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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월 20일에 시계 멈춘 참사 공화국[용산참사 5년, 지금은 - 1] ‘용산 신부’ 이강서와 ‘용산 며느리’ 정영신 이야기

   
▲ 이강서 신부(왼쪽)와 정영신 씨가 공터로 남아있는 용산 남일당 터를 찾았다. ⓒ문양효숙 기자

칼바람이 불던 광화문 광장에서의 1인 시위를 마친 이강서 신부(서울대교구 삼양동 선교본당)와 점심식사를 하러 간 정영신 씨는 얼마 안 되는 자장면 한 그릇을 반도 먹지 못했다.

“이맘때가 되면 소화도 안 되고 잠도 잘 못 자고 그래요.”

1월 20일이 가까워지는 때였다. 정영신 씨는 5년 전 1월 20일, 용산참사로 시아버지를 잃었다. 그날, 영신 씨의 시아버지는 용산재개발4구역 강제 철거에 반대하며 남일당 건물 망루에 올랐다. 경찰의 강제 진압 도중 화재가 일어났고 철거민 5명과 경찰 1명이 목숨을 잃었다. 영신 씨의 남편인 이충연 씨는 농성을 주도한 혐의로 징역 5년 4개월을 선고받고 수감됐다가 대통령 특별사면으로 작년 1월 31일 석방됐다.

이강서 신부는 ‘용산 신부’로 불린다. 이 신부는 용산참사 후 2009년 5월부터 이듬해인 2010년 1월 합동장례식이 열리기 전까지 286일간 남일당 앞 거리에서 매일 저녁 생명평화미사를 집전했다. 이 신부는 때로 미사를 ‘불법’으로 간주한 경찰과 용역에게 폭행당하고 옷이 찢겨가면서 용산 사건의 문제를 세상에 알리고 유족들의 고통과 슬픔을 위로했다. 용산 생명평화미사는 지금도 서울 명동 가톨릭회관에서 매달 마지막 주 수요일마다 열리고 있다. ‘용산’은 여전히 끝나지 않은, 그리고 끝날 수 없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상처받고 홀로 있던 정영신 씨, 현장에서 연대하며 삶의 힘 찾아

1인 시위 도중에도, 식사를 하면서도, 이들의 대화 주제는 온통 용산이다. 유가족들은 어떻게 지내는지, 당시 구청장은 지금 어떤 자리에 있는지, 용산 재개발을 주도했던 대기업들이 어떻게 빠져나갔는지 등에 관해 대화를 나눈다.

현재 정영신 씨는 용산참사범국민대책위원회(이하 용산대책위)의 활동가다. 2010년 1월 장례식을 치른 후, 그가 다시 사람들을 만나고 용산 이야기를 세상에 하기까지는 1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2009년 사건 터진 직후 정영신이라는 개인은 사라졌어요. 가족을 잃은 다섯 어머니를 보좌하는 며느리였고, 6명의 구속자 가족을 케어해야 하는 사람이었고, (시신이 안치된) 병원에서는 아빠를 잃어버려 자기들끼리 노는 꼬마들의 큰누나여야 했어요. 힘들다 티 낸 적도 한 번 없었죠. 그런데 합동장례 치른 후 짐을 벗어버린 듯 가버리는 사람들의 모습에 왜 그리 속상했나 몰라요. 나만 이렇게 된 것 같고, ‘내가 도대체 왜?’ 하는 억울한 생각도 들고.”

그렇게 세상과 단절한 채 폐인처럼 살던 영신 씨는 남편 이충연 씨 면회를 가는 길에 현수막을 하나 발견한다. 현수막에는 “여기가 제2의 용산참사 현장입니다”라고 쓰여 있었다. 머리가 멍해진 영신 씨는 인권재단 사람 박래군 상임이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박 상임이사는 영신 씨를 마석 모란공원으로 불러내 묘지를 돌며 수많은 열사들에 대해 모두 설명해줬다.

그날 이후 영신 씨는 희망버스를 탔고, 철거민들의 현장을 찾았다. ‘용산의 며느리’답게 다섯 명의 어머니들에게도 ‘함께 가자’고 독려했다. 그렇게 영신 씨와 용산 어머니들은 장기 투쟁을 하는 노동자들의 고공 농성장으로, 밀양으로, 강정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그 연대는 유가족들에게 다른 생의 힘이 되어 주었다.

“어머니들도 현장에 가면 좋아지셨어요. 몸도 마음도 정말 힘드셨거든요. 신부님도 잘 아시잖아요. 그런데 어떤 현장에 가도 용산에서 왔다는 이유만으로 환대해주셨어요. 살 수 있는 무엇인가가 생겼죠.”

