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프란치스코의 권고 <복음의 기쁨> 186-216항 번역문

II. 사회 안에 가난한 사람을 포함시켜야 합니다

 
186. 가난해지셨고 항상 가난하고 버림받은 사람과 가까이 계셨던 그리스도께 대한 우리의 신앙이야말로 사회가 가장 무시하는 구성원들의 통합적 발전에 관한 우리 관심의 근거입니다.

하느님과 함께 우리는 탄원을 듣는다

187. 모든 그리스도인과 공동체는 가난한 이들의 해방과 발전을 위한, 그들을 사회의 완전한 일원이 될 수 있게 하는 하느님의 도구여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가 가난한 이들이 울부짖는 소리에 온유하고 주의 깊은 사람이 되어 그들을 돕기 위해 나서야 합니다. 성서를 그저 힐끗 살펴보아도 은총의 우리 아버지께서는 얼마나 가난한 사람이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려 하시는지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나는 이집트에 있는 내 백성이 겪는 고난을 똑똑히 보았고, 작업 감독들 때문에 울부짖는 소리를 들었다. 정녕 나는 그들이 고통을 알고 있다. 그래서 내가 그들을 이집트인들의 손에서 구하기 위해.... 너를 보낸다.”(탈출기 3,7-8, 10)

우리는 그분이 얼마나 그들의 필요에 관심을 기울이시는지 알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주님께 부르짖자, 주님께서는 그들을 위하여 구원자를 세우셨다.”(판관기 3,15)

가난한 사람의 울부짖는 소리를 듣는 하느님의 도구인 우리가 만일 그 탄원에 귀를 막는다면, 우리는 아버지의 뜻과 그분의 계획을 반대하는 것이다. 그 가난한 사람이 “너희를 걸어 주님께 호소하면 너희에게 죄가 될 것이다.”(신명기 15,9) 가난한 사람의 곤궁을 향한 연대의 결여는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칠 것이다. 그 가난한 사람이 “비참한 삶 속에서 너를 저주하면 그를 만드신 분께서 그의 호소를 들어주시리라.”(집회서 4,6)

자연스럽게 오래된 물음이 다시 등장합니다. “누구든지 세상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기 형제가 궁핍한 것을 보고 그에게 마음을 닫아 버리면, 하느님의 사랑이 어떻게 그 사람 안에 머무를 수 있겠습니까?”(1요한 3,17) 억압받는 사람이 울부짖는 소리에 관해 야고보 사도가 얼마나 무섭게 말했는지를 기억합시다. “그대들의 밭에서 곡식을 벤 일꾼들에게 주지 않고 사기로 가로챈 품삯이 소리를 지르고 있습니다. 곡식을 거두어들인 일꾼들의 아우성이 만군의 주님 귀에 들어갔습니다.”(야고보 5,4)

188. 그 탄원에 마음을 둘 필요는 그 자체로 해방하는 은총의 활동에서 나온다는 것을 교회는 알았습니다. 그 은총이 우리 각자 안에 자리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것은 소수의 사람에게만 부여된 사명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자비의 복음과 인류에 대한 사랑에 이끌리는 교회는 정의를 위한 부르짖음을 듣고 모든 역량을 다해 그 부르짖음에 응답할 뜻이 있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당신 제자들에게 명령하신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너희가 스스로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마르코 6,37) 이 말씀은 우리가 만나는 이들의 실제적 궁핍을 덜어주려는 일상의 연대 행위뿐만 아니라, 빈곤의 구조적 원인을 제거하고, 가난한 이들의 통합적 발전을 증진하기 위해 일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연대”라는 말이 약간 진부하게 때로는 불충분하게 이해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연대”는 산발적인 관대한 행동 그 이상의 중요한 무엇을 지칭합니다. “연대”는 공동체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사고방식, 즉 소수에게 돌아갈 선보다는 모든 이의 삶을 우선하는 사고방식을 만들어냅니다.

