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태의 추적! 공자(追跡! 孔子) - 23]

논어를 읽다 보면 누구나 각별히 마음에 드는 단편이 있게 마련이다. 그것은 자연스런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각자가 명단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다 객관적으로 가장 뛰어난 단편은 아닐 것이다. 몇몇 사람들로부터 “나는 이것이 최고의 단편이라고 생각한다”는 선정 결과를 들어 보았지만 저마다 달랐다. 그 결과를 놓고 보면 오히려 왜 그 사람이 그 단편을 선정하였는지가 보인다. 결국 우리가 논어를 선별한다고 했지만 결과만 놓고 보면 오히려 논어가 우리를 선별한 모양새다. 주객이 뒤바뀌는 이런 현상에서 우리는 논어가 거울과 같은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논어 명단편을 골라보자는 생각을 갑자기 하게 된 것은 중국의 리링(李零)이라는 사람이 쓴 <논어 세번 찢다>라는 책을 읽다가 거기에 자신이 좋아한다는 명단편 10선이 수록된 것을 보면서였다. 북경대 중문과 교수라는 이 사람의 논어 이해는 아직도 중국의 논어 이해가 걸음마 단계에 있다는 것을 새삼 확인시켜준 것이었는데, 그의 10선도 역시 그가 논어를 고른 것이라기보다는 여전히 논어가 그를 고른 것이었다. 참고로 그의 10선을 보면 다음과 같다.

1
“군자는 두루 사귀고 편파적이지 않으며 소인은 편파적이고 두루 사귀지 못한다.”
君子周而不比, 小人比而不周. 2/14
(* 리링의 해석에 따른 것이며 필자의 해석은 다르다.)

2
“세련된 말과 의젓한 모습과 잘 보이기 위한 공손함을 좌구명(左丘明)은 부끄럽게 여겼고 나 역시 그것을 부끄럽게 여긴다. 원망을 숨기고 그 사람과 벗하는 것을 좌구명은 부끄럽게 여겼고 나 역시 그것을 부끄럽게 여긴다.” 5/25

3
“삼군(三軍)에서 그 장수를 빼앗을 수는 있지만 필부(匹夫)에게서 그 뜻을 빼앗을 수는 없다.” 9/25

4
“해진 솜 두루마기를 입고 여우나 담비 털옷을 입은 자와 함께 서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을 사람은 바로 유(由)일 것이다.” 9/26

5
“군자는 남의 좋은 점을 이루어 주고 남의 나쁜 점을 이루어 주지 않는다. 소인은 그 반대다.” 12/17

6
자공(子貢)이 물었다. “동네 사람들이 모두 좋아한다면 어떻습니까?”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아직 부족하다.” “동네 사람들이 모두 싫어한다면 어떻습니까?”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아직 부족하다. 동네 사람들 중에서 선한 자는 좋아하고 선하지 못한 자는 싫어하는 것만은 못하다.” 13/24

7
“군자는 자긍하지만 다투지는 않고 함께 어울리지만 패를 짓지는 않는다.”
君子矜而不爭, 群而不黨. 15/22

8
“군자는 말하는 것을 보고 사람을 기용하지도 않고 사람을 보고 말을 내치지도 않는다.” 15/23

9
“뭇 사람이 싫어하면 반드시 살펴보아야 하고 뭇 사람이 좋아해도 반드시 살펴보아야 한다.” 15/28

10
“시골의 수더분한 자는 덕의 도적이다.”
子曰; 鄕原, 德之賊也. 17/13

리링의 10선을 보면 거의 전부가 대인관계와 관련된 것들이다. 내가 왜 “우리가 논어를 고른다고 하지만 결국은 논어가 우리를 고르고 만다”고 했는지 그 이유가 잘 드러나 있다. 실제 리링의 책을 읽어보면 여러 군데에서 자신의 논어 관련 학문적 활동이나 주장과 관련하여 주변의 비판 내지 비난에 날카롭게 맞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세상에 이런 거울이 또 어디에 있을까 하는 감탄이 나올 정도다.

그것을 생각하면 두려움이 앞서기는 하지만 나도 한번 내 나름의 10선을 해보았다. 공교롭게도 리링이 선정한 10선과는 단 하나도 겹치지 않았다. 선정 결과에는 역시 나의 초라한 모습이 비쳐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을 나 자신은 보지 못할 것이다. 누군가가 그것을 보고 지적해주면 고맙겠다. 그러면서도 나의 초라한 모습을 너무 훤히 들여다보는 것은 방해하고 싶어 매 단편 아래에 선정 이유를 간단하게 달아보았다.