영신 씨는 “이 시기가 되면 다들 잠도 못자고 밥도 잘 못 먹을 만큼 너무 힘들다”면서, “그래서 더 현장으로 간다”고 말했다. 자신들의 싸움만큼 고통스러운, 때로는 더 길고 처절하게 느껴지는 현장을 바라보며 자신들의 길이 더 선명해지기도 했다. 영신 씨는 “용산이 제대로 싸웠다면, 쌍용자동차가, 밀양이 저렇게 되지 않았을 텐데 하고 반성할 때가 많다. 유가족들 안에서 용산이 왜 계속 싸워야 하는 문제인지도 더 명확해졌다”고 말했다.

   
▲ 2009년 5월 용산 생명평화미사. 유가족들이 영정을 들고 앉아 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자료사진)

   
▲ 2009년 5월 5일, 용산 남일당 앞에서 봉헌된 생명평화미사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자료사진)

용산참사, 왜 망루에 오를 수밖에 없었는지 물어주세요

영신 씨는 “용산참사라고 하면 당연히 망루 위, 그리고 돌아가신 분들을 떠올리지만, 용산은 단순히 사람이 죽은 문제가 아니다”라며 “왜 철거민들이 망루에 올라갈 수밖에 없었는지를 물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강서 신부는 “용산참사의 이면에는 개발정책과 자신이 보호해야 할 국민을 내리누르는 국가가 있다”고 강조했다.

“용산은 분명한 ‘참사’잖아요. 그냥 ‘안됐다’ 정도가 아니라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경악스러운 사건이죠. 그런데 이 참사의 이면에 도사리는 건 기득권의 이익만을 보장하는 개발정책이에요. 게다가 공동선 증진을 위해 우리가 선출한 국가 권력은 모든 이를 위한 국가가 아니었다는 것도 만천하에 드러났죠. 힘없고 가난한 이들을 지켜줄 국가는 없었던 거예요.”

이 신부는 “만약 우리 사회가 용산참사를 표지석 삼아,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각성했다면, 그래서 사회, 정치 각 분야에서 인간 존엄함을 높이는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화해왔다면, 지금 용산을 바라보는 시각이 훨씬 긍정적이었을 것”이라며 유감을 표했다. 이 신부는 또 “가까이 있을 땐 보이지 않던 것들이 시간이 지나며 선명해 진다”며 “바로 더 나은 삶을 향한 욕망의 노예로 살아온 우리 자신의 모습”이라고 말했다.

“인간의 가치를 상실한 사회예요. 개인의 능력껏 먹고 살아야 하고, 권력자가 법과 절차를 무시해도 보고만 있는 거죠. 시간이 지날수록 더 나은 삶을 살겠다고 발버둥치며 다른 이에게 무관심한 개인이 참사의 가장 큰 원인 제공자란 사실을 깨달아요. 이게 용산참사의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가장 근원적인 진실이에요.”

이에 정영신 씨는 “내가 너무 무지하게 살아서, 사회에 관심이 없어서 이런 일을 당했구나 생각할 때가 많았다”고 덧붙인다.

김석기 공항공사 사장 임명,
반성과 책임 없는 현 정부 태도 드러내

작년 10월, 용산 철거민 진압을 지휘했던 김석기 전 서울지방경찰청장이 한국공항공사 사장으로 임명되자, 용산 유가족와 영신 씨는 서울 강서구 공항공사 앞으로 달려가 항의했다. 김석기 공항공사 사장은 용산대책위가 참사의 진상규명과 처벌을 요구하는 주요한 책임자 중 한 명이다. 영신 씨는 이 인사발령이 “끔찍했다”고 말했다.

“2012년에 김석기가 19대 국회의원 선거에 새누리당 경주 후보로 출마했을 때, 어머니들이랑 경주로 달려갔었죠. 거기서 용산을 알리고 김석기를 반대했어요. 결국 자기 텃밭인데도 낙선했죠. 자기 지역 사람들도 용산 문제는 좋게 보지 않았던 거예요. 인간으로서 양심이 있다면 설마 공직에 나올까 생각했는데 세상에, 공항공사 사장이라니.”

이강서 신부는 “용산참사의 원인이며 당사자를 그런 자리에 앉혔다는 것은 국가가 이런 참사에 대해 아무런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정부는 앞으로 비슷한 일이 벌어져도 그렇게 하겠다는 입장인 거예요. 반성이나 책임의식이 전혀 없는 거죠. 김석기의 말 한 마디, 결정 하나가 누군가에겐 재앙이 되잖아요. 그런데 그 재앙이 버젓이 돌아다니고 국민 세금으로 지탱되는 공기업의 사장으로 임명된다니, 용산참사도 경악스럽지만 그 책임자가 버젓이 공직에 기용되는 게 훨씬 더 경악스러워요.”