189. 연대는 재산의 사회적 기능과 재화의 보편 목적이 사유재산보다 우선하는 것들이라는 점을 깨달은 사람의 자발적 반응입니다. 재화의 사적 소유는 그것을 보호하고 증대시킬 필요로 정당화됩니다. 그것은 그 재화가 공동선에 더 잘 기여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 때문에 연대는 반드시 가난한 사람에게 속한 것을 되돌려주려는 결의로 실천해야 합니다. 연대가 갖는 이런 신념과 습관을 실현할 때, 이 신념과 습관은 다른 구조적 변형에 이르는 길의 문을 열어 그 변형을 가능하게 합니다. 새로운 신념과 태도를 낳지 않는 구조의 변화는 그 구조가 머지않아 부패하고 억압적이며 비효율적이 될 것이라는 것을 확인시켜 줄뿐입니다.

190. 때로는 전체 민족, 지구상에서 가장 가난한 민족 전체의 울부짖는 소리를 듣는 것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평화는 인권의 존중뿐만 아니라, 민족들의 권리에 대한 존중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슬프게도, 인권조차도 개인적 권리들 혹은 보다 부유한 민족의 권리들을 터무니없이 수호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데 이용될 수 있습니다. 각 민족은 고유의 문화와 자율성을 갖는 것이 당연하지만, 이 행성이 모든 인류에게 속하고 모든 인류를 위한 것임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일부 민족이 자원이 부족하거나 발전이 덜 된 곳에 태어난다는 그 사실이 그들이 낮은 존엄성을 지니고 살고 있음을 정당화하지 않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되풀이해 말해야 합니다. “남보다 잘사는 사람들은 자기 재산을 남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너그러이 양보해야 한다.” 우리 자신의 권리에 대해 적절하게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자기 나라의 탄원과 전망을 넘어 다른 민족과 지역의 탄원을 듣고 그 전망을 확장해야 합니다. 우리는 연대의 정신으로 성장해야 합니다. 연대는 “모든 민족이 각자의 운명을 스스로 해결하게 도울 수 있는데”,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자신을 완성시키도록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191. 모든 곳에서, 모든 상황에서, 그리스도인은 목자의 도움과 함께 가난한 사람의 부르짖는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브라질의 주교들은 이를 훌륭하게 밝혔습니다.

“우리는 매일 브라질 백성의 기쁨과 희망, 고생과 슬픔을 (우리의 짐으로) 짊어지고 싶습니다. 특히 땅과 집이 없고, 음식이 없고 건강관리가 이루어지지 않는 시골과 도시의 특정지역에서 그들의 권리를 희생시켜가며 살고 있는 사람들의 기쁨과 희망, 고생과 슬픔을 말입니다. 그들의 빈곤을 보고, 그들의 부르짖는 소리를 듣고, 그들의 고통을 알고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치욕을 안겨줍니다. 왜냐하면 모든 이를 위한 식량이 충분하다는 것과 굶주림은 재화와 소득의 잘못된 분배의 결과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잘못된 분배는 일반화된 낭비와 사치로 더욱 악화됩니다.”

192. 그러나 우리는 이보다 더한 것을 갈망합니다. 우리의 꿈은 더 높이 날아오릅니다. 우리는 단순히 모든 민족의 영양 상태나 “품위 유지”에 관해서뿐만 아니라, 그들의 “어느 시대든 그 어떠한 것이든 모든 복지와 번영”에 관해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교육, 건강관리, 그리고 무엇보다도 고용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자신의 삶의 품위를 드러내고 증진시키는 것은 자유롭고, 창의적이고, 참여적이며 상호 협력적인 노동을 통해서이기 때문입니다. 정당한 임금은 그들이 다른 모든 재화를 취할 수 있게 해줍니다. 그 모든 재화는 사실 우리가 공동으로 사용하도록 되어 있는 것들입니다.

우리가 헛수고를 하지 않으려면 복음에 충실해야 합니다

193. 다른 이의 고통으로 우리가 움직일 때 비로소 가난한 사람이 부르짖는 소리를 들어야 할 의무를 우리가 실현하는 것입니다. 자비에 관해 가르치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읍시다. 그리고 그 말씀이 교회의 생활 속에 울려 퍼지게 합시다. 복음은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마태오 5,7)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야고보 사도는 다른 이에 대한 우리의 자비가 하느님의 심판의 날에 우리를 변호해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장차 자유의 법에 따라 심판받을 사람으로서 말하고 행동하십시오. 자비를 베풀지 않은 자는 가차 없는 심판을 받습니다. 자비는 심판을 이깁니다.”(야고보 2,12-13)

