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프란치스코의 권고 <복음의 기쁨> 1항-8항 번역문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에서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지난 11월 26일 발표한 교황 권고 <복음의 기쁨> 번역문을 연재한다. 이 번역문은 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박동호 신부가 개인적으로 번역한 것이다. 좀 더 공적인 번역문은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의 번역문 출간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  ―편집자 

 

 

프란치스코 교황의 권고


‘복음의 기쁨’

 

APOSTOLIC EXHORTATION
EVANGELII GAUDIUM
OF THE HOLY FATHER
FRANCIS

오늘날 세상에 복음을 선포하는 것에 관해, 주교, 성직자, 봉헌생활자, 그리고 평신도에게...

 
1. 복음의 기쁨은 예수님을 만나는 모든 사람의 삶과 마음을 채워줍니다. 그분께서 주신 구원을 받아들인 사람은 죄와 공허함과 외로움에서 해방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라면 기쁨은 끊임없이 솟아납니다. 이 교황 권고에서 저는 교회가 걸어야 할 새 길을 제시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이 복음화가 이 기쁨으로 가득 찬 새로운 장을 용감하게 열어가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I. 항상 새로운 기쁨, 나눠야 할 기쁨

2. 오늘날 소비주의가 휩쓸고 있는 심각한 위험은 자기만족의 탐욕스러운 마음에서 나오는 황폐함과 번뇌, 가벼운 쾌락에 대한 무절제한 추구, 그리고 무뎌진 양심입니다. 우리가 마음으로 자신만의 이익과 관심에만 몰두할 때마다, 다른 이들을 위한 자리, 사회적 약자를 위한 자리가 그의 마음에 있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목소리를 더 이상 듣지 않습니다. 하느님 사랑이라는 고요한 기쁨을 더 이상 느끼지 않습니다. 선한 일을 하려는 열망은 사라집니다. 이는 믿는 사람들에게도 실질적인 위험이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걸려 넘어지고 후회하고, 분노하고 냉담해집니다. 이것은 결코 존엄하고 충만한 삶을 사는 길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성심에서 나온 성령 안에서 사는 삶도 아닙니다.

3. 저는 이 순간 모든 곳의 모든 그리스도인이 예수 그리스도와 새롭게 또 인격적으로 만나기를 바랍니다. 그렇지 않다면, 적어도 그분이 모든 그리스도인을 만날 수 있도록 마음을 열어주기를 바랍니다. 저는 여러분 모두가 매일 그렇게 해주기를 청합니다. 누구도 이 초대가 특정인에게만 해당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 누구도 예외 없이 당신의 기쁨을 가져다주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분을 만나려는 모든 사람을 결코 실망시키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다가갈 때마다 우리는 그분이 이미 거기서 팔을 벌린 채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지금이 바로 예수님께 “주님, 저는 스스로 속아 넘어갔습니다. 저는 수없이 당신의 사랑을 멀리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다시 있습니다. 당신과의 계약을 새롭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저에게는 당신이 계셔야 합니다. 저를 다시 구원해주십시오. 주님 저를 다시 당신 구원의 품에 받아주십시오” 하고 말씀드릴 때입니다. 우리가 버림을 받을 때마다 그분께 돌아가는 것이 얼마나 좋습니까!

저는 다시 이렇게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절대로 지치지 않고 우리를 용서하십니다. 그분의 자비를 찾는데 지치는 것은 바로 우리입니다.”라고. “일곱 번씩 일흔 번”(마태 18,22)이라도 서로 용서하라고 말씀하신 그리스도께서 그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일곱 번씩 일흔 번 용서하셨습니다. 수도 없이 반복해서 그분은 우리를 당신 어깨에 태우셨습니다. 누구도 이 무한하고 변함없는 사랑이 주신 존엄함을 우리에게서 빼앗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를 결코 실망시키지 않으며 오히려 항상 우리의 기쁨을 회복시킬 수 있는 이 사랑으로 그분은 우리로 하여금 다시 머리를 들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게 해주십니다. 예수님의 부활에서 도망치지 맙시다. 결코 포기하지 맙시다. 분명히 그렇게 합시다. 그분의 생명 말고는 아무것도 우리를 재촉하지 못하게 합시다. 그것만이 우리를 나서게 합시다.

4. 구약성경은 구원의 기쁨이 메시아 시대에 충만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기다리는 메시야를 기뻐하며 환호했습니다. “당신은 민족들을 많게 하시고, 기쁨을 크게 하십니다.”(9,3) 이사야 예언자는 시온에 있는 이들에게 노래를 부르며 나가서 그분을 만나라고 권고했습니다. “시온 주민들아 소리 높여 환호하여라!”(12,6) 예언자는 제단에서 이미 그분을 만난 이들에게 그 소식을 다른 이들에게 전하라고 했습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시온아 높은 산으로 올라가라. 기쁜 소식을 전하는 예루살렘아 너의 목소리를 한껏 높여라.”(40,9) 모든 창조물은 구원의 기쁨을 나눕니다. “하늘아, 환성을 올려라. 땅아, 기뻐 뛰어라. 산들아, 기뻐 소리쳐라. 주님께서 당신 백성을 위로하시고 당신의 가련한 이들을 가엾이 여기셨다.”(49,13)

즈카리야 예언자는 주님의 날을 고대하며 “겸손하고 나귀를 타고” 오시는 왕을 환호하라고 부릅니다. “딸 시온아, 한껏 기뻐하여라. 딸 예루살렘아, 환성을 올려라. 보라, 너의 임금님이 너에게 오신다. 그분은 의로우시며 승리하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겸손하시어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9,9)