이 신부는 이런 일이 반복되는 것은 “우리가 역사를 제대로 청산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라며 “사람들은 정의가 바로 서고 국가가 책임지는 경험을 한 적이 없으니, 절대로 그래서는 안 되는 순간에도 관용을 베푼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긍정적인 역사적 경험을 위해서라도 용산참사는 반드시 해결되어야 할 문제라고 입을 모은다. 이들이 요구하는 것은 진상규명, 그리고 책임자 처벌이다. 영신 씨는 “그날의 진상을 밝히는 작업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하고 싶다”고 다부지게 말했다. 용산참사로 기소된 철거민 9명은 사건 ‘책임자’로 몰려 유죄 판결을 받았다. 검찰은 수사 기록을 공개하지 않았고, 이는 2012년 2월 대법원에서 ‘검찰 직무상 의무를 위반했으므로 철거민들에게 300만 원씩을 배상하라’는 판결을 받았다.

“용산 철거민들은 감옥에 다녀왔고, 돌아가신 분들은 도시 테러리스트가 되었어요. 그날 철거민들의 마지막을 목격한 분들이 적지 않은데, 5년이 지났으니 이제 좀 진실을 얘기해주면 좋겠어요. 그런 분들이 나타나도 정부가 책임 없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테니까요. 돌아가신 분들의 명예만이라도 회복하고 싶어요.”

영신 씨는 “개인적으로 제3, 제4의 용산이 생기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밀양에 가도, 민주노총 침탈 현장에 가도 용산이 생각난다”는 것이다. 그런 현장을 만날 때마다, 영신 씨와 용산의 어머니들은 계속 2009년 1월 20일에 서있게 된다. 이강서 신부는 “용산참사 당사자들에게 2009년 1월 20일 이후 역사가 정지한 것”이라 말한다.

“그분들의 죽음을 납득할 수 있을 때까지, 국가 폭력에 의한 희생을 인정하고 사과할 때까지 유가족들의 시계는 그냥 멈춰서 있다. 역사도 전진하지 않고 멈춰서 있는 것이다.”

   
▲ 공터 앞에서 대화를 나누는 이강서 신부(왼쪽)와 정영신 씨. 추모 기간을 맞아 시민들이 담벼락에 꽃을 꽂아 놓았다. ⓒ문양효숙 기자

공터로 남은 용산 남일당 터,
“이럴 거면서 왜 무리하게 사람을 쫓아내고 철거했나?”

두 사람은 자리를 옮겨 용산참사의 현장을 찾았다. 현재 참사 현장인 남일당 건물이 철거된 자리는 주차장으로 쓰인다. 정영신 씨는 “차라리 건물이라도 세워졌으면 좋겠다”며 분노를 드러냈다.

“차라리 뭐라도 세워졌으면 덜할 거예요. 이렇게 공터로 둘 거면서 왜 단 한 번의 대화도 없이 그렇게 무리하게 사람들을 쫓아내고 철거했는지, 정말 이해할 수가 없어요.”

이강서 신부는 “오늘날 대한민국은 곳곳에서 문제가 터지는 ‘참사 사회’”라 설명하고, “너무 문제가 많아 참사에 무뎌지는 사회에서 용산 유가족은 어둠 속의 횃불이 되어 줄 존재”라고 말했다.

“우리는 지금 암흑시대를 살고 있어요. 이런 때에 어둠을 밝히는 횃불이 되어주는 존재가 있죠. 바로 국가 폭력이나 사람들의 무관심의 희생자들이에요. 어둠의 직접적 피해자들은 역으로 그런 횃불이 되어 주지요.”

용산참사 5주기 추모제,
“계속 싸워나갈 수 있도록 손잡아 달라”

18일 용산 5주기 추모제를 앞두고 이강서 신부는 “기억이야말로 사회의 안전망”이라고 강조했다.

“역사적 사건은 그것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각인되는 측면이 있어요. 용산참사는 우리 사회의 약자들, 집 없는 사람들, 쫓겨나는 사람들이 어떤 처우를 받는지 우리 사회에 경고하는 등대예요. 시간은 걸리겠지만 더 많은 사람이 이 등대의 불빛을 보고 가야 할 길을 함께 찾을 때 역사가 바뀔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잘못된 역사의 잘못을 반복하지 않는 안전망은 ‘기억의 연대’죠. ‘나까지 기억해야 하나?’ 하는 무심함이 끊임없이 같은 참사를 되풀이하게 만드는 게 아닌가 해요. 5주기 추모행사를 준비하고, 지금 여기의 문제로 가지고 오는 것은 그 때문이죠.”

정영신 씨는 자신이 지난 5년간 버틸 수 있었던 건 용산을 기억하고 자신의 손을 잡아주셨던 사람들 때문이라며 “18일 오후 2시 용산과 4시 서울역 추모제에 많은 분들이 오셨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한다.

“많은 분들이 현장에 계셔 주신다면, 돌아가신 분들의 몫까지 살아내야 하는 이들에게 큰 힘이 될 거예요. 그런 힘이 모아진다면 박근혜 정권에도 용산참사가 ‘반드시 해결해야 하는 과제’임을 인식시킬 수 있을 거예요. 저는 제 손 잡아주셨던 수많은 분들을 믿어요.”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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