여기서 야고보 사도는 (에집트) 탈출 후 유다인의 영성이 갖는 훌륭한 전통을 충실히 따르고 있습니다. 그 전통은 자비가 얼마나 좋은 가치인지를 강조합니다. “의로운 일을 하시어 죄를 벗으시고, 가난한 이들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불의를 벗으십시오. 그리하시면 임금님의 번영이 지속될 것입니다.”(다니엘 4,24) 지혜문학은 자선을 궁핍한 사람을 향한 자비의 구체적 실천으로 보고 있습니다. “자선은 사람을 죽음에서 구해 주고 모든 죄를 깨끗이 없애 준다.”(토빗 12,9) 집회서는 이런 사랑을 보다 입체적으로 표현합니다. “물은 타오르는 불을 끄고 자선은 죄를 없앤다.”(집회 3:30)

신약성경에도 똑같은 것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서로 한결같이 사랑하십시오. 사랑은 많은 죄를 덮어줍니다.”(1베드로 4,8) 이 진리는 교부들의 사상에 큰 영향을 주었고, 이교 신앙의 자기중심적 쾌락주의에 대한 저항 및 예언 문화를 창출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한 가지 예만 소개합니다. “우리가 만일 불길의 위험에 처했다면, 분명히 그 불을 끄기 위해 물로 달려갈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만일 죄의 불꽃이 우리의 결점에서 타오른다면, 그리고 그 때문에 곤경에 처한다면, 자비의 일을 수행할 기회를 가질 때마다, 우리는 그것을 기뻐해야 합니다. 자비는 마치 수문이 이미 열려 있어 불을 끌 수 있는 분수와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194. 이 메시지는 너무 분명하고 직접적이며, 너무 단순하고 훌륭해서, 어떤 교회의 해설도 그것을 상대화시킬 권리를 가질 수 없습니다. 이 본문들에 대한 교회의 성찰은 그 본문이 갖는 힘을 약화시키거나 애매모호하게 해서는 안 되며, 우리가 그 권고를 용감하고 열정적으로 받아들이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게 간단한 것을 왜 복잡하게 만듭니까? 개념상의 도구들은 그것이 설명하려는 실체와의 접촉을 높이기 위해서 존재합니다. 우리를 그 실체로부터 멀어지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형제적 사랑에, 겸손하고 친절한 봉사에, 정의와 가난한 이를 향한 자비로 우리를 부르는 성경의 권고들이 특별히 그런 경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이를 그런 방식으로 보라고 당신 말씀과 행동으로 가르치셨습니다. 왜 그렇게 분명한 것을 가리려합니까? 우리는 단순히 교의상의 오류에 빠지는 것에 관심을 두면 안 됩니다. 우리는 빛으로 가득한 이 생명과 지혜의 오솔길에 충실히 남아 있는 것에 관심을 두어야합니다. 왜냐하면 “때때로 정설의 수호자들이 견딜 수 없는 불의한 상황과 그것을 지속하는 정권에 대해 수동적이고 혹은 무저항적이고, 관대한, 심지어 공범이라는 비난을 받습니다.”

195. 바오로 성인이 그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나 전에 한 일이 허사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해”(갈라디아 2,2)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에게 갔을 때, 그들이 제시한 확실성의 기준은 그가 가난한 사람을 잊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갈라디아 2,10 참조) 이 중요한 원리, 즉 바오로 공동체는 이교도의 자기중심적 생활태도에 절대로 굴복해서는 안 된다는 이 원리를 강조한 것은 새로운 자기중심적 이교 신앙이 자라고 있는 오늘날에도 시의적절한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의 아름다움을 항상 적절히 성찰할 수는 없지만, 우리에게 절대로 없애서는 안 될 하나의 표징이 있습니다.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들, 사회가 내다버린 사람들에 대한 선택이 그것입니다.

