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도 없이 펼쳐진 푸른 초원 위에 드문드문 자리 잡은 흑갈색 야크 천막집에서 하얀 연기가 피어오른다. 천막집 안에 매달린 야크 고기는 고소하게 말라가고 여인은 야크 똥으로 불을 때 갓 짜온 야크 젖을 끓인다. 하늘빛과 인간 노동과 땅의 불꽃이 하나 되어 지어내는 정직한 밥은 그 자체로 영성체가 된다.”

박노해가 ‘다른 길’이라는 말을 꺼내며, 사진과 단상을 들고 세상에 찾아왔다. 나들이 길에 부암동 북한산 자락을 오르다보면 있는 ‘라 카페 갤러리’. 늘 그 곁을 지나치면서도 들러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지금도 ‘라 광야’ 사진전이 열리고 있는 그곳에 가지 못하고, 광화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리는 ‘다른 길’ 사진전을 보았다. 산중보다 더 익숙한 광화문이다. 박노해는 한사코 ‘다른 길’을 보여주지만, 나는 한사코 ‘광화문’을 떠나지 못한다. 아마도 북한산과 광화문 중간 어디쯤에서야 그를 만날 것 같다.

기자간담회에서 만난 박노해는 여전히 차분하게 소곳하니 음성을 가다듬어 정성껏 발음하고 있었다. 지극히 주관적인 내 느낌이겠지만, 그를 보면, 늘 벼랑에 달라붙은 좁고 가파른 길을 걷는 것처럼 위태롭다. 이 위태로운 길을 걸어가야 하니, 늘 조심스럽고, 늘 세심한 배려가 필요했겠지, 생각한다. 사실 그의 얼굴을 보는 것은 ‘편안치 않다.’ 넉살 좋은 입내를 풍길 수 없다. 임의로운 토설이 금지되고, 가만가만 뜻을 전하고, 깨끗한 귀로 응답을 기다려야 할 것 같다. 그의 습관이 내 버릇을 길들인다.

▲ 박노해, 폐허의 레바논에서 (사진 제공 / 나눔문화)

시선이 너무 깊어진 탓일까? 눈매가 깊어 한(恨) 없는 웃음을 볼 수 없는 시인이다. 그가 ‘얼굴 없는 시인’으로 <노동의 새벽>을 출간하고 1991년 체포되어 1998년 7년 6개월 만에 석방되었을 때, 그는 “과거를 팔아 오늘을 살지 않겠다”고 말했다. ‘박해받는 노동자의 해방’이란 뜻으로 ‘박노해’란 가명을 썼던 시인 박기평, 그가 정치를 했다면 노무현 대통령의 뒷길을 밟았을 것이다. 그가 변호사가 아니라 시인이었다는 게 천만다행이다. 여기서는 정치를 나쁘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다만 결 고운 이들이 순정한 마음으로 살아남기 어려운 곳이 ‘정치권’이란 뜻이다.

그가 언제 한번, 이불 속에서라도 파안대소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전라도 함평 출생, 고흥과 벌교에서 자랐고, 선린상고(야간)를 다닌 것이 가방끈의 전부였던 사내. 그가 석방되었을 때 많은 식자들이 ‘변절’을 입에 올렸다. 정치권처럼 운동권에서도 ‘서울대 출신’은 늘 기세등등했다. 박노해에게 동창이 있었을까? 그가 호흡했던 동지들 가운데 그의 ‘이상’을 닮으려 한 이들이 있었을까? 진보정치를 파탄 냈던 민주노동당 사태만 기억해 봐도 ‘영성과 철학이 없는’ 진보운동의 미래가 암담하다.

박노해가 이제는 ‘돈이 되는 운동을 하겠다’고 했을 때, 다들 입을 실룩거렸다. 그와 함께 사노맹 사건으로 사형을 선고받았던 서울대 법대 출신의 백태웅은 석방 후 미국 유학을 떠나 노트르담 대학에서 학위를 받고 미국에서 변호사 생활을 하다 캐나다 브리티시 컬럼비아 대학 교수로 임용되었다. 2004년에는 유엔 북한인권특별보고관에 임명되어 탈북자 문제를 다루게 되면서, “이제 한국의 민주화운동 세력도 북한 인권문제를 적극 제기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세간의 소문에 따르면, 구속 당시 공안검사였던 정형근이 백태웅과 박노해를 두고 “브루투스는 용서해도 스팔타쿠스는 용서할 수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빨갱이’라도 학출보다 노동자들에게 더 가혹했던 우리 현실을 보여준다.

