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시대, 평신도 교양 - 1]

먼 길을 떠나자는 결단을 내렸어도, 막상 첫걸음을 떼면 약간의 두려움이 든다. 앞으로 그 먼길을 어떻게 갈까. 혹시 내 결단은 만용이 아니었을까. 지금 필자의 심경이 그렇다. 무려 ‘12회 연재’를 ‘덜컥’ 수락하고, 한 주일 내내 후회하는 내 자신을 보고 있다. 아직 내 안에서 조차 이야기가 또렷이 정리되지 않았는데 왜 신중하지 않았을까.

돌이켜 보면, 무모한 결단은 한순간에 휩싸인 어떤 ‘바람’ 때문이었다. 먼저 그때의 마음과 기분을 설명하는 것이 순서일 듯하다.

‘평신도 신학’이라는 오래된 숙제

누구에게나 거절하거나 미룰 수 없는 것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니까 벌써 3년 전, 나는 평신도 신학자들과 함께 이따금 우리신학연구소(이하 우신연)에 둘러 앉아 ‘평신도 신학’에 대한 생각을 나누었다. 주로 평신도의 신앙 감각, 평신도 교회론, 평신도 영성 등이 한국적 맥락에서 토론되었다. 물론 교회 문헌도 함께 읽었다. 개인적 차원에서는, 마테오 리치도 즐겨 사용했다는 ‘기억술’의 경험처럼, 처음의 기억들이 되살아났다. 유학물을 빼내는 계기도 되었다. 하지만 그때 참가한 사람들 가운데 누구도 아직 그 토론을 세상에 내놓지 않았다.

그 때, 고 양한모 선생님의 <신도론>이 곧 30주년이 된다는 말이 나의 가슴을 깊이 짓눌렀다. <신도론>은 한국 가톨릭 신학에서 ‘평신도론’을 다룬 최초의 저서다. 사실 그 모임은 <신도론>의 30주년 기념으로 새 평신도론을 준비할 수 있는 참신한 기획이었고 귀한 초대였다. 당시 경동현 연구위원은 오래된 그 책을 보여주었다. 잘 보존된 그 사실 만으로 큰 웅변이었다. 소중히 간직하고 반드시 이어야 하는 전통임에 틀림이 없었다.

하지만 그 때 모인 동료 평신도 신학자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단행본 준비를 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각자 생업과 관련된 다양한 일거리로 바쁜 처지였다. 준비되는 사람부터 글을 내자고 했지만, 필자도 2012년을 그냥 보냈다. 그 결과 마음은 무거워져 갔다. 숙제를 하지 않고 잠드는 마음에는 죄의식이 섞여 있었다. 나는 도대체 무엇하는 사람인가 하는 자책감도 짙었다.

거의 같은 시기에 변진흥 선생님은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에 양한모 선생님과 관련된 글을 기고하셨다. (* 참조: 변진흥, “생활하는 신학 - ‘평신도 주교’ 양한모를 다시 생각한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2011. 11. 15) 시대정신을 공유하는 귀한 마음들은 무척 반가웠다. 하지만 그런 마음 곁에는 홀로 느껴도 될지 모를 압박감도 자리 잡고 있었다.

우신연 20주년의 해

2014년에 우신연은 20주년을 맞는다. 성대하게 스무 살 잔치를 치렀으면 좋겠지만, 이 가난한 평신도 신학 연구소의 기념일은 퍽 조촐할 것이다. 지금까지 그래왔듯, 교회 내에서 별다른 지원이나 관심이 있을 것 같지 않다. 변진흥 선생님의 표현을 빌자면 아직 평신도 신학은 시퍼런 시체를 쌓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평신도 신학의 깃발을 내걸고 여러 명의 가장들이 한국가톨릭교회에서 20년을 버텨낸 것은 기적 같은 일이다. 분명 대견하고 감사하고 축하할 일이다. 필자는 그 신산한 세월을 함께 하지 못한 미안한 마음이 있다. 동료 평신도 신학자마저 모르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나름의 얄팍한 염치도 조금 있었다.

교회 건물이 높게 치솟고 광대한 영토가 성지로 개발되는 중이지만, 한국가톨릭교회에서 이들이 몸을 뉘일 수 있도록 구유를 제공하는 여관은 매우 드물었다. 한데에 익숙해지면 성정이 모나고 거칠어지리라는 흔한 선입관을 극복하는 모습에서, 복음이 여전히 이들과 함께 하고 있음도 체험하고 있다.

하지만 필자는 이제 우신연 소속도 아니고 우신연의 구성원도 상당히 바뀌었기 때문에, 특별한 약속을 잡지 않으면 일 년 내내 우신연에 갈 일이 없다. 자주 보지 않고 구체적 사랑을 나누지 않으면 연대의식은 희미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경동현 소장의 진지한 제안에 더이상 저항할 수 없었다. 그래서 피할 수 없으면 담담히 맞닥뜨리면 된다는, 초보적이고 무모한 용기를 냈다. 더구나 『갈라진 시대의 기쁜 소식』이 새 단장하는 계기였다.

