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민아의 일상과 신비 - 9]

참 오랜만에 고향의 겨울을 걷습니다. 13년만입니다. 그간 1년 혹은 2년에 한번씩은 꼭 다녀가곤 했지만 삼복을 낀 한여름에만 시간을 낼 수 있었습니다. 고향의 겨울이 얼마나 그리웠던지요. 추운 날씨에도 늘 붐비던 명동 거리, 하얀 입김을 내뿜으며 종종걸음을 재촉하던 덕수궁 길, 불빛 따뜻한 낯익은 찻집들이 늘어서 있는 인사동 골목……. 겨울에 만들었던 추억들은 기쁘거나 슬프거나 유난히 마음에 깊게 남아 있습니다. 추워서 더 사람의 온기가 그립고, 쓸쓸하여 더 사람의 정리가 애틋하니 이 계절이 남긴 이야기들도 쉽사리 잊히지 않나 봅니다.

이번 고향 방문이 제게 특별한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이번에 저는 혼자 온 것이 아니라 미국인 학생들 열여덟 명과 함께 왔습니다. 제가 가르치는 대학(University of St. Catherine, St. Paul, MN)에는 ‘지구화 시대, 정의를 찾아서’(Global Search for Justice)라는 교양 필수 과목이 있습니다. 전공과 무관하게 모든 학생이 들어야 하는 과목으로, 해외에 나가 3주간 수업과 여행을 병행하며 자신의 문화와 다른 문화를 경험하고, 자신의 생각과 다른 의견을 들어 본다는 취지로 마련된 수업이지요.

인도, 콩고, 스페인, 멕시코 등 기존의 여러 선택 국가들이 있지만 이번 학기에 처음으로 한국에 관한 코스를 개설해 동료 교수 한 사람과 팀티칭을 하게 되었는데, 처음 개설한 과목 치고는 호응도가 높아 꽤 많은 학생들이 지원했습니다. 그 중 선발된 학생들 열여덟 명은 열한 명의 몽(Hmong) 아메리칸, 네 명의 코캐시언(Caucasian) 아메리칸, 두 명의 히스패닉(Hispanic)/치카나(Chicana) 아메리칸, 한 명의 티베탄(Tibetan) 아메리칸으로, 저마다 다양한 역사 · 문화적 배경을 갖고 있습니다.

▲ 수요시위 가기 전 ‘전쟁과 여성인권 박물관’ 앞에서 (사진 제공 / 조민아)

20대 초반의 이 젊은 여성들과 함께 22년째 계속되고 있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수요시위 현장을, 전쟁과 여성인권 박물관을, 광주 5.18 민주묘지를, 오월길을, 제주 4.3 평화공원을, 강정마을을 찾았습니다. 물론 역사의 현장을 찾아가는 구비구비마다 우리 산천과 문화의 아름다움에 흠뻑 취하기도 했지요. 담양과 순창을 둘러보며 남도 문화와 음식을 맛보았고, 제주에서는 새벽 같이 성산일출봉에 올랐고, 늦은 오후 사려니 숲길도 걸었습니다. 용인의 화운사에서는 젊은 비구니 스님들과 또 우리 수녀님 한 분과 함께 3박4일 템플스테이를 하며 다도명상, 108배, 발우공양을 익히고 이웃종교에 대한 배움의 시간을 갖기도 했지요.

작년 봄부터 꾸준하게 수업을 기획하고 준비해 왔지만, 막상 학생들을 데리고 한국에 오기 전까지 저는 3주간의 수업이 만들어 낼 효과에 대해 반신반의하고 있었습니다. 워낙 소심하기도 한데다 긴 타향살이의 불안정성이 빚어낸 내성이 덧붙여져, 언제부터인가 눈으로 보지 않고 머리로 계산이 되지 않으면 잘 믿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 버린 까닭입니다. 숱한 질문들을 스스로에게 던졌지요. K-Pop과 드라마를 통해 한국을 알게 된 미국인 학생들이 “위안부” 할머님들의 역사와, 광주와 제주의 상처와, 강정의 오늘을 보면 무슨 생각을 할까? 먼 이 땅의 역사와 자신들의 삶이 만나는 교차로를 과연 찾아낼 수 있을까? 이 짧은 여행이 이들의 삶에 과연 어떤 기억으로 남을까?

제 걱정은 기우였습니다. 학생들은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빨리 마음을 열었습니다. 수요시위에 참가하여 “위안부” 할머님들의 삶에 함께 울었고, 5.18 민주묘지에서는 끝없이 펼쳐져 있는 광주 영령들과 민주화 열사들의 묘역을 보며 군부독재와 민주주의에 관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오월길을 함께 걸으면서는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 본 장면들을 떠올리며 여기저기 사진을 찍고 진지한 얼굴로 생각에 잠기기도 했지요.

