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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과 영성
‘순덕이’ 놓고 세상을 위한 무당으로.. “저기 버려져 있는 영혼들을 천도하라”[이웃종교의 향기 신년기획 2] 정순덕 무녀
한수진 기자  |  sj1110@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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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4.02.10  10:0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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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성북구 주택가의 한 아파트. 이름난 무녀가 여러 신령님들을 모시고 사는 집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평범하고 조용한 곳이었다. 길에서 보던 오방색 깃발이나 간판 같은 표시는 없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선 거실 풍경도 마찬가지였다. 소파와 텔레비전, 벽에 걸린 결혼 사진, 졸고 있는 강아지까지, 친근함이 묻어나는 흔한 가정집이었다. 거실 한편 탁자 위에 놓인 불을 밝힌 초와 쌀 단지가 이 집에 살고 있는 가족의 종교를 짐작하게 할 뿐이었다.

“내림굿을 하던 날 저녁에 엄마가 그런 말씀을 해주셨어요. ‘너는 앞으로 간판 걸고 점 볼 생각 말아라. 네가 정말 무녀라면, 멀리서도 사람들이 찾아올 수 있을 정도로 영험한 무녀가 되어라.’ 그래서 지금까지 한 번도 간판을 달거나 광고를 내지 않았어요.”

정순덕 무녀는 8살에 무당이 돼 올해로 40년째 무녀의 길을 가고 있다. 김금화 만신(큰 무당에게 붙이는 호칭)의 제자이며, 1980년대에는 전국을 돌며 민주화 열사들의 진혼굿을 했던 특별한 경력을 갖고 있다. 개신교, 불교와 공동으로 위령제를 열고, 천주교 주교회의 교회일치와 종교간대화 위원회와 종교대화씨튼연구원에 초청돼 강연하는 등 타종교와도 거리를 두지 않고 교류해왔다.

   
▲ 40년째 무녀의 길을 가고 있는 정순덕 무녀. 자택에 마련된 그의 신당에는 8살 때 땅에서 파낸 탱화를 비롯해 그가 모시는 신령님들의 그림이 걸려 있다. ⓒ한수진 기자

무당은 무당이 되는 과정의 차이에 따라 ‘강신무’와 ‘세습무’로 나뉘는데, 강신무는 직접적인 신령체험인 신병(神病)을 통해, 세습무는 무당 집안의 가계 세습에 따라 무당이 된다. 둘 사이의 경계는 모호하기도 하지만, 예로부터 한강 이북 지역에는 강신무가, 이남 지역에서는 세습무가 강했다. 정 무녀는 3년간 신병을 앓고 내림굿을 받아 무당이 된 강신무다.

정 무녀가 병을 앓기 시작한 것은 다섯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한 달쯤 후의 일이었다. 처음엔 홍역을 앓았는데, 날이 갈수록 더 허약해질 뿐 여러 병원을 다녀도 병명을 알 수 없었다. 학교를 가지 못하고 방에 누워있던 어느 날, 그는 잠을 자지 않아도 꿈을 꾸기 시작했다.

“옥녀봉에서 우리 집 방문 앞까지 쌍무지개가 꽂히면, 저만한 아이가 노랑 저고리 빨강 치마에 빨강 댕기를 매고 꽃을 가져와요. 그 옆에 제비가 앉고 참새가 앉으면, 저는 그 아이와 춤을 추고 놀았어요. 그 다음번에는 검은 갓에 하얀 도포를 두른 할아버지가 백마를 타고 와서 ‘순덕아, 순덕아’ 하고 부르더니, 긴 칼과 부채, 방울을 주면서 ‘이걸로 너랑 나랑 밥 벌어먹자’고 하세요. 제가 ‘네’ 대답을 하고 주시는 걸 받았더니 손이 막 떨리기 시작하는 거예요. 접신이 된 거죠. 그 일이 있고나서 사람들을 보면, ‘저 사람은 어떻겠구나’ 하고 점이 쳐졌어요.”

