쉽다’는 평가를 해주었다. 순간 나의 단점을 들킨 것처럼 얼굴이 화끈거렸다. 나는 “일기니까 그렇지”라고 대답했지만, 그 말은 거짓말이었다. “그게 내 수준이야”라고 대답했어야 옳았다. 나는 내가 쓸 수 있는 최선을 쓰고 있다. 어려운 글은 읽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쓸 수 있겠나. 그러나 내 안에는 전문가처럼 어려운 용어를 팍팍 쓰고, 정보도 철철 넘치는 글을 쓰고 싶은 욕망이 있었나보다. 그래서 쉬운 글을 쓰는 스스로를 부끄러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글의 소재는 정했고, 어떻게 쓸까 고민을 하다가 ‘이 글의 메시지는 뭐지?’라는 문장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엥? 메시지? 내가 언제부터 글의 메시지를 생각했단 말인가. 마치 칼럼니스트라도 된 것처럼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주는 것’에 대해 고민하는 나를 발견하자, 어처구니가 없어 혼자 웃었다. 처음에는 내 이야기를 글로 쓴다는 관념만 있었는데, 지금은 글쓰기에 대한 허영과 잘 쓰고 싶다는 열망까지 들러붙어 있다.

문제는 그 잘 쓰고 싶다는 열망이 글에 대한 고민과 성실한 글쓰기 훈련으로 이어지지 않고 비뚤어진 욕심으로 표출되고 있다는 것이다. 글을 쓰기 위해 스스로를 드러내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깨고 용기를 냈던 나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대신 써보지도 않고 이것저것 잰 다음,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쓸 수 없다고 말하는 내가 있다.

무엇을 쓸까에 대한 고민으로 시작한 이 글은 지난 1년 동안 글쓰기에 임했던 나의 태도와 마음을 돌아보게 했다. 이번 글은 고민과 글쓰기가 동시에 이루어졌다. 아니, 오히려 글이 나를 이끌었다. 위대한 글의 힘!

글을 연재하기로 정하는 계약을 6개월마다 한 번씩 하고는 하는데, 그때마다 마음이 싱숭생숭하다. 더 이상 글로 고민하지 않아도 되니 골칫거리 하나가 줄어든다는 안도의 마음은 아주 작고, 서운하고 아쉬운 마음이 훨씬 크다. 글을 쓰는 과정이 힘들면서도 이것이 나를 얼마나 성장시키고,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알기에 놓치고 싶지 않다. 생각해보면 연재를 시작하면서 언제가 다뤄봐야지 했던 주제들 중에 쓰지 못한 것들이 꽤나 있다.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지만 신앙에 대해서도 그리고 성(性)에 대해서도, 꼭 써보고 싶다. 그러니 아직은 연재를 멈추고 싶지 않다.

글에 대해 고민하고 있지 않다는 것은 곧 삶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라는 뜻이다. 바빠진 상황과 일에 대한 걱정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을 뿐, 내 감정은 돌보지 않았다. 내 이야기를 쓰는 과정 속에서 삶을 돌아보고 스스로를 보살피게 된다는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었다. 그러므로 무엇을 쓸 것인가가 아니라 지금 나는 무엇을 느끼고, 무슨 고민을 하며 살고 있냐고 물어봐야 한다. 처음 연재를 할 때 그랬듯이, 그냥 내 이야기를 쓰면 되는 것이다. 이곳은 청춘의 진짜 이야기를 담는 곳이니까.
 

 
 

배선영 (다리아)
대책 없지만, 하루하루를 재미있게 살고 있는 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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