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경 신부의 내 자랄적에 ⑦- 열한 살 때 (1950년)

 

우리식구가 끼인 피난 행렬은, 안동-의성-군위를 거쳐 군위와 다부 사이 신작로 옆에 작은 연못이 있던 어느 마을에 닿았어. 이곳에서 하룻밤 묵어가기로 했지. 이곳까지 오는데 몇 날 며칠이나 걸렸는지 알 수도 없고 또 관심도 없었어. 가져간 쌀이 떨어진지 벌써 여러 날이어서, 이곳까지 오다가 해가 지는 마을에서 가장 먼저 한 일도, 빈 집을 돌며 뭐든 양식이 될만한 것을 찾는 일이었으니까. 지고 온 배낭 쌀이 없어서 형이나 나나 짐이 가벼워져서 속으로는 좋다 했을 거야, 철도 없이! 피난 행렬 중에 더러 딴 길로 빠지는 사람도 있었고, 피난 물결에 새로 합류하는 사람도 있었지.

그 마을에서 가장 큰 빈 기와집을 차지하고, 할머니와 아홉 살 여동생은 그 집 곳간에 조금 남아있던 겉보리 를 두 되쯤 찾아내어 절구질을 하는 사이, 형과 나는 똥덩어리가 둥둥 떠다니는 그 마을 연못에서, 바글바글대는 아이들 틈새에서 발가락으로 올방개(곁은 까맣고 속은 흰 손톱만한 덩이뿌리)를 따먹으며 멱을 감았지.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하자, 그 고래등 같은 우리(!)집으로 돌아가니까, 할머니께서 ‘집안을 뒤져 동강 초를 찾아보라’고 하셨어. 불을 켜기 위해서였지. 큰 집에 걸맞는 커다란 옷장이니 이불장이니 장롱이니 샅샅이 뒤졌으나, 찾는 초는 없고 설합마다 칼로 잘라낸 빨래비누 동강뿐이었어. 빨래비누 공장 집인가! 그런데 그 큰 집에 헌 옷가지 하나 없었어. 몽땅 싸 간 거야. 나중 생각이지만, 부잣집이니까 일찌감치 속 살림을 몽땅 차에 싣고 피난 갔겠지.

어둑어둑해서 식구 다섯은 대청마루에 앉아 아홉 살 여동생이 지은 꽁보리밥을 소금반찬으로 먹고 있는데, 그때 군인들이 총을 들고 대문을 들어서는 게 어렴풋이 보였어. 그들이 가까이 다가오자 우리는 깜짝 놀랐어. 군복도 총도 국방군과 달랐기 때문이었지. 낮에 멱을 감을 때만 해도, 국방군 몇이 동네 닭을 강제로 뺏어가는 것을 보았거든. 그들의 모습을 보니, 철모가 아니라 천으로 만든 모자이고, 그 모자와 윗옷에 여기 저기 나뭇가지를 꽂고 있었고, 어깨에 멘 총의 탄창도 뱀이 똬리를 튼 모양의 탄창이었는데, 머지않아 알게 되었지만, 그 총은 소련제 따발총이었어.

온 몸이 얼어붙은 우리에게 그 중 하나가 공손히 인사를 하며, ‘걱정 마시라요. 우린 인민군입네다. 한가지 여쭈어보갔습네다. 이 집에 먹던 입쌀이 있습네까?’ 할머니는 ‘우린 피난민인데요, 아까 이 집 곳간을 뒤져 겉보리 두 되 정도를 찾았어요. 쌀은 못 봤는데, 직접 한 번 찾아보시지요.’ 둘은 쌀을 찾을듯 곳간을 향하다가, 갑자기 돌아서서 ‘안심하고 식사하시라요’하며 꾸벅 인사를 하고 나가버렸지.

아무 말 없이 식사가 끝나자, 할머니는 말씀하셨어. ‘이젠 남쪽으로 피난을 더 갈 수 없게 되었다. 더 내려가면 전쟁터야. 내일 아침에는 죽으나 사나 영주로 돌아가자! 우리집 가장이신 할머니의 판단은 옳았어. 훨씬 나중에 안 일이지만, 대구쪽으로 좀 더 내려가면 ’다부‘라는 곳인데, 우리가 그 마을에 있던 직후에 그곳에서 국방군과 인민군 사이의 전투가 굉장히 치열했다는 거야. 국방군 인민군 가릴 것 없이 무척 많이 죽었대. 대구를 뺐느냐 지키느냐가 다부전투의 승패에 달려있었기 때문이었겠지.

이튿날 아침 일찍 우리가족은, 남으로 향하던 발길을 돌려 북으로 향하게 된 거야. 피난길이 아니라 귀향길(!)이었지. 한가지 이상한 것은, 그렇게 북적대던 피난민들이 갑자기 어디로 사라졌는지, 내 기억에는 우리가족만의 귀향이었던 것 같아. 아무튼 우리가족은 할머니의 민첩한 결단으로 남보다 일찍 귀향길에 오른 거야. 나중 생각이지만, 할머니가 인민군을 무서워하시지 않고 귀향을 결행한 것은, 아마도 사회주의자였던 아버지 배경을 믿었기 때문일지 모르겠어.

귀향길은, 느닷없이 나타나는 미군 쌕쌕이(제트기)를 피하는 일이고, 굶어죽지 않기 위해 양식이 될만한 것을 찾아 헤매는 일이었지. 그게 지상과제였어. 빈 집을 찾아 혹시라도 남아있을 곡식 찌끼기를 찾거나, 쇠비름따위 들나물을 뜯거나 덜 익은 과일 따위를 따 먹는 일인데, 귤보다 작은 덜 익은 사과를 삶아먹기도 했지. 그러니까 생존을 위해 하늘에는 쌕쌕이를 피해야 했고, 땅에서는 먹을거리를 찾아야 했어.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가 아니었지!

하루는 인민군 병사 하나가 뭘 실은 소달구지를 끌고 우리 옆을 지나가는 것 보고 깜짝 놀랐어. 기름이 잘잘 흐르는 하얀 이밥을 여자 속바지(70년대까지 우리나라 대부분의 여자들이 속곳과 치마 사이에 입던 바지)에 넘치게 넣어 실었더라구. 바지 윗쪽은 말기끈으로 바지 아래 끝부분은 새끼로 묶고, 대소변을 위해 터놓고 여미게 되어있는 곳으로 이밥을 넣었는데, 너무 많이 넣어 여미는 부분이 벌어져 있고 탐스런 이밥이 고봉으로 드러나 있었어. 할머니는 소달구지가 지나간 후 작은 소리로 ‘별꼴 다 보겠네’라고 하셨지만, 어린 우리 남매들은 ‘이밥 실컷 먹어봤으면 좋겠다’라고 했지.

 

 

 

 

 

 

 

정호경/ 신부,  안동교구 사제이며, 현재 경북 봉화군 비나리에 살며 밭작물과 매실나무를 가꾸고,  책을 읽거나 나무판각과 글을 쓰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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