없는 살림에 혼자 집을 보는 아이가 가여워 밥을 나눠주러 찾아온 이웃집 할머니는 손을 떨고 있는 아이에게서 꿈 이야기를 듣고는 신이 왔음을 직감했다. 하지만 정 무녀의 어머니는 그 말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찾아간 점집에서도 ‘옥황상제님이 안고 계시다’는 말을 들었지만 믿지 않았다.

“어느 날 똑같은 꿈을 반복해 꾸다가, 제가 ‘산에 가야 한다, 안 가면 죽는다’고 말했어요. 엄마는 장난인줄 알고 ‘그러면 죽어라’고 답하고는 빨래를 하러 다녀왔더니 제가 싸늘하게 누워서 죽어있었대요. 사람들이 가마니랑 지게를 가지러 가고, 엄마가 저를 보고 울다가 마음이 너무 아파서 ‘미안하다’고 하니까 갑자기 제가 벌떡 일어나서 ‘엄마, 칼 찾으러 가자’ 그러더래요. 곧바로 친척 아저씨가 지게에 저를 지고 엄마랑 산에 올랐는데, 제가 가리킨 곳을 팠더니 땅 속에서 탱화 열다섯 점이 나온 거예요. 진짜 점쟁이가 된 거죠.”

황해도 실향민이었던 정 무녀의 어머니는 그때부터 아이의 신(神)어머니가 될 무당을 찾기 위해 동향 출신의 무당들에게 점을 보러 다녔다. 정 무녀는 여덟 살이 되던 해 단옷날 황해도 큰 무당 조철물의 신딸로 당시 충청도 일대를 누비던 무녀에게 내림굿을 받았다.

내림굿을 받은 다음날부터 정 무녀는 어머니를 따라 백일기도를 시작했다. 집에 옹기 항아리가 없어서 플라스틱 용기에 물을 받아 소반에 올려놓고 어머니와 나란히 두 손을 모으고 기도를 했다. 정 무녀는 “아직 어리니까 밤공기가 추워서 달달 떨면 엄마는 나뭇가지를 잘라서 입에 물리곤 했다”고 기억을 떠올렸다.

“내림굿은 입문일 뿐, 신령님 만나려면 끊임없이 기도해야”

기도는 정 무녀의 두 번째 신어머니인 김금화 만신의 가르침이기도 하다. 정 무녀는 14살에 김금화 만신의 신딸이 돼 무당 수업을 받으면서, 신어머니가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정성스레 옥수(정안수)를 준비하고 기도하는 모습을 가까이 지켜봤다.

그를 낳아준 어머니와 무당으로 키워준 신어머니에게 보고 배운 대로 정 무녀는 기도에 정성과 진심을 담는다. 새벽에 일어나 목욕을 하고, 신당(신령님들을 모시는 방)에 옥수를 바치고 촛불을 켜서 신령님들을 청배한다. 이어 신도들의 바람을 청하며 기도를 하는데, 저녁에도 같은 순서로 기도를 빼놓지 않는다. 또한 지금까지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매년 백일기도를 바치고 있다.

“신령님들을 만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기도해야 해요. 내림굿을 했다고 무녀가 되는 게 아니에요. ‘입문’한 것뿐이죠. 3년이 지나야 산신님과 칠성님이 눈에 보이기 시작하고, 10년이 돼야 신관이 형성돼 신령님들의 균형이 잡힙니다. 처음 신내림을 할 때 보이는 신령님이 다가 아니에요. 어마어마하게 높은 분들이 하늘에 계신데, 기도를 할수록 하늘의 문이 조금씩 열리기 시작합니다.

… 그렇게 차곡차곡 오르면, 영적으로 깊어지고 신령님의 위력을 더 크게 발휘할 수 있어요. 춤을 잘 추거나 축원을 잘 해서가 아니라, 기도를 통해 깊어진 무녀의 힘으로 굿을 하면 한 번의 굿으로도 사람들을 치유하고 집안의 잡귀를 다 사라지게 할 수 있겠죠. 그게 큰 무당이에요.”

