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 문영석]

지난 1월 16일 유엔 아동권리위원회 청문회에서 사제들의 아동 성추행 범죄행위에 대한 가톨릭교회의 미적지근한 처리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나오자, 바로 다음날 즉각적으로 미국 <AP> 통신은 교황청이 청문회를 위해 준비한 내부 문서 일부를 입수해 전임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사임하기 전 2년간 아동 성폭력 사건으로 성직을 박탈한 사제들의 수가 400명에 이른다는 기사를 보도했다.

이틀 후인 19일에는 설상가상으로 이탈리아에서 복통이 심하다 해서 위경련인줄 알고 병원에 실려온 수녀가 건강한 아들을 출산했다는 황당한 기사까지 대서특필되어 엎친 데 덮친 격이 되었고, 21일에는 미국에서 3번째로 큰 교구인 시카고 대교구도 30명의 교구 소속 성추행 사제들에 관한 보고서를 공식적으로 발표하였다. 특히 이 교구는 전임 교구장이었던 추기경마저 성추행 고소에 휘말려들었고, 비록 중간에 다행히(?) 고소 당사자가 고소를 취하했기 때문에 구설수로 끝났지만, 한때 전 미국 가톨릭교회를 공황 상태로 몰아간 적이 있는 교구다. 이 모든 기사들이 지난 일주일 안에 일어난 일들이고, 국내에서도 선정적인 사건에만 촉각을 곤두세우는 온갖 언론매체들이 얼씨구나 하고 연달아 대서특필했던 사실들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느 종교보다도 성직자들의 강력한 권위와 일원화된 조직체계를 갖고 있는 가톨릭교회에서 소위 “소아 성애자”(pedophilia)들에 의해 저질러진 이 범죄. 인권과 사회정의의 보루가 되어야 할 교회의 이미지와 권위에 이보다 더 큰 타격은 없다. 1980년대 중반부터 북미에서는 실제로 피해자들이 연달아 세속 법원에 성추행 사제들을 고소하기 시작하였고, 이에 대한 보상금 때문에 미국에서만도 2004~2011년에 8개 교구들이 파산을 선언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또한 이 문제에 미온적으로 대처해왔던 교구장들이 줄줄이 사퇴하였고, 2008년의 경우 미국 주교회의가 발표한 보상금액이 26억 달러(한화 2조 7천억 원)에 이르렀다.

▲ 지난 16일 유엔 아동권리위원회 청문회에 참석한 교황청 대표들이 인권 조사관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사진 출처 / 알자지라 뉴스 영상 갈무리)

현대인은 성역이 없는 사회에 살고 있다. 과거 권위주의 시대에는 교권으로 누를 수 있었지만, 이젠 감춰진 것은 모두 발가벗겨지는 시대에 살고 있다. 물론 과거에도 아동 성추행은 있었고 고발들도 간혹 있었지만, 1970년대까지만 해도 서구 사회에서 지역 주교들의 권위와 입김이 너무나 막강해서 감히 공론화시키지 못했고 대개 쉬쉬하고 묻혀버렸다. 그리고 주교들은 해당 신부들을 환속시키는 대신 먼 곳으로 전근시키는 미봉책을 써왔는데 이게 후일 거대한 쓰나미를 교회 안에 몰고 온 셈이다.

1980년대 중반부터 미국과 캐나다 등 북미에서 사제 성추행 고발들이 마치 홍수처럼 갑자기 밀어닥쳤고, 캐도 캐도 계속 이어지는 고구마 순처럼 연이은 고발로 인한 충격과 여파는 교회를 극도의 공황 상태로 밀어 넣었다. 전통적으로 어린아이들이 미사 복사를 하면서 사제들과 친근한 관계 속에서 사제성소를 키워가는데, 이런 사태로 인해 사제들이 어린아이들을 귀엽다고 함부로 쓰다듬을 수도 없고 적극적으로 청소년들에게 다가가기도 어려워졌으며, 무엇보다 사제들의 상징인 로만칼라를 이상한 눈길(?)로 쳐다보는 사람들까지 생겨나는 상황에서 어떻게 사제성소가 격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최근 이 사태를 호도하면서 각종 국내 일간지들은 400명이나 되는 엄청난 숫자라고 호들갑을 떨지만, 전세계 410,000명이나 되는 가톨릭 사제 총수에 비하면 1950~2002년 사이에 고발된 5,000여 명의 성추행 사제들의 숫자는 실제로 전체 사제 수의 1% 내외에 불과하다. 문제는 이 극소수의 사제들이 수십 년간에 걸쳐 지속적으로 추행을 한 사례가 많기 때문에 피해자들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는 데 있다. 이상하게 전세계에 보고된 아동 성추행 고발 사건 중 압도적 다수인 약 80%의 케이스가 미국의 사제(5,000명 중 4,392명이 미국인)들에게 집중되어 있다. 성추행의 대상이 13세 미만의 소아나 십대 후반(15-19세)의 청소년들에게 중첩되어 있고, 같은 범죄라도 미성년자들에 관련된 범죄는 그 배상액이 막대하다는 데 문제의 핵심이 있다.