196. 때때로 우리는 심장과 마음이 굳어버린 것을 봅니다. 우리는 잘 잊고, 빗나가고, 현대 사회가 제공하는 소비와 오락에 대한 무한한 가능성들에 넋을 잃습니다. 이것은 모든 차원에서 일종의 소외를 가져옵니다. 왜냐하면 “한 사회조직의, 생산의, 그리고 소비의 형태들이 자신을 선물로 봉헌하는 것과 인간들 사이의 연대를 구축하는 것을 더욱 어렵게 만들 때 그 사회는 소외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백성안에서 가난한 사람은 특별한 자리를 차지합니다

197. 하느님의 마음에는 가난한 사람을 위한 특별한 자리가 있습니다. 정말 그렇기 때문에 그분 자신이 “가난하게 되셨습니다.”(2코린토 8,9) 우리의 전체 구원역사는 가난한 사람의 현존을 특징으로 합니다. 구원은 거대한 제국의 끄트머리 작은 동네의 비천한 처녀가 “예”라고 응답함으로써 우리에게 왔습니다. 구세주는 구유에서, 동물들 가운데서, 가난한 가정의 아이들처럼 태어나셨습니다. 그분은 어린 집비둘기 두 마리와 함께 성전에 봉헌되셨습니다. 그것은 양을 바칠 수 없는 이들을 위한 봉헌제물이었습니다.(루카 2,24; 레위 5,7 참조) 그분은 평범한 노동자들의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그분은 빵을 마련하기 위해 직접 자기 손으로 일을 하셨습니다.

그분이 하느님 나라를 가르치기 시작했을 때, 재산을 빼앗긴 군중이 그분을 따랐습니다. 이는 그분의 말씀이 보여줍니다.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보내셔서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기 때문이다.”(루카 4,18) 그분께서는 슬픔으로 짓눌리고, 빈곤으로 무너져버린 사람들에게 하느님께서 당신 마음에 그들을 위한 특별한 자리를 마련하셨다는 것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루카 6,20)

그분께서는 스스로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 하나가 되셨습니다. “나는 배가 고팠다. 그런데 너희는 나에게 먹을 음식을 주었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이 모든 가난한 이들을 향한 자비가 하늘나라의 열쇠가 된다고 그들을 가르치셨습니다.(마태오 25,5 참조)

198. 교회에게 가난한 이를 위한 선택은 문화적, 사회학적, 정치적, 혹은 철학적 범주라기보다는 무엇보다도 신학적 범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가난한 이에게 “당신의 첫 자비”를 드러내십니다. 이 신적 우선성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에 영향을 줍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필리피 2,5) 가질 자격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그 마음으로 고무된 교회는 가난한 이를 위한 우선적 선택을 가르치는데, 그것은 “그리스도교적 사랑의 실천에서 우선성을 갖는 특별한 형태이며, 교회의 모든 전통이 그것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 선택은 - 베네딕토 16세가 가르친 것처럼 - “그분의 빈곤으로 우리를 부유하게 할 만큼, 우리를 위해 가난해지신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절대적입니다.” 그것이 제가 가난한 교회, 가난한 이를 위한 교회를 원하는 이유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칩니다. 그들은 신앙의 감각을 공유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고생 속에서 그리스도의 고통을 압니다. 그들이 우리를 복음화 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새 복음화는 그들의 삶에서 활동하는 구원의 힘을 인정하고, 교회의 순교 길에서 그들을 중심으로 삼으라는 초대입니다. 우리는 그들 안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해야 합니다. 그들의 주장에 우리의 목소리를 실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그들의 친구가 되어야 하며, 그들의 말을 들어야 하며, 그들을 위해 말해야 하고, 하느님께서 그들을 통해 우리에게 나눠주시려는 신비스러운 지혜를 끌어안아야 합니다.

199. 우리의 헌신은 증진과 보조를 위한 활동이나 프로그램에만 배타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움직이게 하시는 것은 제멋대로의 행동주의가 아니라, 무엇보다도 다른 이를 “어떤 점에서는 우리 자신으로” 생각하는 정중함입니다. 사랑에서 비롯된 이 정중함은 다른 이에 대한 참된 관심의 시작입니다. 이 관심은 나를 고무시켜 다른 사람의 선을 효과적으로 추구하도록 합니다. 이는 가난한 사람들의 선량함, 그들의 생활 체험, 그들의 문화, 신앙을 살아가는 그들의 방법이 지닌 진가를 인정하게 합니다.

