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배우화가 김현정 소화 데레사

▲ ‘배우화가’로 돌아온 김현정 씨. 그는 상담을 배우고 그림을 그리고 다시 배우의 길을 모색하는 모든 과정이 하느님 안에서 참 기쁨을 찾는 여정이었다고 말했다. ⓒ정현진 기자

“두드려라, 열릴 것이다.”

배우이면서 배우가 아닌 ‘나’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찾아다니던 한 배우가 있었다. 내가 아는 나와 보이는 나 사이에서 관객들이 좋아하는 모습으로만 머무르고 싶지 않았던 그는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오랜 시간 그렇게 마음의 문을 두드렸고, 세상을 향해 문이 열렸다.

대중들에게 드라마 <광끼>의 ‘진달래’, <내 이름은 김삼순>에서 삼순이를 괴롭히던 레스토랑 홀매니저 역으로 알려진 배우 김현정 씨. 그녀가 자신만의 그림을 들고 ‘배우화가’로 돌아왔다.

김현정 씨는 성장과 치유를 갈망하면서 다시 잡은 그림, 그리고 화가의 길은 ‘진짜 나’와 ‘보이는 나’의 균형을 잡아 단단해지는 과정이었고, 무엇보다 “하느님이 주신 행복을 찾는 시간”이었다고 고백했다.

스무 살에 모델로 시작한 배우 생활은 재미있었지만, 외롭고 불안한 시간이기도 했다. 모두 힘들었지만 누구도 힘들다고 말하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서 섬과 같았다. 배우로서 연기에 대한 도전을 하기도 했고, 공부하기를 멈추지 않았지만 공허함은 채워지지 않았다. 배우로 10년을 살고 나서 문득 돌이킨 것은 그림에 대한 갈망이었다.

“어릴 적부터 그림을 잘 그렸고, 화가로 살고 싶었어요. 막상 대학 진학 때, 현실적인 이유로 부모님이 반대하셨고, 나도 그것을 받아들였죠. 2009년 쯤 우연히 가톨릭 심리상담봉사자 교육을 받으면서 상담을 받기 시작했는데, 원하지만 가보지 않았던 길이었기 때문에 갖는 두려움을 많이 놓을 수 있었어요. 내가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들여다보고, 하고 싶은 것은 바로바로 하려고 노력했어요.”

자신이 원하던 것에서 애써 시선을 돌려버렸던 시간을 돌아봤다. 두렵고 힘들어서 포기하는 마음을 극복할 수 있게 해준 것이 상담이었고, 갈망을 성숙하게 채우고 충실하게 응하는 연습을 하면서 많은 지지를 받았다.

그는 “무엇보다 힘들었던 건, 내 안의 두려움을 나만 이겨내지 못한다는 생각이었다”고 말했다. 주변을 돌아보면 다들 잘 극복하고 잘 사는 것 같은데, 그들과 비교하면서 스스로를 미워했다면서, “지금은 두려운 것이 당연하다는 것,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고, 단지 하고 싶은 것에 집중하기 위해 노력한다”고 말했다.

미술 공부는 2010년부터 중국을 오가면서 시작했다. 중국을 선택한 것은 전통미술에 대한 관심이 깊었고, 한국보다 오히려 전통문화를 접하기 쉬웠기 때문이었다. 중국의 저명한 미술감정가 진상에게 도제식으로 그림을 배우면서, 그는 자신만의 화법을 만들기도 했다. 비단에 그림을 그리고 중요한 부분에는 수를 놓는 표현 방법에 스스로 ‘화주수보’라는 이름을 붙였다.

▲ 전시 중인 그림 <랄라와 졸린 아기> 앞에서 ⓒ정현진 기자

화법 말고도 그의 그림이 주목을 받은 것은 심리학적 요소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중국 문인화는 주로 산, 강, 바위, 나무 같은 자연에 감정을 이입하는데, 그가 전통화 바탕 위에 접목시킨 것은 ‘랄라’라는 서양인형으로, ‘김현정’의 자라지 못한 내면 아이 또는 자아 인식을 표현한다.

“어릴 적 동생에게 인형을 양보하라는 말을 들었을 때, 뭐랄까 굉장히 서운하고, 내가 성숙하지 못한 아이라는 인식을 했던 것 같아요. 나도 모르게 ‘난 인형을 좋아하지 않아’라고 생각했고, 단 한 번도 나만의 인형을 가진 적이 없어요. 어느 순간은 ‘난 인형이 정말 싫어!’라고 외치고 있더라고요. 인형 알러지 같은 아주 부자연스러운 감정이죠.”

상담을 받으면서 당시의 이야기가 나왔고, “네 인형을 가져보는 게 어떻겠느냐”는 권유를 받았다.

“인형을 사러 갔는데, 너무너무 부끄럽고 다른 사람들을 의식하게 되는 거예요. 내가 인형을 샀다는 걸 가족들이 알게 되는 게 너무 두려웠어요. 애써 즐겨보자는 생각에 상점에 갔는데 그 수많은 인형 중에 토끼 인형 하나가 눈에 들어왔어요. 입양을 하면 그런 느낌일 것 같았죠. 이름도 쉽고 신나고 유치한 이름으로 지었어요. 유치한 것에 대한 거부감이 있었거든요.”