곁길: 신비로운 체험과 빈약한 준비

잠시 개인적인 체험을 말해야겠다. 우신연은 개인적으로 특별한 인연이 깃든 곳이다. 우신연이 첫걸음을 뗄 때, 필자는 평범한 대학원생이었다. 출범 당시 우신연은 평신도 신학 연구의 중심으로 상당한 기대를 모았고 가톨릭의 젊은 신학도는 열렬히 호응했다.

당시 우신연은 100만원을 내야 출자회원으로서 정회원의 자격을 주었다. 당시로서는 거금이라서 필자 같은 학생들은 대개 분납하겠다는 약정을 했고 필자도 그럴 심산이었다. 그런데 그때 필자 주위에서 참으로 신비로운 일이 일어났고, 필자는 가장 나이 어린 정회원이 될 수 있었다. 개신교 전통이 강한 필자의 외가와 얽힌 그 체험으로 말미암아 필자는 주님의 섭리 같은 것을 느꼈고, ‘이 길’에 대한 개인적 확신을 얻을 수 있었다. (그 이후에도 몇 가지 체험이 더 있었다.)

본론을 시작하기 전에 필자의 준비 상태를 솔직히 고백해야겠다. 필자는 현재 이 주제에 대해 학술논문을 쓸 정도로 준비되어 있지 않다. 아마 정밀한 논리를 제공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우선 가볍고 자유로운 에세이 형식으로 생각을 나누는 글이 더 나을 것 같다. 그러므로 이 글은 어떤 제안도 아니고 일관된 사상을 제시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아마 두서없이 허튼 주제를 이리저리 찔러보고 산만하게 끝낼 가능성이 크다.

다만 작은 독백을 통해 이러저런 생각을 나누다보면 주님께서 잘 이끌어주시고 익혀주시고 완성해 주실 것이라고 믿을 뿐이다. 일단 물꼬를 터놓으면 동료 신자들이 함께 할 것이라는 믿음도 있다. 때마침 2013년 <한겨레 신문>에 쓴 글에 생각을 조금 실었던 것이 이 글을 쓰는 또 하나의 밑받침이 되었다. 눈 밝은 독자라면 비슷한 구절을 어렵지 않게 찾아내실 수도 있을 것이다.

새 평신도론

이제 본론이다. 지난 2-3년간에 간헐적으로 필자는 새로운 평신도론의 특성을 생각해 보게 되었다. 몇 번의 짧은 토론과 발표회를 거쳐, 새로운 평신도론은 양한모 선생님의 평신도론과는 두 가지 점에서 다른 성격을 지녀야 한다고 감히 생각하게 되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첫째는 ‘존재론에서 기능론’으로 둘째는 ‘정체적 정체성에서 확산하는 유기체’로 그 성격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고 보인다.

한국 가톨릭의 시대 구분

현재 한국가톨릭교회는 ‘선교 300년대, 500만 신자 시대’를 살고 있다. 이 말의 의미를 잘 생각하기 위해서 잠시 역사를 돌아보자. 1784년 이승훈 베드로의 북경 세례 이후 시작된 한국가톨릭교회는 2014년이면 정확히 230년째가 된다. 1984년 200주년 행사의 열기를 넘어 300년대로 접어든지 30년이나 지났다. 현재 시점에서 과거의 시기를 대강 아래와 같이 나눠서 생각해 보았다.

- 박해시대: 1784-1886년의 102년
- 고난기: 1953년까지 67년
- 외형적 성장시대: 현재까지 61년

1886년 조불 통상 조약으로 신앙의 자유를 얻기 까지 102년의 박해를 받았으니, 우리 가톨릭교회의 200년이 넘는 역사는 박해와 순교로 거의 절반의 세월을 보낸 셈이다. 나머지 128년의 세월은 어떻게 보냈을까. 일제식민지시기를 거치고 한국 전쟁이 끝난 시기가 1953년이다. 신앙의 자유를 얻고 67년이 지난 셈이니, 나머지 절반의 세월도 힘겹게 보낸 것이다. 박해시대 이후 고난기를 합치면 무려 169년이나 된다. 고통을 주신 다음에 주님은 우리들의 몸집을 불려 주셨다. 그 이후 산업화와 민주화시기를 거치며 나름 ‘외형적 성장’의 시대를 성공적으로 보냈다.

