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오늘을 말한다 - 34] 마르 4,1-25

사람 다니는 길에, 혹은 돌 잔뜩 있는 곳에, 혹은 가시덤불에 씨를 뿌리는 농부는 누굴까요? 벼를 보고 쌀 나무라고 하는 도시의 극소수의 아이들 빼고, 그야말로 삼척동자도 다 알 것입니다. 씨를 뿌려야 할 곳이 어디인지는 모를 수 있어도, 적어도 뿌리지 말아야 할 곳, 혹은 뿌릴 필요가 없는 곳이 어디라는 것쯤은 말입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렸는데, 어떤 것은 길에 떨어지고, 어떤 것은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지고, 어떤 것은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다고 합니다(마르 4,1-20 참조). 씨가 스스로 날아가서 그랬다면야 모르지만, 명백히 씨 뿌리는 사람의 탓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씨 뿌리는 사람은 실상 말씀을 뿌리는 것”이라고 친절하게 설명하십니다. 그러니까 하느님께서 혹은 예수님 당신께서 말씀을 뿌리시는 것이라는 셈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또 예수님께서는, 그리고 성령께서는 우리 똑똑하고 계산 잘하는 인간의 눈으로는 절대로 뿌릴 필요도 없고, 뿌려서도 안 되는 그런 곳에까지 당신의 생명의 씨를 뿌려 나눠주시는 분이십니다. 착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시고, 햇볕을 비추시는 분이십니다. 비와 햇볕 없이 어떤 생명이 자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뭇 생명을 우리가 선택(?)합니다. 그것도 우리의 똑똑함과 셈법에 따라서, 피부색으로, 성으로, 인종으로, 사회적 신분으로, 능력으로, 출신지역으로, 하다못해 생각하는 것으로까지 셈을 해서 득이 되면 비와 햇볕을 내리고, 실이 되면 아예 말려 죽이려 합니다. 개인으로나 집단으로나 그 행태는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그렇게 살리고 죽일 능력을 어느 정도 갖추었느냐는 것의 차이일 뿐입니다. 그래서 그 능력이 크면 클수록 수많은 생명을 좌지우지할 수 있고, 그 능력의 모자란만큼 비와 햇볕을 구걸하는 정도가 다를 뿐 마찬가지입니다. ‘경쟁력’이니 ‘종속’이니 하는 표현은 이를 그럴듯하게 설명하는 말인지도 모릅니다.

하여튼 아무리 우리가 똑똑하고 셈을 잘 하여, 나름 으스대며 살든 부끄럽게 살든, 의롭게 살든 불의하게 살든, 성공을 했건 낙오를 했건, 괜찮은 동네나 괜찮은 나라에 살건 후진 동네나 후진 나라에 살건, 자랑스러운 초일류 기업이 예뻐하는 대학을 나왔건 그렇지 않았건, 주님께서는 씨앗을 누구에게나 어느 곳에나 뿌리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때를 맞춰 비를 내리시고, 햇볕을 주십니다.

그 말씀의 씨앗이 열매를 맺는 데에는 우리의 몫이 분명히 있습니다. “사탄이 오지” 못하게 막는 것,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도 걸려 넘어지지” 않는 것,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과 그 밖의 여러 가지 욕심이 생기지” 않도록 하는 것 따위가 그것입니다. 어처구니없게도 그런 것들이 세상사의 이치며 능력이라고 믿으라는 다그침에 우리가 내몰리고 있지만 말입니다.

▲ <사도들에게 설교하는 그리스도>, 두초, 1311년

그러나 적어도 그리스도인만큼이라도 속수무책으로 내몰리거나, 시류에 영합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아주 단순합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믿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활 시작 전에 광야에서 겪으신 유혹이 바로 하느님을 버리라는 것, 곧 ‘사탄’을 섬기라는 것 아니었습니까! 사탄이 그 대가로 주겠다는 것들은 무엇이었습니까? 세상 모든 것, 권력이든 재물이든, 그런 것들 아니었습니까! 사탄의 유혹을 물리쳤기에, 세상 모든 것에 대한 탐욕과 욕심을 거절하고, 그 대신 ‘아버지의 뜻’을 선택한 대가는 무엇이었습니까? 환난이고 박해였고 죽음이 아니었던가요?