정 무녀는 천지신명, 일월성신, 옥황상제, 환웅천황, 단군, 치우천황, 산신 등 여러 신령님들을 모시고 있는데, 단군을 모실 때에는 21살 때부터 10년 동안 겨울마다 강화도 마니산에서 기도를 드린 후에야 모셔도 좋다는 하늘의 허락을 받았다고 한다.

   
▲ 인왕산에서 이른 아침 기도를 드리는 정순덕 무녀 (사진 제공 / 김동규)

“무당이 뭐길래 엄마에게 마지막 인사도 못할까”
가슴 맺히는 시간 견디며 뼛속까지 무당이 됐다

그런데 무녀에게는 신령님만큼 귀하고 무서운 존재가 또 있다. 바로 신도들이다. 천주교 신자가 성당에 나가고 불교 신자가 절을 찾는 것처럼, 무교 신자들도 정기적으로 혹은 큰 결정을 앞두고 있거나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무당의 집을 찾는다. 정 무녀는 “종교인의 말 한마디에 그를 믿고 의지하는 신도가 살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다. 신도들의 눈이 무섭다는 걸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 집에 오시는 신도 분들은 정말로 간절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기도를 드리세요. 그분들이 정안수 한 그릇을 앞에 두고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 겁이 나죠. 일반 신도들의 기도가 어느 종교인보다 세다는 걸, 종교인들은 뼈저리게 느끼고 두려워해야 해요. 엄마가 돌아가셨을 때, 제가 엄마의 발인을 볼 수 없었던 건 그런 신도들에 대한 책임감 때문이었어요.”

지난 1월 3일에 세상을 떠난 어머니 이야기가 나오자 정 무녀는 울먹이며 쉽게 말을 잇지 못했다. 무녀들에게는 반드시 지켜야 하는 규율들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시신을 보면 안 된다’는 거다. 이를 어기면 무녀가 가지고 있던 영험함이 없어져 더 이상 무당 일을 할 수 없게 된다. 때문에 정 무녀는 어머니가 갑자기 쓰러져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장례식장에 갔지만, 어머니와 작별을 나누는 시간을 함께할 수 없었다.

“가족들은 모두 마지막으로 엄마 얼굴을 보러 가는데 저는 갈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런데 엄마를 염하는 동안 온몸으로 엄마가 느껴졌어요. 손발이 저리고 몸이 덜덜 떨리더라고요. 나는 누구인가. 엄마의 딸인가, 무당인가. 이게 뭐길래, 이걸 깨지 않으려고 엄마에게 마지막 인사도 드리지 못하고 이렇게 애를 써야 하는가. 무당이 된 것이 40년 만에 처음으로 후회스러웠어요.”

정 무녀는 가슴이 맺히는 시간을 견디면서 자신이 “뼛속까지 무당이 됐다”는걸 깨달았다. 무녀가 된 뒤로 40년간 그의 손발이 되어주었던 어머니는 그에게 부모님이자 스승이고 벗이었으며, 같이 기도하던 도반이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자신을 믿고 기도를 드려온 신도들의 마음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특히 1월은 많은 신도들이 자녀의 입학과 취업 등 중요한 일을 앞두고 있는 시기였다.

“남편을 붙잡고 울면서 제가 누구인지를 물었어요. 남편의 답은 ‘딸도 아니고, 사람도 아니고, 무당’이라는 거였어요. 엄마가 늘 그러셨거든요. ‘너는 사람으로 바라보면 힘들지만, 무당으로 보면 모든 게 이해가 될 거다’라고요. 엄마가 묻힌 산을 내려오면서 이제 여기서 ‘순덕이’를 내려놔야 한다는 걸 알았어요.”

이한열, 박종철 등 민주화 열사부터 4.3 희생자까지
불쌍한 영혼들을 천도하기 위한 진혼굿

그가 무녀로서 갖는 책임감은 자신을 찾아오는 신도들의 반경을 뛰어 넘는다. 그는 1987년 이한열 열사 진혼굿과 1988년 박종철 열사 1주기 진혼굿을 맡는 등 1980년대에 수년간 전국을 다니며 민주화운동 열사들의 진혼굿을 열었다.