현재 미국은 변호사들이 지나치게 양산되어 소송만능주의가 판을 치는 나라다. 패스트푸드점에서 주문한 커피가 쏟아지면서 화상을 입은 한 고객이 ‘커피가 뜨거우니 조심하라’는 경고가 없었다며 패스트푸드 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거는 등 별 우스꽝스러운 것들이 다 소송 대상이 되는 나라이다. 이런 나라에서 거대한 부동산과 튼튼한 재정 지불 능력을 가진 가톨릭교회는 그야말로 좋은 먹잇감이 아닐 수 없다.

“누울 자리 봐 가며 발을 뻗어라”는, 속담처럼 개교회 중심인 개신교회야 신자들이 고작 수천 명만 모여도 “메가 처치”(megachurch)요 10,000명이 넘으면 메가가 아니라 “기가 처치”(gigachurch)로 불리는 상황에서 대부분이 몇 십 명이나 몇 백 명 수준인 교회를 상대로 소송을 걸어봐야 자칫 보상금은커녕 들어간 소송비용도 건지기 어렵다는 것은 먼저 영악한 변호사들이 알고 있다. 하지만 가톨릭 사제의 경우 배상금의 최종 책임이 교구에 있고, 대부분 수십만에서 수백만 명의 신자들을 가진 가톨릭 교구들은 우선 사안 자체가 선정적인 기사로 세간의 이목을 끌 수 있는데다, 대대로 전해온 토지, 교회 건물, 병원, 학교 등 막강한 부동산과 튼튼한 재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극단적인 일부 개신교 근본주의자, 복음주의자들이나, 세속화되어가는 사회에서 막강한 교회권력에 대한 거부감이나 종교에 냉소적인 사람들이 상호 연계되어 파생된 반(反) 가톨릭 세력에게도 이 사건은 가톨릭교회를 공격할 수 있는 호재이기도 하다.

혹자는 이 문제의 근원적인 처방을 위해서는 가톨릭교회도 사제 독신 제도를 완화하여, 성공회처럼 사제들의 혼인을 개인 선택에 맡겨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실제로 가정을 갖고 있는 개신교 기혼 성직자들의 성적 일탈이나 아동 성추행이 독신 사제들인 가톨릭 사제들보다 훨씬 더 많다는 보고서(“It Ain't Just Catholic Priests”: Resources on Shocking Statistics of Clergy Sexual Abuse 참조)들을 보면, 사제 독신제를 푼다고 해서 성추행 문제가 해결된다고 볼 수도 없다. 오히려 교회의 세속화와 타락을 더욱 부추기는 또 하나의 출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가톨릭교회는 이미 주위 개신교 사례들을 통해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것이다. 사제 성소격감의 가장 큰 원인은 사제들이 더 이상 현대 청소년들의 우상이나 스타로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청소년들은 자신들이 열광하고 사모하는 것을 성취하기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지속된 사제 성소격감은 모든 것이 성직자 위주로 돌아가는 가톨릭교회의 견고한 성직주의(Clericalism)의 붕괴를 의미한다. 현재 프랑스 사제들의 평균 연령이 72세(2013년)요, 미국은 그보다는 좀 낫지만 63세(2009년)다. 앞으로 10년 후의 교회 모습은 과연 어떻게 될까? 2020년까지 미국 성당의 4분의 1이 사제가 없는 공소로 변할 것이라고 한다.

이빨이 없으면 잇몸이 그 기능을 대신하는 법이다. 교리적으로는 보편사제직을 이야기하지만 평신도들은 그동안 교회 안에서 들러리에 불과했고, 기능상으로도 사제들의 허락과 지도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병신도”에 불과했다. 그러나 서구 유럽의 경우, 많은 성당들이 사제가 없는 공소로 변하면서 신자들 스스로 사목협의회를 통해 성당 운영과 말씀의 전례 등을 거행하면서 성당을 운영하는 것을 볼 수 있고, 평신도들이 신학 교육을 받아 종신부제나 선교사로서 교구 행정과 교회 운영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음을 목격하고 있다. 미국 로체스터 교구의 경우 이미 16개 성당들이 성당 운영책임자에 평신도(Lay pastoral administrator)를 임명하고, 사제는 전례와 성사 분야만을 전담하는 등 수평적이며 혁신적인 성당 운영체제를 도입하는 시기에 들어서고 있다.

아직 이런 이야기들이 중세기적 영광과 번영을 구가하고 있는 한국 가톨릭교회에는 먼 나라 이야기처럼 들리겠지만, 한번 변하기 시작하면 무엇이든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변하는 한국 사회라는 것을 교회 지도자들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문영석
강남대학교 국제지역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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