참사랑은 항상 관조적이며, 필요나 허영, 단순한 외모를 넘어서는 아름다움 때문에 그에게 봉사하게 합니다. “사랑은 다른 사람이 즐거워하는 것을 발견하게 하는데, 그 사랑은 그에게 무엇인가를 거저 줍니다.” 가난한 사람은, 사랑을 받을 때, “위대한 가치를 지닌 사람으로 존중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점이 가난한 이를 위한 진정한 우선적 선택이 다른 모든 이데올로기와 다르고, 자신의 개인적 혹은 정치적 이익을 위해 가난한 사람을 착취하려는 모든 시도와 다른 점입니다. 실질적이며 진실한 이 친밀감에 기초해야만 가난한 이들이 걷는 해방의 길에서 우리는 그들과 합당하게 동행할 수 있습니다. 그것만이 “모든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는 가난한 사람이 마음 편하다는 것을 보증할 것입니다. 그런 접근이야말로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실을 가장 위대하고 효과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가난한 이에 대한 우선적 선택이 없다면, “그 자체로 사랑의 탁월한 형태인 복음 선포는 잘못 이해되거나 말의 바다 속에 가라앉을 위험이 있습니다. 현대의 대중매체 사회에서 그 말의 바다는 매일 우리를 집어삼키고 있습니다.”

200. 이 권고는 가톨릭교회 신자들을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매우 유감스럽게도 가난한 사람이 겪는 최악의 차별은 영적 배려의 결여라는 것을 말하고 싶습니다. 가난한 사람 대부분은 신앙에 대해 특별한 개방성을 갖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느님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반드시 그들에게 하느님의 우정, 하느님의 축복, 하느님의 말씀, 성사의 기념을 제공해야 합니다. 그리고 반드시 그들이 걷는 신앙의 성장과 성숙을 도모해야 합니다. 가난한 이를 위한 우리의 우선적 선택은 주로 탁월하고 우선적인 종교적 배려로 표현되어야만 합니다.

201. 누구든지 자신만의 생활태도가 다른 분야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하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에게 가까이 갈 수 없다고 말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이 같은 핑계는 학계, 사업 분야나 직업 분야, 그리고 교회의 여러 분야에서도 들리는 공통된 현상입니다. 비록 평신도의 핵심적인 소명과 사명이 세상 현실과 인간 활동을 복음으로 변형시키기 위해 분투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우리 가운데 누구도 가난한 이와 사회정의에 대한 관심에서 예외가 된다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영적 전환, 하느님과 이웃 사랑에의 집중, 정의와 평화를 향한 열정, 가난한 이들과 빈곤에 대한 복음의 가르침은 모든 사람에게 요구됩니다.” 저는 이런 말들이 아무런 실질적 실천 효과는 없이 해석과 토론만 불러일으킬까봐 두렵습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갖는 개방성과 준비성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하나의 공동체로서 이 쇄신된 소명을 수용할 수 있는 창의적 방법들을 모색해 줄 것을 요청합니다.

경제와 소득의 분배

202. 빈곤의 구조적 원인을 해결하는 일은 미룰 수 없습니다. 이는 좋은 사회 질서를 위해서 빈곤의 구조적 원인을 시급히 해결해야 한다는 실용적인 이유 때문만은 아닙니다. 사회를 약화시키고 무너뜨리는 사회적 질병을 치유해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회적 질병은 사회를 새로운 위기로 내몰 수밖에 없습니다. 시급한 문제에 대응하려는 사회복지 사업은 단순히 임시방편에 불과합니다. 시장과 금융투기의 절대 자율을 배척하고, 불평등의 구조적 원인을 없애지 않으면 가난한 사람의 문제들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 한 세상의 빈곤 문제를 풀 답을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혹은 시장과 금융투기의 절대 자율과 관련해 생긴 그 어떤 문제들도 해결할 수 없을 것입니다. 불평등은 사회적 병고의 뿌리입니다.