   
▲ 굿을 하는 정순덕 무녀 (사진 제공 / 김동규)

“열여덟 살 때, 대학에서 탈반 활동을 하던 지인이 부탁해 어느 할머니의 진혼굿을 맡게 됐어요. 명동에서 열린 굿이었는데, 사회운동인지도 모르고 갔죠. 그날 굿을 하고 나서 앞으로 이런 불쌍한 사람이 있으면 연락을 달라고 했어요. 그때부터 시위에 참석하고, 책을 읽으면서 사회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게 됐죠.”

하지만 무녀로서의 사회운동 참여는 단골들을 돌보라는 신령님의 경고로 그만둬야 했다. 당시에 그는 한동안 벙어리가 돼 말을 하지 못했고, 몸무게가 16㎏이나 빠졌다고 한다.

그랬던 그가 1996년 경기도 고양시 금정굴 양민학살 터에서 희생자 500명의 진혼굿을 열게 된 건 “저기 버려져 있는 영혼들을 천도하라”는 신령님의 뜻에 따른 일이었다. 처음엔 무슨 뜻인지 몰랐지만, 선몽을 꾸고 며칠 뒤 텔레비전에서 금정굴 양민학살의 유해를 발굴하고 있다는 내용을 보게 됐다. 그는 곧바로 사회운동을 하는 지인들에게 진혼굿 준비를 부탁하고 유족들을 만났다.

진혼굿을 할 때에는 이승과 저승을 잇는 다리를 상징하는 기다란 무명이나 베를 반으로 가르는데, 정 무녀는 금정굴 진혼굿에서 500명분의 베 500필을 혼자서 갈랐다. 이제 이만큼 많은 영혼을 천도할 수 있는 큰 무당이 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얻었지만, 두 달이나 밤마다 공포에 시달리는 후유증을 겪었다. 베를 가를 때 들어왔던 영혼 중 일부가 완전히 떠나지 못했던 거다.

2년 후에는 또 다른 선몽을 꾸고 제주도 4.3 희생자들의 진혼굿을 열었다. 금정굴 진혼굿에 비해 희생자의 규모가 훨씬 더 컸기 때문에 정 무녀는 1년 동안 철저히 기도를 하고, 강화도 마니산 참성단에서 천제를 드렸다.

“마지막에 천지신명님이 이 굿을 왜 하냐고 물으셨어요. ‘이름을 알리기 위해서냐? 명예를 위해서냐?’ 수천 번을 물어보세요. 제가 아니라고, 불쌍한 영혼들을 천도하기 위해서라고 똑같은 답을 반복하니까, 진심으로 이 굿을 한다면 세 가지 소원을 들어주고 그렇지 않으면 상상할 수 없는 벌을 받게 될 거라고 하셨어요. 그러고 나서 굿 준비가 일사천리로 진행됐어요. 굿에 필요한 돈 3천만 원도 마련해 주셨고요. 세 가지 소원은 엄마가 장수하시는 것, 착하고 훌륭한 남편 만나는 것, 신령님들 모시고 행복하게 살 집을 얻는 거였는데, 나중에 다 들어주셨어요.”

수만 명의 진혼굿을 마치고 나서 그는 꿈을 꾸었다. 사람들을 가득 태운 커다란 여객선이 그에게 다가오다가, 그 중 7명이 내려와 합장을 하며 “고맙수다”라고 인사했다.

“신 앞에서는 꾸밀 필요가 없어요. 내가 가졌다고 생각하는 걸 내려놔야만 신의 지혜와 현명함, 영민함이 나올 수 있어요. 무녀는 많이 배운 것이 오히려 마이너스예요. 의심을 하기 때문이죠. 신 앞을 벗어났을 때에는 지식이 필요하겠지만, 신 앞에 있는 한 그걸 버리고 내려놓을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해요.”

인터뷰를 마치면서 정 무녀는 “어두운 사회를 밝히는 가로등 같은 무녀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하늘과 땅 사이, 신과 인간 사이에서 그는 한 많고 시름 깊은 이들을 위로하는 빛이 되고 있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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