그분의 생애는 길 위에 떨어진 씨앗을 다시 주워 좋은 밭에 심으려 하신 것이었습니다. 잃어버린 양이나 은전의 비유가 이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분은 돌밭의 돌을 치우려 하셨습니다. 그분은 가시덤불을 치우려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쓸모없다고 혹은 더럽다고 ‘버린’ 사람들의 어깨를 짓누른 돌을 치우셨고, 그들을 가둔 가시덤불 같은 굴레를 벗겨주시지 않았습니까! 그들에게서도 말씀의 씨가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열매를 맺도록 하시기 위한 것, 하느님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려 하셨던 것 아닙니까! 그분은 길 위를 떠돌아 다니셨고, 돌밭에서 무릎이 까졌으며, 가시관으로 피를 흘리셨습니다.

우리는 누구이며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좋은 밭에 떨어진 씨앗이어서 풍성한 열매를 맺고 있습니까? 우리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길에 떨어진 씨앗을 주우러 길을 나섭니까? 돌을 치우기 위해 피땀을 흘립니까? 가시덤불을 거둬내기 위해 찔리고 상처입고 곪아가고 있습니까?

우리는 누구이며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수준(?) 맞지 않는 형제 누이 이웃을 길로 내쫓고, 괘씸한 이들에게 내 밭에서 캐낸 돌을 짐으로 얹어주고, 거추장스러운 이들을 가시덤불로 내몰아 알아서 죽어주기를 기다리는 것은 아닙니까?

점점 우리 사회는 여러 이질적 세상으로 분열되고 그 사이의 담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길에서 노숙하는 사람들의 세상, 환난이나 박해로 신음하는 사람들의 세상, 욕심과 탐욕의 욕망을 주체하지 못하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모든 것을 독차지하려는 사람들의 세상으로 말입니다.

그 가운데에서 그리스도인과 교회의 몫은 분명합니다.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열매를 맺기 위해 길을 나서 손에 흙을 묻히며 씨를 거두는 것, 돌밭의 돌을 치우는 것, 가시덤불을 거둬내는 것, 그래서 갈라진 세상을 하나로 엮어 “좋은 밭”으로 만드는 데 앞장서는 것, 그래서 마침내 풍성한 열매를 맺어 모두가 하느님께는 영광을 드리고 세상에는 평화를 가져오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러면 일면식도 없던 백인대장이 한 젊은이의 십자가 죽음 앞에서 “저분이야말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고 고백한 것처럼, 세상이 우리 그리스도인과 교회를 보고 “저들이야말로 하느님의 사랑하는 아들,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아들이었다”고 말할 것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성사입니다. 교회와 하느님의 백성은 그리스도의 얼굴입니다. 교회는 하느님의 빛을 가리는 함지나 침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마르 4,21-25 참조). 그리스도인은 등경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시장의 절대자유와 금융투기의 절대자유를 신봉하면, 그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사탄에게 내주는 것이며, 돌밭을 만드는 것이며, 가시덤불을 키우는 것이며, 등불을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놓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오늘날 시장의 절대자유와 금융투기의 절대자유는 수많은 ‘작은 사람’을 ‘내다 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와 신앙인은 ‘작은 사람’과 동고동락해야 합니다. 그 ‘작은 사람’은 ‘또 다른 나’이며 동시에 우리 주님의 벗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가장 작은 사람’이라도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존엄한 사람(인간의 존엄함)이고, 그 사람과 함께(연대) 살 수 있는 세상을 가꾸는 것(공동선의 실현)이 하느님의 거룩한 뜻이기 때문입니다.

돌밭의 돌을 치우고, 가시덤불을 거둬내서 좋은 밭을 만들라고(창조와 구원의 완성) 하느님께서는 우리 그리스도인을, 하느님 백성을, 교회를 초대하고 계십니다.
 

박동호 신부 (안드레아)
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신정동성당 주임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