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민아의 일상과 신비 - 10] 습격당한 교황의 비둘기, 불길한 징조일까

분명 보기에 불편했습니다. 지난 1월 26일 프란치스코 교황이 우크라이나의 평화를 기원하며 어린이들과 함께 날려 보낸 새하얀 비둘기들이 때마침 날아든 덩치 큰 까마귀와 갈매기에 의해 무자비하게 공격을 당했던 장면 말입니다. 하지만 사건 자체보다 더 마음을 꺼림칙하게 했던 것은 일파만파 인터넷에 회자된 사건에 대한 ‘해석’들이었습니다. 그 중 대다수는 하얀 비둘기를 평화와 선의 상징으로, 거무죽죽한 까마귀와 갈매기를 죽음과 폭력과 악의 상징으로 단정하며, 이 사건을 불길한 징조, 하느님의 경고, 교황과 바티칸의 미래에 대한 은유로 읽어 내고 있었지요.

심지어 미국의 대표 일간지 중 하나인 <워싱턴 포스트>의 외교 전문 블로거인 맥스 피셔 (Max Fisher)조차, 이 사건을 “프란치스코 교황 즉위 후 지난 1년간을 모습을 정확히 보여 준 메타포”라고 표현하더군요(1월 27일자 Washington Post). 피셔는 “즉위 이후 교황이 시리아 내전, 동성애, 우크라이나 반정부 시위 등 주목할 만한 현안에 목소리를 내왔지만, 냉담한 현실의 벽에 부딪혀 큰 성과를 내지 못했으며, 이는 마치 교황이 날려 보낸 평화의 비둘기들이 모두 내쫓긴 것과 같다”라고 평했습니다. 묵시적인 의미를 담지는 않았지만, 하얀 비둘기들을 평화를 위한 교황의 노력으로, 검은 까마귀와 비둘기를 방해세력으로 비유하는 고전적인 상징을 채택한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 지난 1월 26일, 교황 프란치스코와 두 어린이가 우크라이나의 평화를 기원하며 흰 비둘기를 날려 보내고 있다. (ITN 동영상 갈무리)

해프닝으로 끝날 수도 있었던 이번 사건이 마치 어마어마한 은유적, 묵시적 의미를 담고 있는 것처럼 부풀려지고 있는 데는 교황의 개혁에 대한 우려의 시각이 한 몫을 하고 있는 듯 보입니다. 게다가 구약성서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비둘기와 까마귀에 대한 상징적 의미 또한 더해져 근거 없는 망상을 부채질하고 있는 것이죠.

사실 비둘기라는 놈들이 특별히 평화로울 것도 없고, 다른 새들 못지않게 자신의 영역과 먹잇감에 민감한 평범한 날짐승이라는 것과, 그에 반해 오히려 까마귀는 먹성이 지나치게 좋아 죽은 동물도 안 가릴 뿐, 제 짝을 사랑하고 무리를 아끼는 마음은 인간에게조차 귀감이 된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따라서 비둘기를 선의 상징으로, 까마귀를 악의 상징으로 보고 이 사건을 불길한 징조로 읽어내는 것은 오래된 상징에 길들여진 우리의 사고가 만들어 낸 편견입니다.

그러고 보면 은유와 상징이 우리의 상상력에 끼치는 영향력은 막대합니다. 첨단과학의 시대에도 변함없이 의식과 잠재의식을 통해 우리를 지배하죠. 사실, 은유와 상징을 만들어내는 것은 인간이 가진 독특하고도 귀한 재능입니다. 그러기에 철학자 폴 리쾨르는 그의 저서 <악의 상징>에서 “상징이 사고를 불러일으킨다”는 유명한 말을 했지요. 상징은 인간에게 생각할 기회를 제공하기도 하고, 일상에 묻혀 잊고 살기 쉬운 성스러움에 대한 열망을 자극하기도 합니다. 인간은 상징과 은유를 통해 물질과 물질의 관계성을 찾아내고, 자신과 세상의 관계를 가늠하고, 보이지 않는 것을 상상하고 꿈꾸며, 마침내 자신의 영역을 초월한 성스러움을 삶과 언어로 끌어들여 호흡하죠.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상징들에 관습적 사고와 이데올로기의 무게가 덧붙여질 때입니다. 오래된 상징, 자주 인용되는 상징일수록 문제는 심각합니다. 비둘기와 까마귀의 경우도 한 예가 될 수 있겠지요. 아무럴 것 없는 비둘기가 과분하게 하느님의 언약과 평화와 선을 상징하는 새로 승격되고, 반대로 까마귀는 악령과 죽음을 상징하는 비호감 새로 전락하게 된 이면에는, 이 새들의 습성 자체에 대한 이해보다는 흰색을 선하고 아름답고 평화로운 것으로, 검은색을 악하고 추하고 음험한 것으로 여기는 관습적 사고가 숨어 있습니다.