203. 모든 경제 정책이 반드시 실현해야 할 관심사는 각 개인의 존엄과 공동선 추구입니다. 그러나 때때로 이 인간 존엄과 공동선추구는 참되고 통합적인 발전을 위한 전망이나 계획을 갖고 있지 않은 어떤 정치적 담론을 채우기 위해 밖으로부터 유입한 단순한 부가물 쯤으로 간주됩니다. 이런 시스템이 넌덜머리가 난다고 증명하는 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윤리의 문제를 제기할 때, 재화의 분배를 언급할 때, 노동의 보호와 약자의 존엄함 수호를 이야기할 때, 정의에의 헌신을 요구하시는 하느님에 대해 간접적으로 이야기할 때, 넌덜머리가 납니다. 때때로 이런 문제들은 말잔치의 주제가 됩니다. 이 말잔치는 이 문제들을 하찮은 것으로 만듭니다. 사업은 소명, 그것도 거룩한 소명입니다. 단 사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스스로 인생에서 더 큰 의미를 추구한다는 조건에서 그렇습니다. 이 인생의 더 큰 의미 때문에 그들은 이 세상의 재화를 증대시킴으로써, 그리고 그 모든 사람이 그 재화에 더 많이 접근할 수 있게 함으로써 공동선에 진정으로 기여할 수 있습니다.

204. 우리는 더 이상 시장에 있는 보이지 않는 권력, 보이지 않는 손을 신뢰할 수 없습니다. 정의의 성장은 경제의 성장을 전제하면서도 그 이상의 것을 요구합니다. 정의의 성장은 특별히 더 나은 소득분배, 고용자원의 창출, 단순한 시혜정신을 넘어서는 가난한 이의 통합적 발전을 위한 결정, 계획수립, 작동, 그리고 과정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무책임한 인기영합주의를 제안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경제가 노동력을 감소시키면서 이익을 증대시키려는 시도와 그럼으로써 배제된 이들의 계급을 확대시키는 것 같은 새로운 독에 대한 처방들을 경제가 더 이상 내놓을 수 없다는 사실을 밝히려는 것입니다.

205. 저는 이 세상에 퍼진 죄악의 깊은 뿌리 - 단순히 겉으로 드러난 죄악이 아니라 - 를 치유하기 위해 진지하고 효과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더 많은 정치인들을 우리에게 달라고 하느님께 청하고 있습니다! 정치는, 비록 자주 훼손되지만, 공동선을 추구하는 한 고상한 소명이며 사랑의 높은 차원 가운데 하나입니다. 우리는 사랑이 “친구나 가족, 소집단에서 맺는 미시적 관계뿐만 아니라 사회, 경제, 정치 집단 안에서 맺는 거시적 관계의 원리”라는 것을 확신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사회 조건, 백성, 그리고 가난한 사람의 삶 때문에 괴로워하는 정치인이 더 많이 등장하기를 주님께 간절히 구합니다! 정부 지도자들과 금융 지도자들이 이 점을 유념하고 그들의 전망을 넓혀, 모든 시민이 품위 있는 노동, 교육과 건강한 삶을 꾸려갈 수 있도록 일하는 것이 지극히 중요합니다. 왜 하느님께 돌아가 그들의 그런 계획들을 불러 일으켜 달라고 청하지 않습니까? 초월성에 문을 열면, 새로운 정치 경제적 사고를 가져올 수 있다고 굳게 확신합니다. 그 새로운 사고는 경제와 사회의 공동선 사이를 갈라놓은 장벽을 허무는 데 도움이 됩니다.

206. 경제는 그 용어가 드러내는 것처럼 우리의 공동 가정을 적절하게 관리하는 예술이어야 합니다. 이 세계 전체가 우리의 공동 가정입니다. 이 세계 곳곳에서 내린 각각의 중요한 경제적 결정은 다른 모든 곳에 영향을 줍니다. 따라서 어떤 정부도 공동의 책임을 고려하지 않고 단독으로 행동할 수 없습니다. 실제로 수많은 세계적 문제들에 대한 지역 차원의 해결책을 찾는다는 것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수많은 세계적 문제들이 그 해결의 어려움을 갖고 지역 정치를 압도하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건강한 세계 경제를 원한다면, 역사의 이 전환점에서 필요한 것은 몇몇 나라가 아니라 각 국가의 주권을 존중하면서 모든 나라의 경제적 웰빙을 실현하는 상호작용의 보다 유효한 방법입니다.

