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문화 이야기]


어느 선생이 열 명의 아이들에게 땅위에 수영장을 짓는 과제를 주었다. 단 조건은 설계도 없이 각자 자기가 원하는 자리에서 능력껏 벽돌을 쌓아 짓는 것이었다. 그렇게 오전 내내 일을 시킨 후 물을 채우게 하였다. 그랬더니 누구는 열 칸을 쌓고 누구는 다섯 칸을 쌓았으나, 어떤 아이가 한 칸밖에 쌓지 않아 또는 쌓지 못해 물이 첫 칸밖에 차지 않았다.

자식을 키워도, 학생들을 가르쳐도, 그리고 교회를 바라보아도 이 비유가 적절한 경우를 자주 보게 된다. 공동체 생활을 중시하는 수도회 같은 경우는 더욱이 그렇다. 아무리 뛰어난 자녀, 학생, 회원이 있어도, 그 가정, 그 학교 공동체 전체가 목표에 이르는 것은 항시 가장 뒤처지는 이가 결정하게 된다. 물론 한 명의 인재가 천 명을 먹여 살린다고 야단법석인 요즘에 통하기 어려운 생각이다.

어느 공동체에 뛰어난 회원이 있었다. 그 개인의 능력이 탁월하여 그 사람의 능력만으로 공동체가 충분히 먹고 살 만한 것을 얻을 수 있었다. 자연스럽게 그가 공동체에서 귀한 대접을 받게 되었고 그 또한 그런 대접을 당연하게 생각하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공동체에 분란이 끊이지 않았다. 원인을 살펴보니 이 회원이 그 공동체의 규칙을 지키지 않고 심지어 장상의 말도 듣지 않아서 문제가 발생하고 있었다. 그리고 회원들은 누구나 능력을 갖추기 위해 공동체의 덕목을 추구하기보다 각자가 드러날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이러한 분위기가 되다 보니 재정기여도가 낮은 회원들은 다른 회원들의 눈치를 보았고 아예 노동할 능력이 없는 회원들은 스스로를 천덕꾸러기로 여겼다.

내가 아는 어느 가정은 부모 모두가 명문대 출신이다. 이 집에 아이가 셋이 있는데 한 아이가 말썽이었다. 두 자녀는 부모가 시키는 대로 쫓아가 부모가 다닌 명문대에 진학하였다. 그런데 한 녀석이 이 두 자녀에 미치지 못하였다. 내가 보기엔 그 아이의 학벌도 내노라 할 수 있는 것이었는데 부모는 그리 보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시작된 잔소리, 간섭, 무시가 축적되었던지 청년이 되어서 이 아이에게 문제가 생겼다. 정신이상이 된 것이다. 결국 이 아이 때문에 부모도 가족 전체도 웃음을 잃게 되었다.

어느 학교에서 반별로 평균성적 내기를 하였다. 당연히 일등하는 반에게는 여러 가지 포상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각 반에는 한 가지 공통적인 고민이 있었다. 평균을 깍아 먹는 학생들이 몇 명씩 있었던 것이다. 일등을 하려면 이 아이들의 평균을 끌어올려야 하는데 이것이 쉽지 않았다. 결국 꼴찌가 일등을 결정하게 되었다.

요즘의 교회를 보면 이런 일들이 더욱 도드라져 다가온다. 어느 순간 교회도 뒤처지는 이들을 밀쳐내고 잘난 이들만 모아들이는 것 같아서다. 나도 한때는 이런 현상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앞서 예를 든 경우들을 자주 만나게 되다 보니 필자의 생각, 신앙 모두 짧았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다. 교회의 건강성은 항상 낮은 자의 눈높이에서 결정되기 때문이었다.

공동체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진정성은 항시 그 공동체의 가장 낮은 자가 확인해준다. 집안에서도 가장 힘든 가족을 품는 정도에 따라 화목이 결정된다. 꼴찌가 일등을 결정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마태 25,40)라고 하신 것이리라.

 

박문수/ 프란치스코,  가톨릭대학 문화영성대학원 초빙교수, 평신도 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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