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민석 신부의 Spring Tree]

최근에 내가 살아야 할 소임지가 결정되었습니다. 축하를 해야 할지, 위로를 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말꼬리를 흐립니다. 그러면 저는 “축하해주세요”라고 말하곤 합니다.
“축하합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어머니와 형님이 함께 계시다며 형님 목소리로 전화연락이 왔습니다. 인사 소식을 아시고 걱정되는 듯 전화를 주셨습니다.

어머니 목소리입니다.
“거기가 뭐이냐, 뭐, 나환자들이 사는 곳이라던데 어떤가?”
“좋아요 어머니”
“어머니! 신부는 가난한 곳에서 가난한 이들하고 살면 더욱 빛나는 사제가 된다고 해요. 어머니! 아들 신부가 빛나는 사제로 사는 것 좋지요?”
“나는 신부가 좋아하면 나도 좋아.”

이렇게 통화하고 어머니께서도 좋다는 답을 들으니 내 마음이 먼저 편안해지고 안정되었습니다. 형님도 아주 긍정적으로 받아주시고 도울 일이 있으면 돕겠다는 말까지 남기도 끊었습니다.

먼저 가족들로부터 지지를 받으니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래도 가끔은 사람들은 나에게 걱정과 염려를 전달합니다. 내가 가는 곳은 시골마을 나환자 정착촌입니다. 신자도 많지 않지만 돼지등 가축을 많이 키워서 냄새나고 더러운 곳이라며 가는 나를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봅니다. 개선장군이 되는 듯 성당 주임신부로 가는 사제들에 비하면 내가 너무 초라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시점에 예수와 프란치스코 그리고 교황님은 나에게 변명을 늘어놓을 좋은 우군이 됩니다. 이 세상에 오셔서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으셨던 예수님은 “복되어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루가 6,2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일생 동안 가난을 하늘의 은총으로 여기며 살았던 분의 말씀입니다.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창세 12,1) 이 말씀이 다시 보이기 시작합니다. 성경의 본래 말씀은 야훼 하느님이 신앙인의 선조로 아브라함을 부를 때 하던 말씀이지만 이 말씀이 정착촌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로 들리기 시작합니다. 정착촌 마을 사람들은 나병에 걸리는 순간부터 자신의 가족과 친척 그리고 고향을 떠나야 했습니다. 자신들은 떠나야 하지만 나머지 가족들은 그에 관한 모든 기억까지도 지워버렸습니다. 그들은 나병이 나았습니다. 그래도 지금도 나병환자 취급을 받습니다. 그들이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말씀처럼 가난한 마음은 하늘의 마음입니다. 마음 가난한 사람은 가난을 살 수 있습니다. 주어진 가난은 우리가 극복해야할 과제이지만 스스로 선택한 맑은 가난은 절제된 아름다움이며 하늘나라를 여는 길입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집을 사고 땅을 사고 주식을 사서 많은 돈을 버는 부자로 살고 싶어합니다. 부자로 사는 것이 행복이라 말하고 은총이라고 생각합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꼭 맞는 말도 아닙니다. 그러니까 많은 돈을 버는 것을 행복의 기준으로 보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행복은 가난한 마음을 통해서 옵니다. 더욱 적극적으로 스스로 가난을 선택했을 때에만 옵니다.

우리 주님은 일용할 양식을 구하며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내일 차고 넘치는 양식이 아니라 다만 오늘 하루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뿐입니다. 내일의 양식을 염려하지 않고 오늘의 양식에 만족하고 감사하는 것이 행복입니다. 내일이 다소 걱정되는 것도 사실이지만 내일을 걱정하여 내일의 양식을 미리 쌓아 들이지 않고 오늘 일용할 양식에 만족하고 감사합니다. 주님은 “내일 일은 걱정하지 마라.”하셨습니다.

사제는 가난을 살아야 가난한 사람과 소통할 수 있습니다. 가난과 사제는 궁합이 잘 맞습니다. 사제의 삶이 가난이요. 가난이 사제의 삶입니다. 사제는 다름 아닌 절제요, 청빈이요 가난이어야 합니다. 가난하지 않고는, 자기를 비우지 않고는 가난한 이들을 만날 수 없습니다. 자기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준 세리 자캐오에게 예수는 “오늘 네 집은 구원을 얻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가난한 자만이 가난한 자를 만날 수 있고 구원에 이를 수 있습니다.

시냇가 버드나무는 흐르는 시냇물을 자기가 모두 독차지하려고 창고를 만들지 않습니다. 시냇물이 자유로이 흘러 모두의 것이 되게 합니다. 언덕 위에 핀 들꽃은 하늘의 햇빛을 자기만 받으려고 통장을 만들지 않습니다. 자기가 필요한 하루의 햇빛만 받고 나머지는 모든 들꽃이 골고루 받게 합니다.

나무와 들꽃처럼 사제도 일용할 양식만을 구하는 가난을 삽니다. 가난하게 사는 나무와 들꽃은 때가 무르익으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나 더 많이 소유하려고 창고를 만들고 통장을 만드는 사람들은 일생을 통해 꽃 한 송이 피우니 못하고 쓸쓸히 시들어 갑니다.

▲ 프란치스코 성인의 발자취가 남아있는 포지오 부스토네 성지에 있는 벽화 ⓒ김용길
이 세상에서 주님의 온전한 말씀을 실천하며 살았던 성 프란치스코는 “가난은 우리 자신을 떨어뜨리는 것이 아니라 들어 올리는 길이다.”라고 했습니다.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는 이웃과 나눠가질 때, 그것은 우리 자신을 높이 들어 올리는 행위라는 것입니다.

일생을 가난의 동반자가 되기 위해 청빈부인(淸貧婦人)과 결혼하여 산 프란치스코 성인은 죽음에 임박했을 때, 가난과 겸손을 보다 온전하게 지키기 위해 형제들의 모든 집과 움막을 반드시 흙과 나무로 지어야 한다는 내용을 유언으로 남기고 죽었다고 합니다. 자기가 세상을 떠날 때에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온전히 자연으로 돌려보내려 했던 것입니다.

프란치스꼬 교황은 이 시대에 하느님이 보내신 선물입니다. 가난을 친구로 삼고 가난을 행복으로 여기는 메시지를 가지고 오신 교황에게 감사합니다. 여전히 사악한 시대에 이 물질 만능주의를 극복하고 하느님의 나라를 이 땅에 이룰 수 있는 길은 스스로 가난을 선택해서 가난을 친구로 여기고 가난을 행복으로 사는 사람들이 복음의 기쁜 소식입니다.


 
 
최민석 신부 (첼레스티노)
광주대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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