‘랄라’는 그렇게 자아와 닫힌 세계 사이의 첫 소통 관문이 됐다. 애써 외면했던 욕구, 갈망의 상징이자 버려둔 내면의 목소리를 더 잘 들을 수 있게 해준 도구였다.

랄라가 그의 그림에 등장한 것은 우연한 계기였다. 그림을 그리다가 망친 종이가 너무 아까워, 뒷면에 뭐라도 그려보자고 한 것이 바로 옆에 있던 랄라였다. 어설프지만 왠지 생동감 있는 랄라의 모습이 좋았고, 그때부터 랄라를 통해 자기만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성모 마리아 이콘 속의 랄라, 어린아이의 등에 업힌 랄라, 달 속에서 묵주기도를 하는 랄라, 사탕을 선물 받은 랄라, 어린 시절 가족 나들이에 대한 기억 한 조각 속에 들어있는 랄라……. 그림 속에서 랄라는 김현정 씨의 어린 기억을 달래기도 하고, 응원하기도 하고, 받고 싶었던 선물을 받기도 한다.

물론 5년간 그린 80여 점의 그림에 모두 랄라가 등장하는 것은 아니다. 어느 그림에는 여름의 풍경이 펼쳐지기도 하고, 기도하는 마더 데레사가 등장하기도 한다. 그는 일상에서 시적으로 느껴지는 장면을 에세이처럼 화폭에 펼쳐 놓는다. 그렇게 내면의 목소리를 담는 그림은 예술 작업이면서도 치유 과정이 됐다.

▲ <랄라독립도>. 김현정 씨의 내면 자아인 ‘랄라’가 바위 위에 서있는 모습을 그린 이 그림은 어떠한 일이 있든 겸손하고 담담하게 이겨내겠다는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고독할수록 진실에 더 귀를 기울이겠다는 의지로 ‘귀’ 부분은 자수로 표현했다. ⓒ정현진 기자

김현정 씨는 이번 전시회뿐만 아니라 또 하나의 결실을 보게 됐다. 그동안 한 신문에 연재한 그림 에세이가 <랄라의 외출>이라는 책으로 발간된다. 물론 그동안 배우의 역할도 틈틈이 시도해왔다. 불과 얼마 전까지도 구체적인 결과물이 보이지 않았던 불확실한 시간을 지냈지만, 그것을 견딜 수 있었던 힘은 신앙과 신앙을 통해 만난 공동체에서 얻었다고 말했다.

10여 년 전 ‘소화 데레사’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그는 무엇보다 신앙이 중요했다고 말했다. 이 시대를 살아 나가기 위해 필요한 영성이 무엇일지 궁금했고, 알고 믿는 대로 살고 싶다는 열망이 있었다.

“봉사활동을 열심히 하면서도 내 안에서 착한 아이 콤플렉스가 보이는 거예요. 나만의 영성을 갖고 기쁘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어요. 어느 책에서 습관이 모여서 영성이 된다고 하더라고요. 지금 당장 하느님이 나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없지만, 교회가 가르치는 것을, 할 수 있는 것을 매일 조금씩 실천하다보면 그게 영성이 되지 않을까요.”

그는 상담을 받으면서 가장 크게 얻은 것은 “하느님은 무섭고 내가 잘못했을 때 외면하는 분이 아니라, 누구보다 내가 행복하기를 바라는 분”이라는 강한 믿음이라고 말했다.

그는 “외적인 부유함이 우리의 행복이라면, 하느님이 우리에게 신용카드를 하나씩 주셨을 것”이라면서, “아이들이 젤리 하나를 먹으면서도 마냥 행복해하는 그 마음처럼 나에게 주신 것에 몰입하면서 얻는 행복을 찾는 것이 지금의 여정”이라고 말했다.

“연기를 하면서 느꼈던 행복하고 힘든 모든 순간, 그림, 상담, 예수살이공동체 활동……. 지금까지 해왔던 그 모든 여정은 결국 나만의 고유한 행복을 찾아가는 과정이었어요. 하느님이 나에게 주신 행복, 하느님 안에서 참으로 기뻐할 수 있는 것이죠.”

김현정 씨는 “좋은 것만 기쁜 것은 아니다. 힘든 일을 극복하고 성취하는 과정도 기쁨”이라며 “그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것이 바로 내면의 아이, 랄라를 찾은 일”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제 자신의 기쁨과 행복이 타인에게도 기쁨과 행복으로 전해질 수 있기를 빈다. 이제 자신의 기쁨을 나누고 싶고 가능할 것 같다면서, “사람들이 내가 하는 연기, 그림, 상담 등을 통해서 자신의 삶을 기뻐할 수 있게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현정 씨는 예전에 힘들었던 배우의 삶도 온전히 즐길 수 있을 것 같다며, 연기와 그림 모두 놓치지 않고 해나가겠다고 당차게 말했다. 12일까지 평창동 가나컨템포러리에서 열리는 전시는 오는 10월 중국 베이징 금일미술관에서 열리는 전시회의 프리뷰인 셈이어서, 앞으로 더욱 바빠질 예정이다.

그는 이제 외롭고 두려워서 하지 못했던 일들 앞에 당당히 서있다. 화폭 속 바위 위에 우뚝 서서 바람의 소리를 듣는 ‘랄라’의 모습을 빌어 이렇게 말한다.

“지금 서있는 곳이 비록 열렬한 고독의 사구일지라도, 나와 나만의 그림을 찾는 여정을 계속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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