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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르면서 같은 이름[하느님은 여러 종교를 이렇게 보실꺼야 - 성서와 이웃종교 7]

 

나는 야훼다. 나는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에게 전능의 신으로 나를 드러낸 일은 있지만 야훼라는 이름으로 나를 알린 일은 없었다”(출애 6,2-3)

성서에서는 신의 이름이 바뀌어온 사례가 나온다: “나는 야훼다. 나는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에게 전능의 신(엘 샤다이)으로 나를 드러낸 일은 있지만 야훼라는 이름으로 나를 알린 일은 없었다”(출애 6,2-3) 이 구절의 역사적 의미인즉, 모세 이전에는 신을 ‘엘’, 구체적으로 ‘엘 샤다이’(전능의 신) 등으로 불렀지만, 모세 이후로는 ‘야훼’라고 불렀다는 뜻이다. 엘이라는 이름은 이스라엘(신이 겨루신다), 이스마엘(신은 들어주소서), 벧엘(신의 집) 등의 이름과 장소에도 그 흔적이 남아있다. 그런데 점차 신에 대한 호칭이 달라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호칭이 달라졌다는 것은 사람들의 신관이 달라졌다는 뜻이다. 엄밀히 말해 엘과 야훼는 다르다. 둘 다 신에 대한 일종의 호칭이지만, 엘이 여러 신들 가운데 최고신 개념에 가깝다면, 야훼는 자존자, 근원자, 유일자의 의미를 지닌다. 두 이름이 어떤 차별성을 지니는지, 그리고 어떤 맥락에서 사용되었는지 엄밀하게 구분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지만, 종교사상사적 차원에서 보면 특정 집단 중심의 최고신과 유일신 사이의 간격은 생각보다 넓다. 그것은 단순하게 말하면 다신교와 일신교 사이의 차이이다.

사람들이 신을 엘이라고 부르던 시절은 분명히 다신교적 세계관을 배경으로 한다. 그러다가 야훼로 전이되어가면서, 유일신 개념의 흔적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 때 흔적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그 야훼가 유일신론(monotheism)이라기보다는 택일신론(henotheism, 여러 신들 가운데 한 신을 유일신처럼 택해 숭배하는 자세)의 모양새에 가깝게 보이기 때문이다. 어찌되었든 이름상의 차이만으로보면 ‘엘’의 종교와 ‘야훼’의 종교는 서로 다르다고 할 수 있을 지경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서에 의하면, 과거에 엘이라고 스스로를 드러낸 신이 이제는 야훼로 스스로를 드러낸다고 한다. 그렇게 드러낸다고 말하는 주체가 같은 ‘나’이니, 엘이나 야훼나 겉 이름은 다르지만 모두 같은 분이 된다는 말이다. 신에 대한 이름이 다른만큼 다른 종교라는 딱지를 붙여놓아도 무방하겠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신이 같은 ‘나’라는 것이다.

그러다가 신약성서에 이르면 신관에 급격한 전환이 보인다. 신약성서에서 야훼라는 이름은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신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말라는 십계명에 따르다가 야훼가 함부로 불려질 수 없는 두려운 분으로 인식되면서, 유대인들 사이에 야훼라는 이름 자체가 사라져갔다. 당연히 예수는 야훼라는 이름을 몰랐다. 신을 그저 ‘아버지’, 구체적으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 내지 그저 ‘신’으로만 불렀다. 특히 아버지라는 표현은 친근감, 자비, 사랑, 생명의 원천 등의 의미나 이미지를 지닌다. 신을 두려워하며 성립된 종교(즉, 유대교)와는 아주 다른 신관을 지닌 셈이다.

그렇다면 '엘', '야훼'와 예수의 '아버지'는 같은 분인가, 다른 분인가? 그저 택일해 답할 수 있는 문제만은 아니다. 무엇보다 다양한 이름들 속에서 불연속적 연속성, 혹은 연속적 불연속성을 볼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신을 오랫동안 하늘, 하느님, 天, 상제, 신, 천지신명, 道, 法, 理 등등으로 불렀다. 그러다가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은 하느님, 하나님, 또는 천주라고 불러오고 있다. 이 가운데 천주(天主)는 마테오 리치에 의해 사실상 창작된 이름이다. 이 창작된 이름 천주는 엘과 같은 신인가 다른 신인가? 그리스도교와 관계없이 오랫동안 '상제'라고 불리던 신과 그리스도인에 의해 '하느님' 또는 '하나님'이라고 불리는 신은 다른 신인가 같은 신인가? 다르다고 말할 수만은 없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어떤 이름이든 이름은 그 실재를 온전히 담아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름이 특정하게 붙여질 수 있다면 그것은 영원한 이름이 아니라”(名可名非常名, 도덕경)고 하지 않던가.

엘이든 야훼든 히브리식 이름이다. 신이 다른 문화권에서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것은 자연스럽다. 바울로가 아레오파고에서 종교심이 강한 그리스인이 여러 신들 가운데 이름모를 신에게 바쳤던 신전 앞에서 그 이름모를 신이 바로 예수의 하느님이라고 설교한 적이 있는데, 그것도 신명(神名)의 다양성의 한 사례이다. 특정 이름이 이름이 지시하는 실재를 온전히 다 드러낼 수 없다는 증거가 된다는 것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심지어는 그리스도교라는 이름도 그리스도교적 하느님의 실재를 온전히 담아내지는 못한다. 그러니 언어가 좀 다르게 나타난다고 해서, 쉽사리 차별적인 생각을 먼저 가져서는 안된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시대와 상황에 따라 신적 존재에 붙여진 다양한 이름들을 하느님이 스스로를 드러내는 방식의 다양성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 다양성 속에서 다양성을 통해 일하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읽어내고, 삶 속에서 구체화시켜내야 할 일만 남은 것이다.

유대인들에게만 알려진 신이 어찌 진정한 의미의 유일자, 근원자가 되겠는가. 그것은 특정 민족의 신이지, 결코 보편자가 될 수 없다. 정말 보편자, 그런 의미의 유일자라면, 역사와 문화, 환경에 따라 여러 이름으로 불려 마땅하다. 때로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때로는 정의라는 이름으로, 때로는 보잘 것 없는 이의 ‘얼굴’로, 법(法)이나 천(天)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릴 수 있다. 종교가 다르다고, 다른 이름으로 불린다고, 겉모습이 다르다고, 쉽사리 차별성만 부각시켜서는 곤란한 일인 것이다.

이찬수 / 종교문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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