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방신학>이라는 책으로 처음 한국에 알려진 구티에레스는 신앙교리성 장관인 뮐러 추기경과 2004년 <가난한 이들의 편에 서서 : 해방신학>이라는 책을 출간한 바 있다. 그는 해방신학이 신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소개했다.
아르헨티나 출신의 교황이 선출되고, 그 교황이 교황청 신앙교리성 장관에 해방신학자 구티에레스와 친분이 두터운 루드비히 뮐러 대주교를 임명하고, 지난 12일 그를 추기경에 서임하면서 해방신학이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시절에 신앙교리성은 다른 이단사상과 아울러 해방신학을 단속하는 위치에 있었고, 당시 신앙교리성 장관이었던 라칭거 추기경이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되면서 해방신학은 ‘위기’를 경험했다.

“해방신학이 교황청에 의해 단죄되었다”는 말이 돌면서, 한국 교회에서 보수적 입장에 서 있던 이들은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등 민주화와 인권을 위해 투신하는 사제들을 ‘해방신학에 오염된 이단자’로 매도했다. 최근 ‘박근혜 정부 사수’를 외치는 대한민국수호천주교인모임 역시 해방신학과 정의구현사제단을 같은 반열로 취급하면서 “정치사제들은 교회를 떠나라”는 구호를 만들었다. 그러나 이는 해방신학에 대한 심각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등장으로 해방신학에 대한 이러한 오해는 말끔히 청산된 듯하다. 교황청의 해방신학에 관한 문헌은 크게 두 가지다. 1984년 신앙교리성에서 발표한 <자유의 전갈―해방신학의 일부 측면에 관한 훈령>과 1986년에 발표된 <자유의 자각―그리스도인의 자유와 해방에 관한 훈령>이다.

신앙교리성 훈령 <자유의 전갈> 1항은 “해방을 향한 민중들의 강력하고도 억누를 수 없는 열망은, 교회가 면밀히 탐구하고 복음의 빛으로 해명해 주어야 하는, 주요한 시대의 징표들 가운데 하나를 이루고 있다”고 말한다. 다만 해방신학자들이 마르크스주의의 개념을 무비판적으로 사용함으로써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이 일탈될 위험성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경고가 “결코 진정한 복음정신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최우선의 선택’에 헌신적으로 응답하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에 대한 비난으로 해석되거나, 비참하고 절박한 인간불행과 불의에 직면해 무관심하거나 애매한 태도를 지키는 자들을 위한 핑계로 이용되어서는 절대로 안 된다”고 말한다.

더욱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2년 동안 라틴아메리카 주교들과 많은 토론을 거친 뒤에 브라질 주교에게 편지를 보내 해방신학이 깊은 신학적 숙고 가운데 ‘새로운 무대’를 열었으며, ‘시의적절하고 유용한 신학’이라고 밝혔다. 그 결론이 두 번째 신앙교리성 훈령인 <자유의 자각>에 실렸다. 이 훈령은 ‘가난한 이를 선호하는 사랑’을 통해 ‘교회의 해방 사명’을 잘 드러낸다.

“억압을 당하고 자유를 갈망하는 이 시대 인간의 고뇌에 응답하고자 하는 교회의 결의는 확고하다. 사회의 정치적 경제적 운영은 교회의 직접적인 사명은 아니다. 그러나 주 예수께서는 양심을 밝혀줄 수 있는 진리의 말씀을 교회에 맡기셨다. 교회의 생명인 하느님의 사랑이 고통받는 모든 사람들과 더불어 진정한 연대를 이루라고 교회를 재촉한다. 교회의 구성원들이 이러한 사명에 충실할 때에, 자유의 근원이신 성령께서는 그들 안에 머무르실 것이고, 그들은 자기 가정에서 그리고 자기가 일하고 살아가는 모든 곳에서 정의와 평화의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61항)

그러나 교황청의 훈령보다 더 장엄한 것은 라틴아메리카 주교단이 내놓은 두 개의 문헌이다. 1968년 제2차 라틴아메리카 주교단 총회의 <메데인 문헌>과 제3차 총회의 <푸에블라 문헌>이다. 교황 바오로 6세가 1967년에 발표한 회칙 <민족들의 발전>에 대한 응답으로 열린 주교단 총회에서 발표한 <메데인 문헌>은 문헌의 구조상 혁신적인 태도를 보여주었다.

