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프란치스코의 권고 <복음의 기쁨> 9항-13항 번역문

 
II. 즐겁고 위로를 주는 기쁨인 복음화

9. 선함은 언제나 널리 퍼지려고 합니다. 선함과 진리에 대한 참된 체험은 그 본성상 우리 안에서 자라려고 합니다. 그리고 심오한 해방을 체험한 사람은 누구나 다른 이들의 요구에 보다 민감해집니다. 선이 확장되는 것처럼, 선은 뿌리를 박고 발전합니다. 만일 우리가 존엄하고 완전한 생명에로 나아가길 바란다면, 다른 이들에게 다가가 그들에게 좋은 것을 찾아야만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사도 바오로의 말씀은 전혀 놀랍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다그칩니다.”(2코린토 5:14) “내가 복음을 선포하지 않는다면 나는 참으로 불행할 것입니다.”(1코린토 9:16) 우리를 참되게 체험하면 본성상 사랑은 우리 안에서 커지려고 합니다.

10. 복음은 우리에게 보다 높은 차원, 그러면서 결코 모자라지 않는 삶을 살 기회를 줍니다. “생명은 포기함으로써 자랍니다. 생명은 안락함과 고립됨으로써 약해집니다. 실재로 생명을 가장 잘 누리는 사람은 땅에서의 안전을 떠나 다른 이들에게 생명을 전하는 사명으로 흥분하는 사람들입니다.” 교회가 복음화의 임무를 맡기려고 그리스도인을 부를 때, 교회는 단지 인격적으로 참된 완성을 가져오는 원천을 가리킬 뿐입니다. 왜냐하면 그 원천에서 “우리는 심오한 법칙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생명은 다른 이들에게 생명을 건네주기 위해 생명을 바치는 만큼 얻을 수 있고 성숙해진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파견(mission)이 의미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따라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장례식에서 금세 돌아온 사람처럼 보이지 맙시다. 우리의 열정을 다시 찾고 불사릅시다. “우리가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을 때조차도 복음을 전하는 것은 즐겁고 위로를 주는 기쁨입니다.... 때로는 번뇌하며, 때로는 희망을 갖고 나아갈 길을 찾고 있는 오늘날 세상이 낙심하거나, 의기소침하거나, 참을성 없거나 불안한 복음전파자로부터가 아니라,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기쁨을 받아들인 복음의 사목자, 열정으로 그 삶이 빛나는 복음의 사목자로부터 기쁜 소식을 들을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영원한 새로움

11. 복음선포(preaching)의 쇄신은 냉담한 사람이나 미지근한 사람은 물론 신자들에게 신앙이 주는 새로운 기쁨을 얻게 하고, 복음화 작업이 주는 결실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복음선포의 핵심은 항상 같을 것입니다. 즉 당신의 위대한 사랑을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내신 하느님께서 나이에 관계없이 끊임없이 당신의 자녀들을 새롭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주님께 바라는 이들은 새 힘을 얻고 독수리처럼 날개 치며 올라간다. 그들은 뛰어도 지칠 줄 모르고 걸어도 피곤한 줄 모른다.”(이사야 40,31)

그리스도께서는 “영원한 복음”(묵시록 14,6)이십니다. 그분은 “어제도 오늘도 또 영원히 같은 분이십니다.”(히브리 13,8) 그러나 그분의 풍요로움과 아름다움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분은 영원한 청춘이시며 새로움의 원천이십니다. 교회는 “하느님의 깊은 풍요와 지혜와 지식”(로마 11:33)을 항상 찬미해야 합니다. 십자가의 성요한은 “하느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부함은 너무 깊어서, 또 너무 넓어서, 우리 영혼이 아무리 많이 알게 된다 하더라도, 항상 그 안으로 파고들 수 있습니다.”고 했습니다. 이레네오 성인은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에 모든 새로움을 갖고 오셨습니다.”고 했습니다. 이 새로움으로 그분은 항상 우리의 삶과 우리 공동체를 새롭게 하실 수 있습니다.

비록 그리스도교 메시지가 어둠과 교회의 나약함의 시기에 놓여 있다고 하더라도, 그 메시지는 결코 수명을 다하여 사라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그분을 가두려 했던 활기 없는 범주들을 뚫고 들어오실 수 있습니다. 그분은 당신의 창조력으로 우리를 끊임없이 놀라게 하십니다. 우리가 원천이신 그분께 돌아가려고만 한다면, 그리고 복음의 본래 신선함을 되찾으려고만 한다면, 새로운 길이 떠오를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오늘날 이 세상을 위해 창조의 새로운 길들이 다양한 표현 양식으로, 새로운 의미를 갖는 표지와 언어들을 만들어 낼 것입니다. 참된 복음화는 항상 “새로운” 형태를 갖습니다.

12. 이 사명이 분명히 커다란 관대함을 요구하는 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어떤 개인의 영웅적 행위라고 보는 것은 잘못입니다. 왜냐하면 이 사명은 우리가 보고 이해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뛰어넘는 주님의 으뜸이며 가장 위대한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첫째 복음 선포자이시며 가장 위대한 복음 선포자”이십니다. 복음화의 모든 활동에서 첫째는 항상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셔서 당신과 협력하게 하셨고, 당신 성령의 힘으로 우리를 이끄시는 분이십니다. 진짜 새로움은 하느님 자신이 직접 가져오시고, 수많은 방법으로 불러일으키고, 재촉하고, 인도하고 그리고 수행하시는 그 새로움입니다. 교회의 생활은 항상 하느님께서 주도권을 가지셨음을, 즉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1요한 4,19)는 것을, 그분만이 “자라게 하신다”(1코린토 3,7)는 것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것이어야 합니다. 너무 어렵고 힘들어서 우리 인생 전부를 바쳐야 하는 그 임무에서도 우리가 기쁨의 정신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같은 확신 때문입니다.

13. 이 사명이 갖는 새로움을 마치 우리를 둘러싸고 있으면서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살아있는 역사에 대한 망각과 분리를 가져오는 것으로 보아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기억은 이스라엘의 기억 그 자체와 그다지 다르지 않은 것으로서, 우리가 “새로운 명령(신명)”이라 불러도 되는 우리 신앙의 어떤 차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교회가 매일 기념하는 것으로서, 그리고 깊게 참여해야 할, 그분 파스카의 사건인 성찬례(Eucharist)를 남겼습니다.(루카 22,19 참조) 복음화활동의 기쁨은 언제나 이 고마운 기념에서 나타납니다. 이는 우리가 끊임없이 탄원해야 할 은총입니다.

사도들은 예수님께서 자신들의 마음을 울렸던 순간을 결코 잊지 않았습니다. “때는 오후 네 시쯤이었다.”(요한 1,39) 예수님과 함께, 이 기념이 “큰 구름같이 많은 증인들을”(히브리 12,1) 우리에게 선사합니다. 우리는 큰 기쁨을 갖고 그들 가운데 많은 이들인 신자들을 기억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일러 준 여러분의 지도자들을 기억하십시오.”(히브리 13,7). 그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보통 사람으로서 우리와 비슷하며 우리에게 생명의 신앙을 소개했습니다. “나는 그대 안에 있는 진실한 믿음을 기억합니다. 먼저 그대의 할머니 로이스와 어머니 에우니케에게 깃들어 있던 그 믿음을.”(2티모테오 1,5) 믿는 이들은 본질적으로 “기억하는 사람”입니다.
 

번역: 박동호 신부
서울대교구 신정동 성당, 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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