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한열의 떼제 일기 - 8]

▲ 프랑크 수사의 묘지 ⓒ신한열
프랑크 수사가 선종했다. 두 달 뒤면 79세 생일을 맞았을 것이다. 방글라데시의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살았던 그는, 거기서 생일을 지내고 프랑스로 돌아올 예정이었다. 하지만 호흡은 더 가빠졌고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았다. 결국 예정을 앞당겨 떼제로 돌아오던 중, 이스탄불에서 심장의 고동이 멎었다. 평생 순례자였던 그는 길에서 삶을 마감했다.

네덜란드 출신인 그는 1960년대부터 떼제를 떠나 미국 시카고와 애틀랜타, 방글라데시, 일본, 한국, 인도의 캘커타를 거쳐 다시 방글라데시에서 살았다. 어디를 가나 그의 가장 큰 관심은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가장 약한 사람들, 버려진 이들, 장애인들의 존엄성을 찾아주려 끊임없이 애썼다.

사랑의 그리스도를 만났기에 나라와 대륙, 교파와 종교의 경계를 넘었던 그는 그리스도교 일치 기도 주간에 선종했다. 그가 수십 년 동안 살았던 방글라데시는 그리스도인들이 인구의 1퍼센트의 삼분의 일밖에 되지 않는 이슬람 국가이다. 정치적 소요와 폭력 사태가 이어지던 지난 12월, 떼제로 보낸 편지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우리가 함께 하느님께 찬양과 청원의 기도를 드릴 방도를 찾는 것이 시급합니다. 세상이 불타고 있을 때―이건 여기서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평화를 달라고 주님께 청한다면, 어떻게 그분 앞에 모두 함께 나아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누군가는 이슬람이 다수인 터키에서 프랑크 수사가 숨을 거둔 것에도 의미를 부여했다. 그는 오랫동안 이슬람 신자가 다수인 나라에서 그들과 깊은 우정을 나누었다.

나는 프랑크 형님을 대학 시절에 알았다. 그는 1979년 한국에 와서 떼제 수사들의 우애공동체를 시작하고 이듬해말 인도 캘커타로 떠났다. 광주민주화운동 뒤였다. 누군가는 프랑크 수사가 당국에 의해 추방되었다고 했지만 확인하지는 못했다. 목포 출신의 대학 선배 한 사람이 수배 중일 때 서울 화곡동 공동체에 한동안 머물렀던 것은 사실이다.

1983년 겨울. 대학 3학년을 마치고 나는 인도에 갔다. 캘커타에 머무는 동안 프랑크 수사님을 거의 매일 만났다. 그 시절 나는, 깊은 기도 생활과 사회 정의를 위한 노력을 병행하는 떼제 공동체와 형제들의 삶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서울에서 수사님들을 만났고 인도로 가기 전에 한 학기동안 함께 살기도 했다. 그리고 캘커타에서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 생활하는 떼제의 형제들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하루는 프랑크 수사님과 함께 캘커타 시내를 걸었다. 옛 영국 식민지 시절의 고루한 건물들, 곳곳에 무리지어 쓰레기 더미를 뒤지는 까마귀 떼, 거리에 넘치는 사람들과 소음, 죽은 이의 시체를 들것에 얹어 네 명이 떠받들고 뛰어가는 모습……. 죽음까지도 삶의 한 부분으로 통합된, 가난하면서도 활기찬 모습이 영화처럼 내 앞에서 지나갔다.

우리는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분은 내 안에 있는 물음과 모색, 주저와 열망을 주의 깊게 들어주셨다. 어느 순간 나는 성소에 대해 얘기하기 시작했다. 하느님이 나를 어디로 부르시는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지, 혹시 떼제 공동체의 일원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러자 프랑크 형님은 걸음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특유의 부드러우면서도 분명한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복음을 살아가는 것이야.” 내게 정말 필요한 것은 프랑스 떼제에 가는 것이나, 떼제의 수사가 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복음을 살아가는 것이라는 말이었다. 내가 기대한 대답은 아니었지만 그것은 나에게 큰 도전이 되었다. 그 뒤로 오랫동안 나는 그의 말을 곱씹었다.

▲ 외국에서 운구된 관은 법규상 열 수 없어서, 프랑크 수사의 수도복과 서원 반지는 관 위에 올려둔 채 묻혔다. ⓒ신한열

프랑크 형님과 캘커타를 걸었던 때로부터 30년이 흘러 나는 그의 유해를 운구했다. 그리고 그분의 삶을 돌아보면서 ‘복음을 사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언젠가 그는 이렇게 썼다.

“약하고 쓸모없이 보인다고 사회에서 버림받은 사람들이야말로 하느님의 현존이다. 우리가 그들을 맞이하면, 그들은 차츰 우리를 지나친 경쟁의 세계에서 마음의 친교를 나누는 세상으로 이끌어준다. …… 우리가 함께 가난한 사람들과 약한 사람들을 섬길 때, 우리를 하나 되게 해주는 것은 바로 그들이다. 힘 있는 우리가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들이 우리를 초대해서 하나 되게 하고 그들과 함께하도록 한다.”

장례식을 마치고, 10여 년 전에 프랑크 형님이 내게 보낸 편지를 찾아 읽었다. 그 가운데 한 대목이 깊은 울림으로 다가왔다.

“네 편지를 읽으면서 내 마음은 노래를 불렀어. 넌 수도생활을 계속해 나가는 힘을 네 안에 계신 하느님의 현존에서 길어내고 있다고 했지. 당신 사랑의 계획으로 너를 불러주셨고 그것을 이루시는 그분 안에서 말이야. (주님은) 사랑으로 불러주시고 (우리는) 자신을 내어드리는 것, 계속되는 이 생명의 대화는 우리 삶 가운데 얼마나 큰 신비인지! 거기서 우리는 진정한 행복을 발견하는 거야.

나도 마찬가지로, 살아오면서 아주 자주 하나의 응낙에서 또 다른 응낙으로 계속 나아갔어. 아픔이나 회의조차도 새로운 응낙을 더 좋아하도록 도와주었지.”

세상을 떠난 형제를 마을 묘지까지 동행하고 나면, 가장 중요한 것을 되새기고 본질에 충실하게 된다. 감사의 마음과 새로운 각오가 모두에게 솟아나는 것 같다. 프랑크 형님을 보내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 남을 위해 자신을 온전히 내어준 이의 삶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신한열 수사
떼제 공동체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관련기사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