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하는 신학 - 황인수]

사람에게 모진 짓을 하는 것은 자신도 사람인 것을 잊었다는 뜻입니다. 거리낌 없이 거짓말을 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거짓말을 할 수는 있어도 세상을 완전히 속일 수는 없다는 사실을 잊었다는 뜻입니다.

우리 시대에 자본이 노동자들에게 하는 행태나 공권력이 현행법마저 우롱하면서 약자들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최소한의 두려움도 거리낌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부끄러움이 사라진 세상.’ 뉴스를 보면서 자연스레 이런 생각이 떠오릅니다. 물론 공중파 방송이나 큰 신문이 아니라 SNS를 통해 전해지는 뉴스들을 보면서 하는 생각입니다. 방송이나 신문을 보면 그 부끄러움을 모르는 행태에 보는 내가 다 부끄러워지니까요.

아담은 죄를 짓고 무화과나무 잎사귀로 몸을 가린 채 숨습니다. 부끄러웠기 때문입니다. 부끄러움은 존재에 대한 감정입니다. 자기가 무엇을 했는지를 보면서 대체 내가 누구인가를 생각할 때 드는 감정이지요.

행위가 존재를 배신할 때 부끄러움은 생겨납니다. 부끄러움을 뜻하는 한자 치(耻)는 마음(心)과 귀(耳)를 뜻하는 글자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마음의 소리를 듣는다’는 의미겠지요. 그 ‘마음’은 우리 식으로 얘기하면 양심이 되겠지만, 그리스도교식으로 말하면 내 안에 사시는 하느님입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우리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며 그분이 바로 우리 ‘내면의 스승’이시라고 가르쳤습니다. 그 스승 때문에 우리가 진리를 깨달을 수 있고 올바른 삶의 길을 찾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이라는 이야기지요.

양심이라고 부르든 내 안에 계시는 하느님이라고 부르든 우리 사회가 그 중요한 것을 잊어버렸다는 것, 아니 잃어버렸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인 것 같습니다. 이것은 내가 누구인지,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견주어볼 기준을 잃어버렸다는 뜻입니다.

인간이 혼자 있다면 그때는 무엇을 해도 상관없게 됩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이것을 “하느님이 안 계시다면 인간의 존엄성도 보장할 수가 없다”고 표현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의 하느님뿐만 아니라 다른 종교의 절대자들도 계시지 않은 곳이 이 나라가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겉으로만 보면 한국처럼 종교적인 곳도 드물 것입니다. 2005년 한국갤럽의 통계에 따르면 가톨릭과 개신교를 합쳐 그리스도교가 전체 인구의 29.8% 가량을 차지하고 있고, 불교가 26.7% 정도 된다고 합니다. 작은 종교들은 0.6% 정도를 차지하고 있는데 이를 모두 합해 보면 종교인이 전체 인구의 57% 정도 됨을 알 수 있습니다. 전체의 반이 넘는 인구가 종교인이라는 나라에서 타인을 배려하지 않고 제 욕심만 채우려는 짓들을 아무 거리낌 없이, 부끄러움 없이 하고 있는 현실을 도처에서 목도할 수 있다는 것은 대체 무슨 뜻일까요?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아담의 원죄와 연관된 선악과에 재미있는 해석을 내놓습니다. 선악과는 에덴 동산 가운데 심겨져 있는데 그것은 인간이 하느님과 사람들 사이에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인간이 하느님을 잊고 자기 자신이 전부인 줄 알며 자기 힘을 과시하고 즐기기 시작할 때 그것이 모든 죄의 근원인 교만이며 그 교만이 아담이 저지른 원죄라는 이야기입니다.

겉으로는 교회와 절간을 열심히 드나들면서도 실은 제 뱃속을 하느님으로 삼는 이들(로마 16,18; 필리 3,19), 그들에게 유일한 잣대는 폭주하는 욕망이고 바닥을 모를 공허한 제 뱃속입니다. 이 비루한 욕망이 우리가 사는 세상을 온통 덮으려 하고 있습니다. 부끄러움은 사라졌고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의 비명을 들으며 역시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만 얼굴 붉히는 세상입니다.

부끄러움을 찾습니다. 내가 인간임을 아는, 언젠가 내어놓고 떠나야 하는 인간임을 아는 사람들을 찾습니다.
 

 
황인수 신부 (이냐시오)
성바오로수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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