1
“나는 열다섯이 되어 배움에 뜻을 두었고 서른이 되어 정립되었으며 마흔이 되어서는 현혹되지 않았고 쉰이 되어서는 천명을 알게 되었고 예순이 되어서는 귀가 순응하였으며 일흔이 되어서는 마음 내키는 대로 행하더라도 법도를 넘지 않았다.” 2/4
―이 세상에서 가장 짧으면서도 가장 감동적인 자서전

2
“유(由)야, 너에게 아는 것을 가르쳐 주랴? 아는 것을 아는 것으로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르는 것으로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아는 것이다.” 2/17
―소크라테스의 전체 삶이 이 한 마디에 꿰어져 있는 듯.

3
“진실로 어짊에 뜻을 둔다면 악은 없다.” 苟志於仁矣,無惡也. 4/4
―천하에 만연한 악을 한 순간에 사라지게 하는 비법이라니!

4
“군자가 천하를 대함에 있어서는 절대적으로 ‘이것이다’ 하는 것도 없고 절대적으로 ‘이것은 아니다’ 하는 것도 없다. (매사를) 옳음(義)에 견줄 뿐이다.” 4/10
―보이는 세상만사를 보이지 않는 한 가지 위에 가볍게 실어 담는 기적!

5
“도(道)가 행해지지 않아 뗏목을 타고 바다 위에 떠도는 것 같구나(道不行, 乘桴浮于海). 나를 따를 자는 바로 유(由)일 게다.” 자로(子路)가 그 말을 듣고 기뻐하자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유(由)는 용기를 좋아하는 것은 나보다 더 하나 뗏목감을 구할 바가 없구나.”
―망망대해와 한 조각의 뗏목! 그의 고단했던 생애가 눈물겹다. 영광도 역시 그 모습 위에 겹친다. 5/7

6
안연과 계로가 모시고 있는데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각자 자기 뜻을 말해보지 않겠느냐?” 자로가 말하였다. “수레와 말을 타고 가벼운 가죽옷을 입고 벗들과 더불어 함께 즐기다가 그것들이 못쓰게 되어도 유감이 없기를 원합니다.” 안연이 말하였다. “선을 내세움이 없기를, 헛되이 베풂이 없기를 원합니다.” 자로가 말하였다. “선생님의 뜻을 듣기를 원합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늙은이들은 그것을 누리고 벗들은 그것을 믿고 젊은이들은 그것을 품는 것이다.(老者安之, 朋友信之, 少者懷之)” 5/26
―공자의 담담한 소원은 나를 늘 감격케 한다. 10개 중에서도 나의 best 1이다. 그것(之)이 뭐냐고? 喝!

7
선생님께서 광(匡) 지방에서 위기에 처하셨을 때 말씀하셨다.
“문왕(文王)은 이미 돌아가셨으나 문(文)은 여기에 남아 있지 않느냐! 하늘이 장차 이 문(文)을 없애고자 했다면 후에 죽을 자들은 이 문(文)과 함께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늘도 이 문을 없애지 못한다면 광(匡)의 사람들이 나를 죽인들 무엇하겠느냐?” 9/5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8
자로가 군자에 대해 묻자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경(敬)으로써 자신을 닦는다.” 자로가 말했다. “그러할 뿐입니까?”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자신을 닦아 사람들을 편안케 한다.” 자로가 말했다. “그러할 뿐입니까?”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자신을 닦아 백성을 편안케 한다. 자신을 닦아 백성을 편안케 하는 것은 요임금과 순임금도 오히려 부심했던 것이다.” 14/45
―무엇을 할 것인가? 궁극적인 답은 하나다.

9
“어떻게 하나 어떻게 하나 하고 말하지 않는 자에 대해서는 나도 어떻게 할 수가 없다.” 15/16
―산 공자도 못한다고 했는데 죽은 논어가 무얼 하겠는가? 열쇠는 각자가 쥐고 있다.

10
“잘못이 있음에도 고치지 않는 것을 바로 잘못이라 한다.” 過而不改, 是謂過矣. 15/30
―도덕군자가 되지 않아도 되고 단지 정직하기만 하면 된다는 이 복음!


 
이수태
연세대학교 법학과 졸업 후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32년간 공직생활을 했다. 평생의 관심은 철학과 종교학이었다. 그 동안 낸 책으로는 <새번역 논어>와 <논어의 발견> 외에 에세이집 <어른 되기의 어려움>, <상처는 세상을 내다보는 창이다> 등이 있다. 제5회 객석 예술평론상, 제1회 시대의 에세이스트상 등을 수상한 바 있다. 퇴직 후 현재는 강의와 집필에 전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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