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은의 신학 오디세이아]

아직 겨울 방학의 여유와 한가함을 누리고 싶은데, 시간은 벌써 일상으로 돌아오라고 재촉한다. 긴 여름 방학과는 달리 겨울 방학은 20여 일 밖에 되지 않아서 하고 싶은 일, 또 해야 하는 일을 잘 정해서 하지 못하면, 몸과 마음이 지친 채 새 학기를 맞는다.

나는 작년과 마찬가지로 집에서 성서 통독 피정을 했다. 열흘째 되는 날 요한 묵시록의 “주여 어서 오소서, 아멘”으로 기도를 마치며, 나는 사막으로 갔다. 침묵의 아름다움이 나에겐 아주 인상적이었다. 커다란 바위들이 아주 부드러운 명상을 하는 침묵 속을 수도생활의 평생 벗과 함께 걸었다. 내 맘속엔 아직도 침묵의 달콤함이 나를 붙드는데, 시간표는 이제 새 학기 수업시작이다.

ⓒ박정은

내가 누린 이 침묵의 맛을 최대한 누리며 새 학기를 시작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지혜로운 일은 무얼까 하고 생각하다가 가능한 한 아주 느리게 나의 모드를 바꾸기로 했다. 그래서 나는 뛰어다녀야 하는 일상의 급류 속으로 들어가기 직전까지, 내가 수업을 시작하는 수요일보다 훨씬 먼저 가서 책상 정리도 하고, 공연히 동료들에게 가서 새해 인사도 하고, 그들의 연말연시는 어떠했는지도 듣고 하면서 한가한 이 시기를 최대한 늘려가기로 했다.

새 학기에 보는 학교는 정다우면서도 늘 새롭다. 새해에는 학생들의 마음도 좀 더 많이, 그리고 깊이 헤아리고, 함께 일하는 동료들도 열심히 도와주리라고 학교 대문을 넘으면서 생각했다. 사실 학교 일과 관련해서 내가 세운 새해의 결심은 학교에서 청소하고, 잡일 해주는 분들의 이름을 다 외워서 불러주는 일이다. 마음 같지 않게, 늘 내 수업을 도와주는 고마운 이들인데도 그냥 “Good morning, my friend”라고만 인사했었다. 내 사무실 청소해주는 아주머니의 이름을, 부끄럽지만 난 아직 모른다. 그저 청소하다가 배고프면 내 방에 있는 거 먹고, 커피도 마시라고 이야기했을 뿐이다. 그러나 이 자매가 얼마의 임금을 받고, 얼마나 많은 식구들을 부양하려고, 새벽 일찍 나와서 학교를 청소하는지 나는 모른다. 좀 수고스럽더라고, 이름을 물어보고, 이름과 함께 반갑게 인사해야겠다.

그런데 며칠 전 교황님의 추기경 임명 소식이 언론에 나오더니, 어디를 가나 사람들은 추기경 임명에 대해 이야기한다. 가난한 사람을 위한 교황님이라고 무언가 파격적인 개혁을 기대하는 이들에게 이번 추기경 서임은 나를 포함해 많은 사람들의 기대를 모았고, 새해 새 학기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동료 교수가 너의 한국도 새 추기경이 있다며 축하한다고 했다. 그런데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가만히 있기로 했다. 우리 교회에 추기경이 탄생한 것에 대해 나는 어떤 의미를 찾아야 하는 걸까?

미국의 <내셔널 가톨릭 리포터>에서는 교황님이 선임하신 추기경 명단을 놓고, 여러 가지 분석기사를 내놓았다. 사실 나도 포틀랜드에 있는 수녀원 본원에서 모임이 있어 갔다가 이 소식을 듣고, 쉬는 시간에 달려 나가서 명단을 읽어 내려갔다. 한국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 드린 기도와 청원들이 생각나서, 그리고 사랑하는 한국 교회에 등불 같은 역할을 하실 새로운 추기경님을 꿈꾸면서 말이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선택이 그분의 기준이었다고 하는데, 우리나라를 포함해서 아시아와 아프리카 등 가난한 지역 교회의 주교들이 선정되었고, 많은 나이 드신 분들이 선정되었다. 한 분석에 의하면, 프란시스코 교황은 전임 교황이 마련한 후보자 명단 중에서 추기경들을 선정한 것임에도 그분다운 예외적 선임이 눈에 띈다고 적고 있다. 가령 필리핀 교회는 예측되었던 후보를 제치고, 가난과 사회 정의를 위해 일하는 분을 추기경으로 서임한 파격적인 예로 제시되었다. 한 기사에서는 미국의 전통적인 디트로이트 대교구나 볼티모어 대교구에서 한 분도 나오지 않고, 대신 캐나다에서 추기경이 나온 것도 특징적이라고 했다. 대부분의 기사는 추기경 서임은 전통을 이어가는 범위 내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이 건설하고자 하는 가난한 이들을 돌보는 교회를 만들어 가는 첫걸음으로 평가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국 교회에 대해서는 별다른 이야기가 없다. 전체 추기경단에서 아시아 교회가 차지하는 비율이 11퍼센트라는 이야기가 있을 뿐이다. 가난한 자를 위하는 추기경님을 원한다는 평신도들의 청원운동을 기억하는 나로서는 한국 교회 작은 구성원들의 바람과 소망은 전해지지 않았다는 느낌 때문에 속상했다.