207. 만일 어떤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가난한 사람들이 존엄성을 갖고 살도록 돕는데,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 다가가는 데 효과적인 협력과 창의적인 관심을 갖지 않고 편안하게 자기들만의 길을 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 공동체는 아무리 사회문제에 관해서 많은 말을 하고, 정부를 비판하더라도, 무너질 위험이 있습니다. 그런 공동체는 종교적 활동, 비생산적인 회의와 공허한 이야기 등으로 위장한 일종의 정신적 세속성의 바다로 떠내려 갈 것입니다.

208. 혹시 저의 이 말에 불쾌한 사람이 있다면, 저는 그 어떤 개인적 관심이나 정치적 이데올로기와는 전혀 무관하게 애정과 최선의 의도를 갖고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을 밝히고 싶습니다. 저의 말은 적이나 공격자가 하는 그런 말이 아닙니다. 저는 오직 개인주의적이고, 무관심하며, 자기중심적 사고에 빠져있는 사람들을 도와서, 그런 무가치한 사슬에서 자유로워져 보다 인간적이고, 고귀하며 결실이 풍부한 삶을 생각하고 살도록, 이 지상에 있는 그들의 현존에 존엄함을 가져오도록 돕는 일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상처입기 쉬운 이들을 위한 배려

209. 가장 탁월한 복음전파자이며 복음자체이신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가장 작은이들과 동일시했습니다.(마태오 25,40 참조) 이 말씀은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세상에서 가장 약한 사람을 돌보아야 한다는 것을 환기시킵니다. 그러나 성공과 자립을 강조하는 지금의 모델은 느린 사람, 약한 사람, 혹은 생활에서 기회를 찾는 데 재능이 부족한 사람을 도우려는 노력에 투자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210. 새로운 형태의 빈곤과 취약성에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그 속에서 고통 받는 그리스도를 보아야 합니다. 그것이 비록 우리에게 아무런 즉각적이고 확실한 이득을 가져다주지 않을지라도 말입니다. 저는 노숙자, 의존증자, 난민, 원주민, 점점 고립되고 버려지고 있는 노인, 그리고 다른 많은 이를 생각합니다. 저는 특별히 이민자를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저는 어떤 국경도 없는 교회의 목자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자신을 모든 이의 어머니라고 생각합니다. 그 때문에 저는 모든 국가에게 관대한 개방을 권고합니다. 이 개방은 해당 지역의 정체성 상실에 대한 두려움을 가져오기보다는 새로운 형태의 문화 통합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삐거덕거리는 불신을 극복하고, 서로 사른 사람을 통합해서, 그 통합 자체를 발전의 새 요소로 만드는 그런 도시들은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건축학적 디자인에서도 다른 공간의 가치를 우호적으로 인정하고, 그것들을 연결하고, 결합한 공간들로 가득 찬 그런 도시들이 얼마나 매력적입니까!

211. 저는 다양한 종류의 많은 인신매매 희생자들의 운명을 생각하면 언제나 비탄에 빠집니다. 저는 우리 모두가 “네 아우는 어디 있느냐?”(창세기 4,9)는 하느님의 절규를 들었으면 좋겠다고 얼마나 간절히 바라는지 모릅니다. 노예 생활하는 여러분의 형제자매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여러분이 매일 은밀한 수용시설에서, 매매춘 굴에서, 구걸시키기 위해 이용하는 어린이들 안에서, 서류를 갖추지 않은 노동자들의 착취 속에서, 그렇게 죽이고 있는 형제자매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눈길을 다른 곳으로 돌리지 맙시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큰 공모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 문제는 모든 이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 악랄한 범죄망은 우리 도시에 튼튼하게 자리 잡았으며, 많은 사람이 편하고 조용하게 공모한 결과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고 있습니다.

212. 배제, 혹사, 폭력의 상황을 견디고 있는 여성들은 이중의 고통을 겪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경우 자신의 권리를 지킬 수 없을 때가 빈번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들 가운데에서 자신의 힘없는 가족들을 보호하고 지키려는 수많은 영웅적 행위를 매일 끊임없이 목격하고 있습니다.

