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오늘을 말한다 - 31]

얼마 전에 교황 프란치스코께서 전세계의 교우와 사제와 주교에게 권고한 내용(교황 권고 <복음의 기쁨> 191항)을 먼저 인용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곳에서, 모든 상황에서, 모든 그리스도인을 목자의 도움을 받아 가난한 사람의 부르짖는 소리를 들을 사람으로 부르셨습니다. 브라질의 주교들은 이를 훌륭하게 밝혔습니다. ‘우리는 매일 브라질 백성의 기쁨과 희망, 고생과 슬픔을 (우리의 짐으로) 짊어지고 싶습니다. 특히 땅과 집이 없고, 음식이 없고, 건강 관리가 이루어지지 않는 시골과 도시의 특정지역에서 그들의 권리를 희생시켜가며 살고 있는 사람들의 기쁨과 희망, 고생과 슬픔을 말입니다. 그들의 빈곤을 보고, 그들의 부르짖는 소리를 듣고, 그들의 고통을 알고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치욕을 안겨줍니다. 왜냐하면 식량은 모든 사람을 위해 충분하다는 것과, 굶주림은 재화와 소득의 잘못된 분배의 결과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반화된 낭비와 사치로 이 문제는 더욱 악화됩니다.’”

교회는 연중 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사람으로 치면 일상의 시기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의 일상의 삶을 성찰하게 하는 지난 한 주간의 복음 말씀은 그다지 평범하지 않습니다. 독자께서 지난 월요일(1월 13일)부터 토요일(18일)까지 미사에서 선포한 주님의 말씀(마르코 복음의 초반부)을 직접 읽어보시면 금세 알 수 있습니다.

세례를 받으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교황님도 아니고, 사도들도 아니며, 그리스도인도 아닙니다)께서 활동하시는 내용을 전하는데, 세례를 받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는 그 내용이 범상치 않습니다. 세례를 받아 하느님 은총의 사람이 되었다면, 그 삶이 축복이고, 삶에 대박 혹은 대박의 전조쯤은 나타나야 하는데, 예수님은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당신 백성의 ‘고생과 슬픔’을 주저하지 않고 짊어지셨습니다. 월요일에는 당신과 함께 그 짐을 짊어질 제자들을 초대합니다(마르 1,17-18 참조). 화요일에는 ‘더러운 영’을 쫓아내시고 대신 그 사람을 해방하십니다(1,26 참조). 수요일에는 ‘시몬의 장모’,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주시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셨습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복음을 선포하고 마귀들을 쫓아내는 일’이 당신이 해야 할 일이라고 제자들에게 분명히 밝히십니다(1,30-39 참조). 목요일에는 ‘나병 환자’를(1,40 참조), 금요일에는 ‘중풍 병자’를(2,3 참조) 고쳐주십니다. 토요일에는 ‘많은 세리와 죄인’과 자리를 함께하십니다. 매일 어김없이 많은 군중이, ‘이런 이들이’(2,15 참조) 그분 주위에 모입니다.

지난 한 주간, 예수님의 삶은 ‘대박’의 삶도, ‘축복’의 삶도, ‘은총’의 삶도 아닙니다. 적어도 ‘낭비’와 ‘사치’가 행복과 성공의 표지가 된 이 시대 우리의 눈에는 말입니다. 오히려 ‘쪽박’의 삶이며, ‘고생’의 삶이며, ‘슬픔’의 삶일 뿐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를 ‘그리스도의 성사’, ‘하느님의 백성’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그 하느님의 백성, 성사로서 거룩한 교회는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 가운데에서 자기 창립자의 가난하고 고통받는 모습을 알아보고, 그들의 궁핍을 덜어 주도록 노력하며, 그들 안에서 그리스도를 섬기고자 한다”(교회헌장 8항)고 고백합니다. 그래서 교회의 생활 가운데 으뜸을 ‘가난한 이를 위한 우선적 선택’이라고 명백히 밝힙니다.

우리 현실과 관련해서 두 가지 정도를 생각하며 함께 성찰하고 싶습니다. 첫째는 ‘가난’에 대한 것이고, 둘째는 ‘우선적 선택’에 대한 것입니다.

