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알청춘일기 - 여경]

ⓒ박홍기
꼭 보고 싶은 전시가 생겨 먼 길을 나갈 각오를 하게 되었다. 여기서 굳이 ‘각오’라는 표현을 쓰는 까닭은 전시장이 집에서 꽤 먼 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같은 부산이었지만, 집이 워낙 변두리에 있는지라 전시장까지 가는 데에만 한 시간 반이 족히 넘으니 왕복을 하면 3시간이 넘는 거리였다. 그렇지만 직접 작품을 볼 기회가 언제 또 생기겠나 싶어 부지런을 떨어 보기로 했다. 오랜만에 긴 시간을 버스에서 보내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찾아간 전시는 베르나르 포콩의 사진전이었다. 사진의 영원한 주제일 ‘빛’과 ‘시간’이라는 두 가지에 집중한 작품들이었다. 전시는 그리 크지 않은 갤러리에서 소박하게 열리는 것이어서 찬찬히 감상해도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마음에 드는 시리즈를 계속해서 돌아가 다시 보고, 특별히 마음에 드는 작품은 오래오래 들여다보기도 하면서 천천히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실컷 보고 났는데도 1시간 정도가 흘러있을 뿐이었다. 조금 더 머물고 싶었지만 집 근처에서 저녁 약속이 있었기 때문에 곧 돌아서야 했다.

돌아가는 버스에 몸을 싣고 가는데 문득 전시에 머무는 시간보다 전시를 보기 위해 이동하는 시간이 더 길구나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1시간을 위해 3시간을 이동하는 것은 얼핏 보기에도 비효율적인 것이었다. 더 오래 머물면서 본전이랄까, 그런 걸 뽑아야 했었나? 다행히 이번 전시는 이동 시간으로 비교할 수 없이 가치 있었으므로 문제되지는 않지만, 이외에 투자와 그 결과가 균형 잡히지 않은 행동을 한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 사람이 언제 올지 모르고 문 앞에서 기다리는 일, 오로지 나무 한 그루를 보러 1시간을 걸어 숲으로 가는 일, 단지 편지 한 통을 전해주러 먼 길을 떠나는 일. 이런 일들을 우리 주위에서 점점 찾아보기 힘들어진다. 비효율은 용납되지 않는다. 효율이라는 말은 이제 사업에서뿐만 아니라 학업, 취미생활 등 일상의 영역까지 침투했다. 그리고 비효율은 손해 본다는 것이고 손해 본다는 것은 바보스러움과 동의어가 된다. 그러니 손해 볼 짓을 해서는 안 되고 어떻게든 본전을 뽑아야 한다.

비싼 등록금을 냈으니 최대한 유용한 학위를 따야지, 영어를 공부하러 유학을 왔으니 영어에 매진해야지, 이왕 유럽까지 왔으니 최대한 많은 나라를 돌아봐야지. 그러나 이러한 태도가 차단하는 경험들이 얼마나 많은가? 어학원에 틀어박혀있느라 놓치는 관계들, 학점을 채우고 필수과목을 듣기 위해 포기하게 되는 지적 자극을 주는 수업들, 다음 나라로, 다음 도시로 매일같이 이동하느라 천천히 누리지 못하는 풍경들…….

습관처럼 기회비용을 따져보는 태도가 빼앗아가는 건 비단 위에 나열한 예시와 같이 단편적인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 우리가 빼앗긴 것은 크게 보자면 자유이다. 실패할 자유, 감행할 용기 같은 것들 말이다. 우리는 결코 실패해서는 안 되고 언제나 신중하게 고민해서 선택해야 한다. 손해 보지 않는 방향으로, 무엇이 가장 효율적인지 조목조목 따져가면서 말이다. 그런데 과연 효율적인 인생과 비효율적인 인생이란 게 있을 수 있을까? “효율적/비효율적으로 보낸 1년이다”라고 누가 감히 말하며 어떻게 증명하는가?

미래의 불확실성을 확실성과 안전의 영역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우리는 부단히 노력한다. 그 과정에서 결과가 불투명한 것들, 단기간에 가시적인 성과가 보이지 않는 것들은 탈락하게 되는 것이 당연지사다. 그런데 거기에 정말 아무것도 없을까. 단지 그것을 잡아보고 들여다볼 시간이, 무언가 피아나기를 기다릴 여유가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은 아닌가.

베르나르 포콩의 사진 작업은 시간이 지날수록 많은 것들을 비워내는 방향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소년들이 가득한 <여름캠프> 시리즈에서 시작하여 소년들이 사라진 풍경, 빛만이 남은 빈 방을 포착하다가 마지막 시리즈인 <이미지의 종말>에 이르러서는 피부와 피부 위를 흐르는 흰 글씨만 남아 있었다.

그 작품들 앞에서 나도 모르게 ‘아’ 하는 탄식이 흘러나왔다. 온갖 장식과 소품이 모두 사라지고 살결을 따라 그려진 글씨만 놓여있는 작은 사진들은 텅 빈, 그러나 깊은 진실을 담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그것은 애써왔던 모든 것을 무효화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앞선 작업의 궤적이 없었더라면 도달할 수 없는 것임을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이 세상에 태어남과 동시에 우리에게는 어떤 질문이 주어지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살아간다는 것은 그 질문을 정확히 이해하고 그에 대한 답을 하고자 하는 긴 여정이 아닐까, 하는 생각. 하지만 확실한 답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답이 있을 것이라는 확신, 그것은 어쩌면 답이 있어야만 한다는 고집일지도 모른다. 다만 계속 걸어가 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마지막 순간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더라도 말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유달리 마음에 남았던 작품의 제목을 거듭 되뇌어본다.

“우리는 그것을 갖고 있었지만 믿지 않았다.”
 

 
 

여경 (요안나)
서강대 국어국문학과 학생. 삶, 사람, 꽃, 벗, 별, 꿈이라는 단어를 좋아한다. 울림이 예쁜 말들에 이끌려 국어국문학과에 가게 되었다. 모두가 행복한 세상을 꿈꾸고 이를 위해 문학과 예술의 힘을 빌리려 한다. 시와 음악과 그림, 나무, 물이 흐르는 공간, 공동체를 만드는 것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고향 바다를 닮아 평온하고도 깊고 강인한 사람이고 싶어한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