과거에서 가장 긴 기간을 차지하는 박해와 고난의 시대는 한국 천주교가 순교자의 피로 세례 받은 시기요, 우리의 몸과 마음이 형성된 은총의 시기다. 물론 이 시기에 우리 한국 교회가 복음적으로 대응했는지를 살펴보면 그렇지 않은 국면도 제법 된다. 안타까운 역사를 되풀이하지 말자는 반성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 시기에 형성된 독특한 순교 신심은 그 자체가 큰 은총으로서 그 이후에 이어진 식민지 시대, 한국 전쟁, 민주화 시대 등을 통과하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 필자는 현재 가톨릭교회에 퍼지는 정의평화 운동이나 사회교리 학습 등도 박해시기에 형성된 순교 신심과 깊이 관련이 있고, 관련을 가져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에 대한 신학화 작업은 더딘 면이 있다.

속칭 산업화와 민주화시기를 거치며 한국가톨릭교회는 개신교와 함께 외형적으로 급격히 성장했다. 도시나 시골에서 십자가를 보는 일은 흔해졌고, 주위에 예수를 믿는 사람도 많다. 외형적 성장 시기가 한국 전쟁이 끝난 이후 61년간 이루어졌지만 실제로는 60년대 이후에 이루어졌음을 상기한다면, 실질적으로 겨우 50여년 만에 이룬 성과다. 수천 년 민족사를 되돌아본다면 그리스도교는 찰나의 기간에 급격히 성장한 것이다. ‘폭발적’ 성장이란 표현이 잘 어울린다. 그동안 학교, 병원, 각종 시설 등을 참 많이도 지었고, 신자수는 500만 명을 넘었다.

고속 성장 시대의 급속한 종말

그리고 역시 매우 빠르게 외형적 정체기가 시작된 것 같다. 무엇보다 신자 증가율이 과거 같지 않다. 비교적 높은 냉담율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고, 인구의 감소와 함께 젊은 신자들의 비율도 낮아졌다. 성소자는 양적으로 수준을 유지할 뿐, 질적 하락이 시작되었다. 가톨릭이나 개신교나 가릴 것 없이 신학대학의 수준은 더 이상 높지 않다. 서구의 경험을 보면, 질적 하락은 결국 양적 축소로 이어진다. 쉽게 말해 성적이 높은 학생이 덜 지원하니 입학 점수를 낮추다가 결국 그마저도 여의치 않은 상황이 온다는 뜻이다.

교회의 외형적 정체는 경제적 풍요와 함께 찾아오는 반갑지 않은 손님이라는 서구의 경험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래도 아직은 조금 성장한다.’는 강변은 자기위안에 가까워 보인다. 오히려 문 앞에서 노크하고 있는 정체기라는 낯선 순례자를 어떻게 모셔야 할 것인지 생각해야 할 때인 듯이다.

평신도론의 차이

이런 상황의 차이가 평신도론의 다른 성격을 강제한다. 돌아보면 고 양한모 선생의 <신도론>은 1982년에 나왔으니 외형적 고속 성장의 한복판에서 쓰였다. 핵심 내용은 평신도의 정통성을 주장하는 것이었다. 결국 ‘우리가 교회다’는 선언과 맥을 같이 한다. 외형적으로 하루가 다르게 자라나는 시대에는 평신도의 신학적 정체성을 기술하는 것만으로도 역동성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어찌 보면 고속성장 자체가 교회에 활력을 불어 넣던 시대라고 해도 될 것이다.

하지만 정체기의 목전에 선 지금은 크게 성장한 몸을 어떻게 놀려야 할지 고민해야 한다. 정체성에서 역할로 관심을 조금 옮겨야 할 것이다. 더 이상 ‘우리가 교회다’라고 외쳐봐야 울림과 반향이 별로 크지 않을 것이고, 그 대신 우리가 할 역할을 고민해야 할 것이다.

정체성은 ‘우리의 얼굴이 무엇인가’에 대한 답이다. 새 기능론은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고 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이다. 정체성은 단일하고 제한된 답을 요구한다. 정체성이 여럿이면 다중인격자다. 하지만 기능론은 맥락에 따라 다면적이고 다층적인 쓰임새를 지칭하는 말이다. 우리는 때와 상황에 따라 여러 가지 역할을 하면서 살지 않는가.

쓰임새를 넓히려면 교리를 잘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해 보인다. 교리와 함께 신자로서 마땅히 알고 살아야 할 상식, 교양, 문화 등을 함께 생각해야 할 것이다.

이제 막 본론이 시작되려는데 마쳐야 하겠다. 다음에 조금 더 어수선하게 찔러 보겠다.


 
주원준
우리신학연구소 연구위원이며 한님성서연구소의 수석연구원으로 독일에서 구약학과 고대 근동학을 공부했다. 결혼한 지 채 3년이 지나지 않은 공식 신혼생활 중이다. ‘평신도 신학자’라 불리는 걸 가장 행복해하는 한 아이의 아빠이다.

<기사 제휴 / 갈라진 시대의 기쁜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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