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민석 신부의 Spring Tree]

현애마을이 만들어진 것이 6.25전쟁 그 참혹한 현실 앞에 정처 없이 떠돌던 백성들이 이곳에 정착하기 시작할 때부터니까 육십갑자를 보냈습니다. 밤이 지나고 새벽이 밝아 오면 하나 둘 사람이 나다니기 시작합니다. 여기 사람이 살고 있고 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때가 되면 사람들의 모습은 사라집니다. 이곳을 스쳐지나간 분들도 참으로 많습니다.

오늘도 사람은 태어나고 또 죽어 갑니다. 길은 어제의 그 길이지만 이 길 위를 걷는 사람은 어제의 그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은 어제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늙습니다. 아이는 소년이 되고 소년은 청년이 되고 청년은 장년이 되고 장년은 노인이 됩니다. 노인은 마침내 새로 태어나는 아이에게 자리를 내어 주고 지금까지 걸어 온 길에서 내려섭니다. 안개 속으로 사라지듯 그의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습니다.

내일 그 언제인가 나는 떠납니다. 오늘도 여전이 오고 있습니다. 이렇게 순간순간 마다 봄 나뭇가지에 돋는 새싹으로 둥지에서 노래를 배우는 여린 날개의 작은 새로 꽃의 심장에 들어 있는 쐐기벌레로 돌 속에 감추어진 보석으로 오고 있습니다. 오늘 지금 이 순간은 내가 살아가는 내 인생의 최고의 순간입니다. 이 보다 더 좋을 수는 없는 날입니다. 이 순간을 위해 그 오랫동안 주님이 미리 마련해 놓은 날입니다.

내 심장의 맥박소리는 살아 있는 모든 것의 생명이요 죽음입니다. 이곳 정착마을 사람들은 오랜 세월 이곳에서 울기도하고 웃기도 했습니다. 캄캄한 어두운 현실 앞에 두려워하다가 다시 희망을 부여잡고 살았다며 긴 이야기를 짧게 들었습니다. 가난한 현실 앞에 늘 죽음을 머리에 이고 살았답니다. 앞으로도 긴 이야기 여러 이야기를 들을 것입니다. 아마 듣는 것이 나에게 맡겨진 중요한 몫이기도 합니다.

 ⓒ박홍기

장티푸스 환자는 병이 나으면 환자가 아닙니다. 나병 환자도 병이 나으면 문둥이가 아닙니다. 그런데 나환자만은 죽을 때까지 환자 취급을 당해야 하니 딱한 일 아닙니까. 세상에 먹을 것이 없어서 살아보려고 가꾼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은 몸으로 앓고 있는 것보다 더 무서운 질병을 마음으로 앓고 있다는 것 알았습니다. 이 사회 구석구석이 온통 불신과 배반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이 몸으로 앓아온 것보다도 더 치명적인 불신과 배반이라는 질병을 뼛속까지 깊이 앓아오고 있는 것이 누명(陋名)입니다.

‘문둥이’라는 더러운 이름으로 씌운 누명(陋名)입니다. 세상에 가장 억울한 일 중 하나가 누명을 쓰는 것입니다. 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는데, 터무니없게도 더러운 이름을 뒤집어 써야 한다는 것은 환장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누명’ 이라는 말이 나오면 반드시 그 뒤에 <쓴다> 또는 <씌운다>는 말이 따라 붙습니다. 누명이란 처음부터 남이 뒤집어씌우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나라는 6.25전쟁 이후에 수많은 이들을 문둥이로 몰아 문둥이 사냥을 했습니다. 그와 똑같은 모양으로 자신들과 의견이 다른 사람들을 ‘빨갱이’로 몰아 ‘문둥이’ 취급을 하였으니 이들을 두 번 죽인 것입니다. 지금도 ‘종북분자’ ‘빨갱이’ 라는 누명을 씌우며 계속하고 있습니다. 이때 나쁜 것은 누명을 쓰는 쪽이 아니라 누명을 씌우는 쪽입니다. 진짜로 벌을 받을 자는 누명을 쓴 자가 아니라 누명을 씌운 자들입니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 죽였다면 죽은 사람도 사람이고 죽인 사람도 사람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죽인 것입니다. 내가 내 이름을 벗고 나에게 붙은 수식어를 떼어버리고, 그냥 ‘사람’으로 돌아가면 그러면 세상에 나 아닌 사람은 없습니다. 이와 같은 깨달음에 서면 내가 나를 죽인 역사 앞에 서게 됩니다. 슬픔과 절망의 자리에서 일어나 가슴의 문을 열어 봅니다.

가슴의 문이 열리기 시작하니 절절이 가슴이 아파오기 시작합니다. 누가 누구를 불쌍히 여기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 누구의 가슴을 제 가슴으로 아파합니다. 그래서 이 마을 사람들은 죽은 아우의 시신을 메고 논두렁 건너며, “사랑하는 아우야, 이제 그만 울자!”고 노래하는데 그 목소리 어디에도 증오나 분노가 담겨 있지 않았더랍니다.

‘하나’를 생각해 봅니다. 하늘은 ‘하나’를 얻어서 맑고 땅은 ‘하나’를 얻어서 든든하다고 했습니다(老子). 그렇다면 누명을 씌운 놈은 ‘하나’를 얻어서 사람을 죽이는 것인가? 말하기 어렵지만, 부인할 길이 없다. ‘하나’에서 떨어지면 선악 간에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생각하면 ‘하나’는 무서운 말입니다. 그리고 더없이 아늑한 위안이기도 한 말입니다.

약 60년 전 미국에서 매카아디라는 국회의원이 주동이 되어 미국 정부 내의 공산 당원을 가려 뽑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 때 평소에 나라 일을 놓고 이러쿵저러쿵 따지고 들던 사람들 중에 숱한 인사가 빨갱이로 몰려 마구잡이로 당했습니다. 이 사건을 ‘매카아디 선풍’ 이라 합니다. 우리나라에 한 때 매카아디 선풍이 불었습니다.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기 직전, 정부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빨갱이’ 라는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습니다.

요즘, 자신들과 의견이 다른 사람들을 모두 싸잡아서 ‘종북’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무서운 시대가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이런 사건에 너무 어리둥절할 건 못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황제 모독죄에 내란 예비 음모 및 선동죄를 범한 죄인이라는 터무니없는 누명을 쓰고 돌아가셨으니 말입니다. 다만 스승예수를 따르는 제자답게 거칠 것 없이 깨끗하고 당당해야 합니다. 누명 아니라 누명 할아버지를 씌운대도 겁낼 것 없습니다.

사람이 버린 돌로 하느님은 당신 집 머릿돌로 삼으신다고 했습니다. 사람한테는 버릴 물건이 있지만 하느님에게는 버릴 물건이 없습니다. 버리지 말라합니다. 아무것도 버리지 말 일입니다. 내가 감당해야 할 탐욕도 재물도 죄악까지도 합하여 선을 이루실 것입니다. 하느님을 닮은 이들이 이곳 현애마을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의 형제자매들이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삶의 주인이 되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이 주님으로부터 왔음을 알고 제 생명도 물질도 주님 것으로 고백하시는 분들을 보았습니다. 모질게 찔려오는 고통에 처했을 때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 사랑을 깊이 체험하고 불신앙에서 벗어나게 해 주셨다고 감사하는 이들이 여기 살고 있습니다.


 
 
최민석 신부 (첼레스티노)
광주대교구 현애원 담당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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