흰색과 검은색의 상징적 편차는 인종차별 이데올로기와도 불가분 연관이 있지요. 사람의 피부색에 따라 선악을 가르는 못된 사고방식이 참으로 질기고 끈적거리게 우리의 사고를 파고들며 편견을 재생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종차별주의는 서구에만 만연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소위 ‘백의’민족이라 자칭하며 ‘민족적 순수성과 순결함, 순혈주의’에 대한 토대 없는 신화를 창조하여 피부 색깔과 문화가 다른 이방인들을 배척하고 천시하는 우리 사회의 인종차별주의 또한 이미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리쾨르는 이러한 상징의 부작용을 경고하면서, 상징 해석학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해석학은 우리로 하여금, 상징을 지금 여기 우리의 삶과 연결하여 반성하게 하고 변화하는 삶의 양식들에 견주어 비판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오해로부터 진정한 이해로 나가기 위해 이러한 “교정적 비판”은 필수적입니다.

현실의 삶에서 우러나온 표현들을 경유하지 않은 상징은 거짓된 상징이며, 거짓된 상징들에 얽매여 있는 의식은 오히려 사고를 방해합니다. 해석을 통해 오늘의 삶과 맞닿아 있을 때, 상징은 비로소 우리 존재의 심연을 건드리며 성스러움을 향한 상상력을 자극합니다. 이 과정을 거치지 않은 상징은 낡고 억압적인 관습과 교리와 생활방식에 우리를 묶어둘 뿐이죠. 상징이 낡고 병들었다는 것이 파악되면, 익숙하고 보편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과감하게 도태시켜야 합니다. 불길하고 추한 것은 그저 본능에 따라 움직인 까마귀와 갈매기가 아니라, 바로 이 케케묵은 상징과, 상징을 따라다니는 관습과 이데올로기들입니다.

사실 바티칸에서 날려 보낸 비둘기들이 까마귀와 갈매기들의 습격을 당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작년 1월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비둘기를 날려 보냈을 때도, 근사하게 날갯짓 한번 못한 채 건물 주변을 떠돌던 물정 모르는 비둘기들은 그만 갈매기들의 표적이 되고 말았지요. 이탈리아의 국민동물보호협회는 바티칸에서 비둘기를 방사하는 의식이 결국 사육된 비둘기들을 야생 조류의 먹잇감으로 던지는 것과 마찬가지라며 잔인한 관행을 중지할 것을 요청하는 캠페인을 벌여 왔습니다. 또한, 내셔널지오그래픽의 조류 전문가인 멜 화이트(Mel White)에 따르면 바티칸뿐 아니라 각종 의식에 사용되는 ‘순백의 비둘기’란 사실 수백 년의 사육과 품종 개량을 통해 만들어진 돌연변이랍니다. 동물은 자신의 보호색을 타고나기 마련이지요. 그렇듯 눈부시게 창백한 흰색 비둘기는 인간이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욕심의 결과이며, 따라서 야생 조류들의 표적이 되는 것이 당연하답니다.

이번 사건이 바티칸에서나 어디에서나 비둘기를 날려 보내는 낡은 의식을 사라지게 하는 계기가 되면 좋겠습니다. 애꿎은 까마귀가 마치 교황의 평화를 가로막는 악의 전령인 것처럼 간주되는 일 또한 없어야 할 것이며, 프란치스코 교황의 평화를 향한 노력에 불길한 기운이 드리워질 것이라 노파심으로 전전긍긍하는 일도 없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타고난 생김새에 따라 생명을 차별하는 악한 습성이 암암리에 우리 의식에 깊이 뿌리박혀 있다는 것을 반성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느님 보시기에는 비둘기나 까마귀나, 희거나 검거나 모두 어여쁜 생명입니다.


 
 

조민아
미국 미네소타의 세인트 캐서린 대학교에서 신학과 영성을 가르치고 있다. 제도교회와 신앙인의 삶 사이에서 발생하는 작고 큰 움직임, 갈등, 투쟁, 타협, 화해와 그 과정에서 새롭게 탄생하는 언어와 상징에 관심이 많다. “지금”, “여기”에서 할 수 있는 역할이 무엇인가 늘 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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