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중순 새벽 아침
새해하고도 보름이 지난 어느 날 아침 일찍 눈이 떠졌습니다. 마루의 불을 켜고 시계를 보니 새벽 5시. 문 앞 신문을 가져와 화장실에 다녀오니 배가 고픕니다. 주방을 둘러보니 어제 남은 된장찌개와 밥솥엔 찬밥이 조금 남아 있어 우선 쌀을 씻습니다.쌀뜨물은 설거지에 쓰려고 모아놓고 찬밥은 데우고 어제 남은 뒤포리 육수 국물을 된장찌개에 부어 다시 끓이니 주부의 아침 준비 분위기가 납니다. 냉장고를 열어 보니 유정난이 있어 계란도 하나 부치고, 지난 주 본가에서 어머니가 싸주신 조개젓도 식탁위에 올려놓으니 제법 그럴듯한 아침 밥상이 됩니다.
김 생각에 냉동실을 열어 보니 진도 가톨릭농민들이 만든 돌김이 없습니다. 조미 김보다 기름 안 바르고 살짝 구운 김을 좋아하는 제가 다 먹어버리고는 깜박 잊은 거죠. 데운 밥을 푸고 남은 누룽지에는 물을 부어 놓았습니다. ‘밥 먹는 동안 누룽지는 끓겠지...’하는데 소란스러웠던지 아내가 “새벽부터 뭐해...?”하며 눈 비비며 나옵니다.
밥상과의 전쟁
요즘 아내는 아이들 방학을 맞아 ‘밥상과의 전쟁’을 선포했습니다. 방학기간 동안 밥도 현미밥으로 바꾸고, 설탕과 인스턴트 먹을거리와의 전쟁을 선포한 것입니다. 그동안 침도 맞고, 병원도 다녔던 큰 아이의 비염을 이참에 먹을거리로 고쳐볼 요량입니다. 그전에는 비록 동네 유기농매장에서 사왔다고는 하지만 데워먹는 짜장 소스에 스파게티 그리고 남편의 계속되는 압력에도 불구하고 현미 대신 백미를 먹곤 했습니다. 그런 집사람이 이번에는 나름 큰 결심을 한 것입니다. 식단을 현미밥과 친환경 채소, 된장과 같은 발효식품, 생선 중심으로 짜고 설탕은 무조건 금지! 그리고 방학기간 내내 삼시 세끼 엄마표 밥을 해먹이겠다는 나름 야심찬 프로젝트입니다.
밥집을 찾아!
소란 끝에 김장 김치와 조개젓, 계란 부침, 데운 된장찌개를 식탁에 올려놓고 보니 제법 잘 차린 아침 밥상입니다. 그것도 스스로 일어나 손수 차린 밥상이니 대견스럽기까지 합니다. 밥을 다 먹을 쯤 누룽지는 끓고, 누룽지를 먹고 남은 숭늉으로 깨끗이 그릇을 비웁니다. 이제는 도시락 준비. 도시락이라고 해야 집에서 남은 밥만 싸가고 형편 되면 남은 반찬을 싸가는 정도지만 요즘엔 사무실에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닙니다. 사무실이 있는 명동 가톨릭회관 지하에 직원식당이 있긴 하지만 반찬이 대부분 짜고, 언제부터인지 몰려드는 사람들 때문에 정신이 없어 안 간 지 오래되었습니다. 사먹는 밥도 그렇습니다. 매일 12시만 되면 물밀듯이 밀려나오는 직장인들은 명동에 있는 ‘밥집을 찾아!’ 한바탕 전쟁을 치룹니다. 그나마 조금 맛있는 집은 10-20분 기다리는 것은 예사이고, 먹고 난 뒤 감당 못할 조미료 맛은 정말이지 고역입니다. 하여 지난해 말부터 사무실에서 실무자들이 함께 도시락을 먹기 시작했고 요즘엔 특별히 점심약속이 없는 한 매일 도시락을 싸가고 있습니다.
도시락 예찬!
함께 일하는 식구들이 한두 개씩 싸오는 반찬을 모아 놓으면 풍성한 점심밥상이 됩니다. 얼마 전 순일언니가 집에서 담근 김장김치를 가져다 놓았고, 경진이 어머니의 정성이 듬뿍 담긴 겨울 동치미도 함께 먹는 별미입니다. 무엇보다도 밥을 천천히 먹을 수 있어 속도 편합니다. 밥을 먹으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도 나누고, 특히 TV를 보지 않는 제게는 요즘 잘나가는 <1박2일>과 <웃찾사> 등의 생생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자리입니다. 밥을 다 먹고 나서는 예전 농민회에서 그랬듯이 “밥알이 누울 때 까지 앉아 있자”고 제안합니다. 총각 시절, 대전 가톨릭농민회관에서 먹고 자고 할 때 재돈 형님께 배운 습관입니다. 생명을 살리고, 밥상을 살리고, 농촌을 살리는 사람들이 소중한 밥을 모셨으니 천천히 음미한 뒤 일어서자는 나름의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추억의 도시락
앗! 이제 출근 준비할 시간입니다. 아까 쌀을 씻으며 모아 놓은 쌀뜨물로 설거지를 하고 오늘의 도시락을 쌉니다. 찬밥은 해치웠으니 아침에 새로 한 밥을 식혀 놓고, 계란 한 알 더 부칩니다. 남은 현미유에 고추장을 약간 넣고 어제 저녁 썰어놓은 양파와 함께 김치를 볶습니다. 이윽고 식은 밥 위에 계란을 올리고, 반찬통에 볶은 김치를 담으면 이것이 오늘의 도시락, 바로 ‘추억의 도시락’입니다! 저는 오늘도 도시락을 맛있게 먹을 것입니다.
맹주형/ 서울대교구 환경사목위원회와 우리농촌살리기운동본부 교육부장, ‘천주교농부학교’ 사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