광주에서 결합한 한국 대학생들과는 함께 섞여 몇 개의 그룹으로 나뉘어, 저마다 자신들의 가족사 중 아시아, 미국의 근현대사와 연관되는 부분의 이야기들을 공유하며 서로의 이야기가 만나는 연결고리를 찾아 시각화하는 과제를 진행했는데, 전쟁과 폭력의 역사가 만들어낸 상처가 그렇게 밀접하게 서로의 삶을 연결하고 있다는 것에 새삼 놀라기도 했습니다. 또 제주에서는 4.3의 비극이 아직도 유령처럼 남아 그 아름다운 평화의 섬을 뒤덮고 있다는 것과 해군기지 건설이란 오늘의 폭력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에 안타까워하고 분노했지요. 강정의 생명평화 미사를 함께 드리거나 지켜보고는 강정 지킴이들과 신부님들, 수사님들, 수녀님들과 어우러져 ‘강정마을 4종 댄스’도 신나고 멋들어지게 추기도 했습니다.

제주에서 서울로 돌아와 가진 토론 시간에 우리는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었습니다. 학생들은 어느새 이 땅의 역사와 자신들의 역사를 연결하여 생각하며 몽 아메리칸으로서, 코캐시언 아메리칸으로서, 히스패닉/치카나 아메리칸으로서, 티베탄 아메리칸으로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고민하고, 미국에 돌아가 할 수 있는 일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세계 최고의 권력국가인 미국의 시민으로서 자신들이 갖고 있는 책임감에 대해서도 의견을 나누었지요. 자본과 권력이 보여주는 화려한 외관에 대해 비판적 시각을 잃지 말아야 할 것과, 전쟁은 결국 모두의 삶을 망가뜨릴 뿐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모두들 공감했습니다. 앞으로 이 젊은 여성들은 이 땅을 다시 찾을 기회가 없을지도 모르지만, 이들이 살아가면서 꿈꾸고 만들어 갈 정의와 평화에는 언제나 “위안부” 할머님들, 광주, 그리고 제주에 대한 기억이 따라다닐 것이란 생각을 하니 제게도 책임감이 새롭습니다.

▲ 제주도 강정마을에서 문정현 신부님, 강정 지킴이들과 함께 (사진 제공 / 조민아)

학생들과 함께 여행하고 토론하며 새삼 깨달았습니다. 사람들에 대한 희망과 믿음을 잃지 않는 것이 얼마나 세상을 살 만하게 만드는 것인지를요. 그 “사람들” 가운데는 모든 일정마다 순전하게 마음을 열고 스스로 도전하며 한 사람도 낙오되지 않은 채 가볍지 않은 일정을 소화해 온 우리 학생들도 있지만, 상처가 된 역사의 현장마다 오롯이 그 자리를 지키며 깊이 파인 흉터를 기억으로, 기억을 교육으로, 교육을 삶으로 살아내고 계시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흩어져 있을 때는 눈에 띄지 않고 가늠할 수 없는 그 힘을, 그러나 정의와 평화를 향한 길목에서 만날 때 비로소 드러나는 그 힘을, 거세고 뜨겁고 또 민첩하게 마음을 움직이는 그 힘을, 저는 이번 여행을 통해 다시 경험했습니다.

이제 여행을 마무리하고 학생들과 함께 다시 미국으로 돌아갈 채비를 합니다. 그러면서 희망에 대해 다시 생각합니다. 희망은 우리의 삶과 연속적인 동시에 불연속적이지요. 희망은 우리가 원하고 바라는 것이 가리키는 어떤 지점이지만, 희망이란 그 자체는 영원히 우리 손에 잡히지 않는 아스라한 것입니다. 손에 잡히는 그 순간, 희망은 이미 희망이 아닌 다른 어떤 것이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희망을 감지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 여정뿐이지요. 한 길을 걷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 서로의 꿈을 나눌 때 희망은 가장 가까이 있습니다. 그리고 희망으로 만들어가는 이야기들의 온기는 세상이 척박하고 춥고 어두울 때, 더 깊고 따뜻하게 가슴에 남을 것입니다. 겨울이 남긴 이야기들이 더 깊고 따뜻하게 기억되듯 말입니다. 제 학생들의 기억에도 2014년 겨울의 한국은 따뜻하게 기억될 것입니다.
 

 
 

조민아
미국 미네소타의 세인트 캐서린 대학교에서 신학과 영성을 가르치고 있다. 제도교회와 신앙인의 삶 사이에서 발생하는 작고 큰 움직임, 갈등, 투쟁, 타협, 화해와 그 과정에서 새롭게 탄생하는 언어와 상징에 관심이 많다. “지금”, “여기”에서 할 수 있는 역할이 무엇인가 늘 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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