1부 ‘인간 발전의 촉진’에서는 정의, 평화, 가정과 인구 문제, 교육, 청년을 순서대로 다룬다. 2부 ‘복음선교와 신앙의 성장’은 민중사목, 엘리트사목, 교리교육, 전례를 다루고, 교회 구조와 관련한 3부에서는 제일 먼저 평신도를 다루고, 이어 사제, 수도자, 성직자 양성, 교회의 가난, 연대사목, 사회홍보수단을 다루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주교들의 관심이 어디에 머물고 있는지 주목할 수 있다. “정의”, “민중사목”, “평신도”가 새롭게 주목받았다.

“라틴아메리카는 변혁 과정에 있는 공동체”라는 게 주교들의 생각이다. 여기서 한국 교회는 “변혁 과정”에 있는지 점검할 필요가 있다. 쇄신이 없는 교회는 썩기 마련이며, 키에르케고르가 지적한대로 ‘번듯한 노신사의 교회’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주교들은 “교계, 성직자, 수도자가 부자이고 부자와 결탁해 있다는 불평”을 듣는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가난한 사람을 사랑하셨을 뿐 아니라, 부유하시면서 가난해지셨고, 가난 속에서 생활하셨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시는 일에 당신 사명을 집중하셨으며, 당신 교회를 사람들 사이에 가난의 표지로 세우셨다”고 선언했다. 그래서 “사제의 직무와 생활에 관한 교령에 따라 가난한 사람과 더불어 살아가면서 그리고 자기 손으로 노동하면서, 가난한 사람들의 운명을 함께 나누도록 부르심을 받았다고 느끼는 사제를 격려한다”고 전했다.

라틴아메리카 주교단이 발표한 문헌들을 읽으면, 곳곳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의 음성이 들린다. 그가 왜 그토록 ‘가난한 이들’과 ‘가난한 교회’와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을 강조하고 있는지 납득하게 된다. 교회는 가난한 그리스도가 가난한 이들을 제자 삼아서 건설한 신앙공동체였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깊은 연민에서 우리는 신앙인의 정체성을 발견한다. 그 신앙은 ‘고통 속에서’ 발견한 희망이며, 불의와 폭력에 노출된 인간들과 맺는 연대 속에서 얻는 기쁨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열었던 교황 요한 23세의 시성식이 얼마 남지 않았고, 1980년 군사 독재정권에 의해 암살당한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의 시복 절차도 현재 진행 중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권고 <복음의 기쁨>에서 “문 밖에서 백성들이 굶주릴 때, 예수께선 끊임없이 ‘어서 저들에게 먹을 것을 내어주라’고 가르치셨다”면서 “안온한 성전 안에만 머무는 고립된 교회가 아니라 거리로 뛰쳐나가 멍들고 상처받고 더러워진 교회를 원한다”고 말했다.

우리 시대 역시 한국 교회에서도 ‘의인’이 필요하고, ‘성인’이 필요하다. 사실상 모든 신학은 ‘해방적’이어야 한다. 우리의 하느님은 히브리 노예들을 해방시키신 분이기 때문이다. 그분에 대한 학문이 ‘신학’이라고 할 때,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예처럼 사는 이들에게도 ‘해방’의 메시지를 전달하지 못한다면, 이미 신학이 아니다. 교황도 “하느님은 모든 형태의 노예적 삶에서 해방되기를 원하신다”고 하지 않았던가. 이제 해방신학은 한 대륙의 신학이 아니라, 우리에게도 해방의 전갈로 다가온다. 최근에 염수정 추기경이 서임 후 첫 방문지로 노숙인 요양시설을 선택했다고 한다. 이게 단순한 제스처가 아니라, 가난한 이들을 향한 근본적 회심의 첫걸음이 되기를 기대한다.


한상봉
(이시도로)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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