213. 교회가 특별한 사랑과 배려로 돌보고 싶은 약한 사람들 가운데에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우리 가운데 가장 약하고 순진합니다. 오늘날 이 아이들의 인간 존엄성을 부정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들의 생명을 빼앗고, 그것을 거부하는 이는 누구나 처벌하려는 법을 통과시키는 등 그들과 관련된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종종 그들의 생명을 수호하려는 교회의 노력을 조롱하는 한 방법으로 교회의 입장을 이데올로기적인 것으로, 반계몽주의적인 것으로, 보수적인 것으로 보이게 하려는 시도들도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태어나지 않은 생명의 수호는 각 개인과 모든 사람의 다른 인권과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은 어떤 상황에서든, 어떤 발달 단계에 있든, 항상 신성하며 침해할 수 없는 존재라는 자각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스스로 목적이며, 절대로 다른 문제들을 푸는 수단이 아닙니다. 일단 이 자각이 사라지면, 인권 수호의 견고하고 항구한 기초도 사라집니다. 그리되면 인권은 언제나 지금 있는 눈앞의 권력에 복종하게 될 것입니다. 각 개인의 생명이 갖는 침해할 수 없는 가치를 인정하는 데에는 이성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만일 그 주제를 신앙의 관점에서도 본다면 “인간의 인격적 존엄에 대한 모든 침해는 하느님께 복수를 울부짖는 것이며, 각 개인의 창조주에 대항하는 공격입니다.”

214. 이 문제가 인간의 가치에 관한 우리의 메시지와 내적으로 일관성을 갖고 있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교회는 이 문제에 대해 입장을 바꿀 수 없습니다. 저는 이 점에 관해서 철저하게 정직하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절대로 개혁으로 혹은 “현대화”로 간주되는 그 어떤 것의 주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 생명을 제거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는 “진보적”인 것이 아닙니다. 반면에 우리가 매우 어려운 처지에 놓인 여성들과 적합하게 동반하는데 그다지 한 일이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매우 어려운 처지에서는, 특히 여성들의 뱃속에서 자라고 있는 생명이 강간이나 극단적 빈곤 상황의 결과일 때, 낙태는 여성들이 갖고 있는 심각한 고통을 해결하는 빠른 방법처럼 보입니다. 누가 그 같은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꿈쩍도 않고 남아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215. 또 다른 약하고 무력한 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빈번하게 경제적 이익이나 무차별적 착취 앞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저는 피조세계 전체를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수혜자일 뿐만 아니라 다른 피조물의 청지기이기도 합니다. 우리 몸 덕분에, 하느님께서는 우리 주변의 세상과 우리를 가깝게 결합시키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치 신체적 만성질환을 느끼듯이 땅의 사막화를, 그리고 고통스러운 신체 손상을 느끼듯이 종의 멸종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의 생활과 미래 세대에 영향을 미칠 죽음과 파괴의 자취를 우리가 지나간 자국에 남겨놓지 맙시다.

저는 이 자리에서 몇 해 전 필리핀의 주교들이 행한 감동적이며 예언적인 비탄의 목소리를 저의 것으로 삼고자 합니다.

“믿을 수 없이 다양한 곤충이 삼림에 살며 그들의 과업을 수행하느라 바빴습니다. 새들은 숲의 창공을 날아다녔습니다. 새들의 밝은 깃털과 다양한 노랫소리는 푸른 숲에 색깔과 노래를 실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특별한 피조물인 우리를 위해 이 땅을 주셨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그것을 파괴해도 되거나 불모의 땅으로 만들어도 괜찮다고 그렇게 주신 것이 아닙니다.... 단 하루 밤만 비가와도 여러분 지역에는 초코렛 갈색 강물이 흐르고 있는 것을 보십시오. 그 강물은 땅의 생명의 피를 바다로 흘려보내고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파시그강 같은 하수구에서 어떻게 물고기가 헤엄을 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오염시킨 그런 강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누가 경이로운 바다를 색깔과 생명을 빼앗은 물속의 무덤으로 만들었습니까?”

216. 하느님의 사랑 속에서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처럼 우리 모두는 작지만 강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모든 사람이 살고 있는 이 약한 세상을 보살피고 보호해야할 사명을 갖습니다.


번역: 박동호 신부
서울대교구 신정동 성당, 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