착잡한 마음으로 성당에 가서 앉아 있는데, 갑자기 마음에 떠오르는 생각은, 왜 나는 희망하지 않는가였다. 바보처럼 나는 함부로 실망한 거다. 그리고 다시 평범한 진리를 생각했다. 즉, 사람이 교회라는 것, 다시 말해 평범한 사람들이 함께 모여 진실을 이야기하고, 정의를 실현하는 것, 그 과정에서 겪는 모든 것이 하느님 나라이며, 지금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일일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사람은 꽃보다 아름답기에, 우리는 어떻게도 변화될 수 있는 것이기에, 실망하는 일은 어리석은 것이다.

추기경이란 말은 라틴어 카르디날리스(cardinalis)에서 온 말로 돌쩌귀, 즉 문의 경첩을 가리키는 말에서 왔다. 나는 이 의미를 세상과 교회의 경계에 서서, 사람들의 아픔을 교회에 알리고, 교회의 사랑을 세상에 전하는 도구라고 생각한다. 물론 중세로부터 이어오는 위계질서 속에서의 고위성직자라고 하면,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세 번째로 추기경을 가진 한국 교회의 위상이 높아진 것이라고 하면 할 말이 없겠지만, 교회를 그렇게 이해하자니 씁쓸한 마음이 든다. 한국 교회가 커다란 조직력과 경제력으로, 무슨 행사든지 잘 치러내며, 경제적으로도 든든한 멋진 교회인 것은 사실이지만, 나는 한국 교회가 그런 걸로 유명하기보다는, 가난한 사람을 돌보고, 자본주의의 힘 앞에 고통 받는 사람들 편에서 싸우는 것으로 유명해지면 좋겠다.

불현듯이 김수환 추기경님이 그리워진다. 그분이 돌아가셨을 때, 그분이 가진 것은 사람들이 드린 작은 선물들뿐이었다고 들었다. 그 시대에 우리에게 정말 필요했기에 하느님께서 주신 분이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런 예언자적인 삶을 사는 용기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제 나는 고위성직자에게 이러이러해달라고 하는 주문은 더 이상 하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성령께서 우리를 힘차게 이끌고 계심을 믿기로 했다. 우리는 이미 정의를 이야기하고, 또 자기 자리에서 성실히 신앙을 사는 형제, 자매들을 가지고 있지 않는가. 우주에 깃들인 하느님의 영을 모시고 자연 속에서 공동체를 꾸미고 사는 그런 형제, 자매들을 만나지 않는가. 그리고 가난하고 못 가진 사람들을 위해서 그들의 목소리를 찾아주고, 그들을 위해 헌신하는 분들을 형제, 자매로 모시고 있지 않는가.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고위성직자가 아니고, 이름 없는 돌쩌귀가 되어서 살아가고자 하는 우리들의 결 고운 신앙이 아닐까? 지금 우리에게, 아니 내게 필요한 것은 뼈를 깎는 자성과 성찰이며, 보이지 않은 사람들을 찾아가는 용기와 결단인 것이다.

이제 새 학기가 시작되었다. 더 많이 사랑하고, 더 많이 감사하면서, 나도 이곳에서 돌쩌귀의 삶을 살아보아야겠다. 그리고 꽃보다 아름다운 우리 교회를 기억해야겠다.
 

 
 

박정은 수녀 (소피아)
홀리 네임즈 수녀회. 1990년대 후반부터 미국에서 연구하며, 이방인이자 경계인으로 살아가는 자기 정체성에 대한 물음을 신학적으로 해석하고자 시도했고, 지구화된 세상에서의 이주 문제, 동양 종교의 몸 수행에 관한 책을 써 왔다. 현재는 캘리포니아 소재 홀리 네임즈 대학의 영성학 교수이며, ‘여성의 원’이라는 피정도 지도한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