‘가난’에 대하여

1. 가난은 단순히 경제적 의미의 ‘가난’인가? 정치, 사회, 문화, 교육 등 사회생활의 모든 분야와 경제적 가난은 아무런 관련도 없는 것인가? 혹시 우리는 ‘가난’을 경제적 빈곤 정도로만 제한하려는 것은 아닌가?

2. 그래서 가난을 운, 팔자, 운명, 혹은 게으름과 무능함의 결과로 보려는 것은 아닌가? 만일 경제적 가난과 앞의 사회생활 전 분야의 힘(권력)의 상호관계를 인정할 수 있다면, ‘사회구조적’ 차원에서 가난의 원인을 찾아야 하는 것은 아닌가?

3. 가난의 원인을 개인에게서만 찾는다면 그를 돕는 것은 따뜻한 마음의 시혜일 것이고, 그 원인을 불의 혹은 부조리한 사회구조에서 찾는다면 그를 돕는 것은 부조리한 구조의 개선을 위한 활동, 곧 정의의 요구가 될 것이다. 우리는 어떤 태도를 취하는가? 이 두 태도를 대립시킬 필요는 없지만, 그 가운데 하나만 선택하려는 것은 아닌가?

4. 이 가난에 대해서 성경은 어떻게 이해할까? 분명한 것은 성경은 ‘가난’을 개인의 허물이나 불운의 탓으로 여기기보다는 불의의 희생으로 본다는 점이다.

‘우선적 선택’에 대하여

1. ‘선택’이라는 말이 주는 분위기 때문에, 우리는 말 그대로 ‘선택’으로 여기는 것이 아닌가? 다시 말해,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그런 어떤 행위로 간주함으로써, 개인의 취향이나 성향, 처지나 임무에 따라 가변적인 것, 곧 개인적인 것으로 여기는 것은 아닌가?

2. ‘우선적’이라는 말이 ‘선택’이라는 말과 결합함으로써, 분위기는 더 개인적인 성향으로 강화되는 것은 아닌가? 그래서 결국 ‘우선적으로 선택’하는 사람과 활동, 그렇지 않은 사람과 활동이 태연하게 공존하게 된 것이 아닐까? 그리고 편한 쪽으로 기우는 개인과 집단의 성향이 자연스럽게 대세를 이루게 된 것은 아닐까?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아무리 깊이 있게 성찰하더라도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마태 25,40)이라는 말씀과 “너희가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마태 25,45)이라는 말씀, 곧 심판(교회 활동의 평가, 그리스도인 삶의 평가)의 기준은 단순 명료하다는 점입니다. 첫째, 가장 작은 이들을 당신의 형제로 받아들이셨다는 것, 둘째, 그들에게 해 준 것이 곧 당신께 해 준 것이며, 셋째, ‘해 준 것’은 마음에만 머문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행동이었다는 것입니다.

지난 한 주간 미사 때 들은 복음 말씀에서 볼 수 있듯이, 예수님께서 만나고 손을 잡고 일으켜 세운 사람들이 그렇게 “가장 작은 이들”이었다는 것은 하나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적어도 그분에게는……. 당신의 형제였으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그분의 삶이 점점 불편하게 여겨지는 것은 아닌지요? ‘가난한 교회’와 ‘가난한 이를 위한 교회’라는 용어가 점점 불편하게 들리는 것은 아닌지요? 그래서 사회적 약자의 고통을 외면하고, 그들의 부르짖는 소리에 귀를 막고, 그들이 내미는 동행의 손길을 뿌리치고, 그들을 고통과 슬픔으로 내모는 ‘죄의 구조’에 침묵하며, 대신 ‘사치’와 ‘낭비’를 행복의 표지로 삼아 동경하는 것은 아닌지요?

“자기 품에 죄인들을 안고 있어 거룩하면서도 언제나 정화되어야 하는 교회는 끊임없이 참회와 쇄신을 추구한다.” (교회헌장 8항)


박동호 신부 (안드레아)
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신정동성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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