아마도 가장 감동적인 초대는 스바니야 예언자일 것입니다. 그는 구원의 기쁨을 기념하면서 백성에게 하느님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저는 다음의 구절을 읽을 때마다 전율을 느낍니다. “주 너의 하느님, 승리의 용사께서 네 한가운데에 계시다. 그분께서 너를 두고 기뻐하며 즐거워하신다. 당신 사랑으로 너를 새롭게 해 주시고 너 때문에 환성을 올리며 기뻐하시리라. 축제의 날인 양 그렇게 하시리라.”(3,17)

이것이 바로 우리가 매일, 일상에서, 체험하는 기쁨, 우리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사랑스러운 초대에 응답하는 기쁨입니다. “얘야, 네가 가진 모든 것으로 자신을 잘 보살피고... 그날의 행복(즐거움)을 마다하지 말아라.”(집회 14:11, 14) 이런 말씀에서 부모 사랑이 얼마나 부드럽게 울려 퍼지고 있습니까!

5. 그리스도의 십자가 영광으로 빛나는 복음은 끊임없이 우리를 기쁨으로 초대합니다. 몇 가지 예만 들어도 충분합니다. “기뻐하라!”는 천사가 마리아에게 한 인사말입니다.(루카 1,28)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했을 때 요한은 태중에서 기뻐 뛰놀았습니다.(루카 1,41 참조) 마리아는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뜁니다.”(루카 1,47) 예수님께서 자신의 사명을 시작했을 때 요한은 “그래서 내 기쁨도 그렇게 충만하다.”(요한 3,29)고 외쳤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스스로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였습니다.(루카 10,21)

그분의 메시지는 기쁨을 가져다줍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5,11) 우리 그리스도인의 기쁨은 그분의 넘치는 마음을 마시고 있습니다. 그분은 제자들에게 약속했습니다. “너희는 울며 비통해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요한 16,20) 그리고 그분은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요한 16,22)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기뻐하였습니다.”(요한 20,20)

사도행전에서 우리는 첫 그리스도인들이 “즐겁고 순박한 마음으로 음식을 함께 먹었습니다.”(사도행전 2,26) 제자들이 갈 때마다 “큰 기쁨이 넘쳤습니다.”(8,8) 제자들은 박해를 당할 때조차도 “기쁨과 성령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13,52) 세례를 받은 내시는 “기뻐하며 제 갈 길을 갔습니다.”(8,39), 바오로를 가둔 간수와 “온 집안은 하느님을 믿게 된 것을 함께 기뻐하였습니다.”(16,34) 무엇 때문에 이 기쁨의 물결에 합류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6. 그리스도인 가운데 부활이 없는 사순시기처럼 사는 이들이 있습니다. 물론 저는 기쁨이 인생에서 항상 같은 방식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압니다. 특히 심각한 어려움에 처한 시기에는 그렇습니다. 기쁨이 익숙해지고 변하기는 하지만 항상 인내합니다. 이는 빛의 서광처럼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다했을 때 우리가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확신할 때 나타납니다.

저는 무거운 고통의 짐을 견뎌야 하는 사람들의 슬픔을 이해합니다. 그러나 천천히 그리고 천천히 그렇지만 확실히 우리는 믿음의 기쁨이 조용하지만 튼튼한 신뢰를 되살리도록 해야만 합니다. “당신께서 이 몸을 평화 밖으로 내치시어 저는 행복을 잊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을 내 마음에 새겨 나는 희망하네. 주님의 자애는 다함이 없고 그분의 자비는 끝이 없어 아침마다 새롭다네. 당신의 신의는 크기도 합니다... 주님의 구원을 잠자코 기다림이 좋다네.”(애가 3:17, 21-23, 26)

7. 때때로 우리는 핑계 거리와 불만거리를 찾으려는 유혹을 겪습니다. 마치 수많은 조건들이 충족된다면 분명히 행복할 수 있다는 듯이 행동합니다. 어느 정도 이는 우리의 “기술 사회가 즐거움을 많게 하는데 성공했으나, 기쁨을 낳기는 힘들다는 것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제 생애에서 가장 아름답고 자연스러운 기쁨을 저는 내세울 것이 거의 없는 사회적 약자들에게서 보았습니다.

저는 직업적 의무에 시달리는 가운데에서도 초연함과 단순함을 갖고 신앙에 충실한 이들이 보여주는 진정한 기쁨도 생각합니다. 그 모든 기쁨의 예들은 그 나름대로 하느님의 사랑에서 흘러온 것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당신을 드러내셨습니다. 저는 복음의 핵심을 우리에게 소개한 베네딕토 16세의 다음의 말을 반복해서 말씀드립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윤리적 선택의 결과나 사상의 선택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삶에 새로운 지평과 결정적 방향을 주는 어떤 사건, 어떤 사람과 조우하는 것이다.”

8. 하느님의 사랑은 풍요로운 친교로 열매를 맺는데, 오로지 이 하느님 사랑과의 만남 덕분에 우리는 편협함과 자기몰두로부터 해방됩니다. 우리가 인간적인 것을 넘어설 때, 우리가 완전한 진리를 얻을 수 있도록 하느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실 때, 우리는 비로소 완전한 존재가 됩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화를 위한 우리의 모든 노력의 영감과 원천입니다. 왜냐하면 만일 우리가 우리 인생의 의미를 살리는 사랑을 받아들였다면, 그 사랑을 다른 이들과 나눌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번역: 박동호 신부
서울대교구 신정동 성당, 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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