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의진의 시편 읽기 - 22장]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살려달라 울부짖는 소리 들리지도 않사옵니까?
나의 하느님, 온종일 불러 봐도 대답 하나 없으시고, 밤새도록 외쳐도 모르는 체하십니까?
그러나 당신은 옥좌에 앉으신 거룩하신 분, 이스라엘이 찬양하는 분,
우리 선조들은 당신을 믿었고 믿었기에 그들은 구하심을 받았습니다.
당신께 부르짖어 죽음을 면하고 당신을 믿고서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사람도 아닌 구더기, 세상에서 천더기, 사람들의 조롱거리,
사람마다 나를 보고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며 빈정댑니다.
“야훼를 믿었으니 구해 주겠지. 마음에 들었으니, 건져주시겠지.”
당신은 나를 모태에서 나게 하시고, 어머니 젖가슴에 안겨주신 분,
날 때부터 이 몸은 당신께 맡겨진 몸, 당신은 모태에서부터 나의 하느님이시오니
멀리하지 마옵소서. 어려움이 닥쳤는데 도와줄 자 없사옵니다.
황소들이 떼 지어 에워쌌습니다. 바산의 들소들이 에워쌌습니다.
으르렁대며 찢어발기는 사자들처럼 입을 벌리고 달려듭니다.
물이 잦아들듯 맥이 빠지고 뼈마디마디 어그러지고, 가슴 속 염통도 촛농처럼 녹았습니다.
깨진 옹기 조각처럼 목이 타오르고 혀는 입천장에 달라붙었습니다. 죽음의 먼지 속에 던져진 이 몸은 개들이 떼 지어 나를 에워싸고 악당들이 무리지어 돌아갑니다. 손과 발이 마구 찔려 뼈마디마디 드러나 셀 수 있는데 원수들은 이 몸을 노려보고 내려다보며
겉옷은 저희끼리 나눠가지고 속옷을 놓고서는 제비를 뽑습니다.
야훼여, 모르는 체 마소서. 나의 힘이여, 빨리 도와주소서.
칼에 맞아 죽지 않게 이 목숨 건져주시고 하나밖에 없는 목숨, 개 입에서 빼내 주소서.
가련한 이 몸을 사자 입에서 살려주시고, 들소 뿔에 받히지 않게 보호하소서.
당신의 이름을 겨레에게 알리고 예배 모임 한가운데에서 당신을 찬양하리니,
“야훼를 경외하는 사람들아, 찬미하여라. 야곱의 후손들아, 주께 영광 돌려라. 이스라엘의 후손들아, 모두 다 조아려라.
내가 괴로워 울부짖을 때 ‘귀찮다, 성가시다’ 외면하지 않으시고 탄원하는 소리 들어주셨다.”
큰 회중 가운데서 내가 주를 찬송함도 주께서 주심이니, 주를 경외하는 무리 앞에서 나의 서원 지키리라.
가난한 사람 배불리 먹고 야훼를 찾는 사람은 그를 찬송하리니 그들 마음 길이 번영하리라.
온 세상이 야훼를 생각하여 돌아오고 만백성 모든 가문이 그 앞에 경배하리니,
만방을 다스리시는 이 왕권이 야훼께 있으리라.
땅 속의 기름진 자들도 그 앞에 엎드리고 먼지 속에 내려간 자들도 그 앞에 머리를 조아리리라. 이 몸은 주님 덕분에 살고,
오고 오는 후손들이 그를 섬기며 그 이름을 세세대대로 전하리라.
주께서 건져주신 이 모든 일들을 오고 오는 세대에 일러주리라.
(시편 22장)

ⓒ임의진
산정으로 벼락이 치듯, 소나무가 휘청거릴 만큼 큰 목소리로 누군가 비명을 질렀다.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Eli, Eli, lema sabachthani). 세 시쯤, 예수는 십자가상에서 엄습하는 고통과 갈증에 못이긴 외마디 비명으로 세상과 작별했다(마태 27,46). 얼굴을 외면하는 신, 굽어 살피지 않으시는 아버지. 고통은 죽음을 불러왔지만 예수는 원망어린 한마디 말고는 하느님을 부정하거나 거역하지 않았다. 예수의 최후 이야기는 이 시편 본문이 시나리오다. 이 시나리오에 따라 영화는 찍어졌고, 영화는 흥행했으나 일부에선 상영 금지되기도 했다.