시몬 베유의 스승이었던 생의 철학자 알랭은 ‘위(胃)의 철학’을 선언했다. ‘먹는 문제’를 다루지 않는 철학은 가짜라는 것이다. 박노해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 ‘가난’이 무엇인지 뼈저리게 알았고, ‘돈’이 무엇인지 속속들이 알았다. 하기야 ‘돈이 되는 운동’이란 대중을 설득하는 운동이며, 대중이 참여할 수 있는 여지를 열어놓은 운동이 아니라면 돈(후원금)이 모이지 않는다. 나 역시 언론운동을 하면서 그 점을 아프게 체감한다. 그는 지금 제3세계를 돕는 생명평화NGO ‘나눔문화’ 운동을 하며, 최근에는 양주에서 땅을 빌려 ‘나눔농부네’란 이름으로 농사를 짓고 있다.

박노해를 보면, 외롭지만 혼자 서는 법을 체득해간 한 인간을 본다. 그가 응시했던 세계를 공감하는 이들이 없어도 그는 그 길을 그냥 갈 것이다. 그의 그림자가 더욱 어두운 까닭은 여기에 있지 않을까? 그 어둠을 그의 생애가 피할 수 없다면 끌어안고 갈 수밖에. 이번 사진전에서도 보여준 치밀한 준비와 정갈한 컨셉은 그의 순정함이 무례한 세상에 다치지 않도록 충분히 고려된 것처럼 보인다. ‘진보적 속물’들에게 때 묻지 않기를 바라며 뒤에서나마 고요히 갈채를 보낸다.

박노해는 누가 뭐라 해도 사실상 <노동의 새벽> 한 권만으로도 충분히 세상에 보시했다. 지금 그가 단렌즈 필름카메라를 들고 ‘유랑의 길’을 걸으며 선사하는 것들은 사실상 덤이다. 안 해도 좋고 하면 고마운 일이다. 내 20대와 30대를 아프게 했던 노래가 있다. ‘꽃다지’란 제목으로 불리던 박노해의 시 ‘그리움’이다.

공장 뜨락에
다사론 봄볕 내리면
휴일이라 생기 도는 아이들 얼굴들 위로
개나리 꽃눈이 춤추며 난다

하늘하늘 그리움으로

▲ <노동의 새벽>, 풀빛, 1984
노오란 작은 손
꽃바람 자락에 날려 보내도
더 그리워 그리워서
온몸 흔들다
한 방울 눈물로 떨어진다

바람 드세도
모락모락 아지랑이로 피어나
온 가슴을 적셔 오는 그리움이여
스물다섯 청춘 위로
미싱 바늘처럼 꼭꼭 찍혀 오는
가난에 울며 떠나던
아프도록 그리운 사람아

박노해야말로 “가난에 울며 떠나던 아프도록 그리운 사람”이다. 이건 그의 이름값과 전혀 상관이 없다. 그는 여전히 ‘스물다섯 청춘’이며, ‘온 가슴을 적셔 오는 그리움’을 찾아 나서고 있다. 휴일이면 누렇게 뜬 얼굴이지만 잠시나마 생기 돋아 그렇게 노란 개나리 꽃잎을 날리던 공장 아이들. 그 떨어지는 꽃잎 하나가 눈물 한 방울임을 이미 알았던 사내다. 박노해가 이반 일리치의 글을 빌어 최근에 지은 시처럼 “그대, 희미한 불빛만 살아있다면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말 건네고 싶다.

그러나 여전히 남는 아쉬움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제 그만 ‘박노해’라는 무거운 이름을 내려놓았으면 한다. ‘박노해’라는 이름은 노동해방을 위한 투신이 가져다준 훈장이면서, 가장 무거운 짐이다. 그 이름에서 자유롭게 ‘박기평’이란 평범한 이름으로 돌아앉아, 남과 다를 바 없이 섞여 들어가 울고 웃고 먹고 마시며, 그런 평범한 일상에서 건져 올린 지혜를 나누어 주었으면 바란다. 우리 시대의 영성은 어쩌면 ‘메시아적 인물이 건네주는 희망’이 아니라, ‘말 그대로 백성 안에서’ 피어나는 희망이다.

만인이 박노해가 될 수는 없다. 박노해가 만인 속에서 정갈한 꽃으로 호흡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러면, 그의 그늘이 사라지고, 그의 글과 말뿐 아니라 그의 얼굴 속에서도 ‘환한 해방의 기쁨’을 우리가 나눠가질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한상봉 (이시도로)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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