쭉쭉 뻗은 세로의 나무들 사이로 가로인 노을이 지는 순간. 세계가 십자가에 매달리는 순간이었다. 수의가 들어있는 노모의 장롱처럼 인생은 모두 저마다의 죽음을 예비해놓고 살아가는 존재. 영원한 것은 오로지 사랑뿐, 그리움뿐. 살려 달라 암만 울부짖어도 어쩔 수 없이 받아야 할 죽음.

삼키지 못하고 죽은 입안의 밥알처럼 인생이 아쉽고 안타까워도 뚝 잘라버려야 한다. 미련 없이 돌아서야 한다. 물론 그러하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떠나갈 때 떠나가더라도 한번은 비명을 지르고 가라. 예수는 침묵과 순종의 끝에 큰소리로 외친다. “왜 나를 버리십니까?”

목숨은 하느님의 것이다. 제비는 사람이 뽑으나 모든 일을 작정하기는 주님이 하신다(잠언 16,33). 그렇다고, 생은 지극히 운명론적이지도 않다. 가난한 사람들이 주인공으로 등극하는 날, 그들의 목숨은 하느님의 목숨이고 그들의 희망은 하느님의 희망이 될 것이다. 버림받은 자들이 일어서서 무리를 이루어 돌아오는 새벽 출정, 그 시간에 새벽빛이 평화가 되어 찾아오리라. 운명을 거스르는 것은 사람들의 꿈, 사람들의 이상, 사람들의 어깨동무다.

“오늘 세상 사람들의 발은 도시의 황량한 거리를 걷고 있을지라도 아스팔트 위를 걷고 있을지라도 그들의 마음은 대포보다, 폭탄보다 강합니다. 인류의 평화는 바깥에서 오는 것이 아닐 겁니다. 더구나 핵무기를 가지고 이루어질 수는 없을 겁니다. 정부와 정부 간의 협약으로 이루어지지도 않을 겁니다. 평화는 우주의 중심에 있을지니 모든 사물은 평화를 향하여 운행하리. 이 피폐하고 지친 세상에 평화가 새벽빛처럼 찾아오리라. 이 세상의 단순한 이들, 겸허한 이들, 가난한 이들을 통해서 오리라. 어린이들의 목소리로 평화가 선포되리라. 젊은이들의 노래가 이에 화답하리라.” (11월 7일 라틴아메리카의 시편. 세계교회협의회 부산총회에서)

사람도 아닌 구더기, 천더기, 조롱거리들이 하느님 나라에선 두말없이 주인공 대접이다. 타고르는 <기탄잘리>에서 이런 왕을 만난다. “그대는 나에게 무엇을 주려 하는가?” 아, 거지에게 구걸의 손을 내밀다니. 왕다운 농담에 대해 생각해본다. 하느님이 무슨 부족함이 있을까. 하느님 앞에서 감히 으스대고 떵떵거리는 자들은 얼마나 꼴불견인가. 하느님은 오히려 가난한 사람들에게 다가가 그들의 영혼을 보듬어 안으신다.

부자들에 대한 미움이 아닌 가난한 사람들의 사랑으로 우리의 가슴을 채워야 한다. 미움은 원망의 선을 넘어선 매우 고약한 마음, 영원한 어두움이다.

사랑으로, 희망으로 고개를 들자. 덕장에 널린 명태가 입을 벌리고 달려있듯 죽더라도 사라지더라도 입을 열어 외치자. 나를 버리지 마시고, 나를 붙들어 주소서! 그리고 노래하자. “사랑밖엔 난 몰라.”

칠흑 같은 어둠에도, 구멍 없는 자물쇠 앞에서도 뒤로 숨지 말기를. 거울을 부수어야만 참 나를 만날 수 있다. 거울 속의 당신은 참 당신이 아니다. 오고 오는 세대에 알려야 할 말씀은 이것이다. 하느님을 만날 것, 나를 찾을 것. 하느님을 사랑하고 나(사람)를 사랑할 것. 얼굴을 돌리신 하느님과 잃어버린 나를 찾는 일이 이 땅에 우리가 사는 이유요 목적이렷다.
 

 
 

임의진
시인. 남녘교회 담임 목사를 역임했으며, 현재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위원이다. 펴낸 책으로 <참꽃 피는 마을>, <예수 동화>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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