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의 리얼몽상] <변호인>, 양우석 감독, 2013년작, 현재 상영 중

▲ <변호인>, 양우석 감독, 2013년작
영화 <변호인>에서 내용이나 분위기는 어느 정도 짐작한 대로다. 예고편만 보고도 울컥했다는 이야기들이 퍼져 나올 때 다들 기대하기도 했다. 물론 예상보다 더 잘 만들었다는 점에서는 예상을 깼다! 영화는 생각보다 더 재미있고 생각보다 더 감동적이었다. 게다가 이 영화를 꺼리는 (다양한) 입장의 공격 내용들도 예측대로 흘러간다.

놀라움은 다른 데서 온다. 이 영화에서 가장 뜻밖인 건 관객의 반응이다. 이런 호응이 나와 주기를 간절히 바란 사람들이야 많았겠지만, 실제로 이토록 성공한 것은 놀라움을 넘어 기적적이다. 많은 우여곡절을 견딘 제작진과 배우들 입장에서도 믿기 힘든 감격일 터다. 역대 한국영화 흥행 기록을 연일 갈아치우는 중인 <변호인>을 두고 지금은 다들 비슷한 예측을 한다. 최단 시간 내에 천만 관객을 동원할 것임에 이견이 없는 듯하다. 관객이 현재 보고 싶어 하는 영화가 적기에 나왔다는 말로 밖에는 설명이 안 된다.

그런 사람

영화 <변호인>의 주인공 송우석(송강호 분)은 유능하다. 비록 손에 쥔 건 없었지만 명석했다. 부지런했고 끈기도 있었다. 상고 출신이 당시 합격자 60명이던 사법고시를 통과했다. 1970년대 서울 법대 정원이 400명이고 고대 법대 정원이 200명이었다는데, 얼마나 좁은 바늘구멍을 통과한 것인지 알고도 남는다.

비록 아들이 태어나던 날에는 빈털터리에 땀내 나는 슬픈 아버지였으나, 그 아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아비가 되고자 다시 비상했다. 세상은 그의 꿈을 비웃었지만 그는 ‘절대 포기하지 말자’는 신념을 콘크리트 벽에 새겼다. 남보다 더 돌고 돌아 더디게 이루었는지는 몰라도 결국은 꿈을 실현시켰다.

변호사가 된 송우석은 더욱 유능해졌다. 그는 트렌드를 읽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적어도 당시 ‘목표’로 삼은 돈에 있어서는, 미래 전략 품목을 남보다 할 발 앞서 예측할 줄 알았다. 그것은 비상한 능력이었다. 상고 출신인 자신의 ‘출신’을 밑천으로 한 최고의 전략이었고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남들이 주목하지 않던 부동산 쪽에 먼저 뛰어들어 돈을 쓸어 담다가, 이윽고 너도나도 하면서 경쟁이 심해지자 조세 전문 변호사로 변신한 그는 단지 ‘속물’ 근성만이 아닌 돈의 흐름을 읽는 능력자였다. 새로운 영역에 먼저 눈을 돌리고 개척할 줄 알았다. ‘요트’를 구입하게 된 것도, 올림픽 개최를 내다보고 선수로 출전하려던 계획 때문이었다. ‘요트 소유자만이 올림픽에 출전할 수 있다’는 규정에 따른 준비였다. 그게 ‘호화 요트’라는 누명을 썼던 그 수상 스포츠 용품의 실체였다.

이 세상 최고의 트렌드는 정의

사람은 하룻밤 새 변할 수 있다. 섭씨 99도까지는 끓지 않던 물이 ‘결정적인’ 나머지 1도를 채웠을 때 끓어오르듯이, 사람에게도 그런 섭씨 1도의 순간이 있다. 다만 받아들일지 거부할지는 본인의 선택이다.

자기가 속한 세상의 흐름을 읽는 데 탁월했던, 당시 부산에서 돈 제일 잘 버는 걸로 손에 꼽히던 ‘속물 변호사’가, 하루아침에 인권변호사로 돌변할 수 있는 걸까? 사실 영화 <변호인>에서 가장 궁금한 대목이었다. 어쩌면 이 부분에서 캐릭터의 일관성이 무너지면 이 영화는 재미없는 계몽영화가 되고 만다. <변호인>은 그 점에서 극적 구성력이 탄탄했다.

성장 발전하는 캐릭터에게도, 절대로 변할 수 없는 캐릭터에게도 합당한 이유와 단서들이 주어졌다. 사람은 청소년기 이후로도 얼마든지 대오각성할 수 있다. 그 변화의 힘은 오래 전부터 그 사람 내부에서 쌓여온 것이다. 어떤 계기를 만나 터져 나왔을 뿐이다. 미래를 예측하는 데 탁월했던 사람이, 결국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이루고자 한 ‘미래’는 정의로운 사회, 곧 상식이 통하는 사회였다.

 

송우석 변호사에게 ‘국보 사건’은 암담할 뿐이었다. 상대방 측에 일말의 합리적 ‘이성’이나 ‘상식’을 기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결심한다. ‘국보 사건’ 변호인이 된 송우석은 그야말로 일생일대의 지략가가 되어야 했다. 오직 논리로써 비논리를 꺾어야 했다. 무지(無知)했기에 그간 무시했던 ‘먹물’들의 세계를 이해하고, ‘가방끈 긴 자들’의 방식으로 공격과 수비를 해야 했기에, 그는 어쩌면 순수한 의미에서 진리를 캐는 ‘학생’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리고 완벽하게 무지했고 처절하게 매달렸던 이 물들지 않은 자의 논리는 마침내 ‘바위’에 균열을 냈다.

그 법정에서 글자 그대로의 ‘논리’를 구사하는 사람은 오직 송우석 혼자뿐이었다. 논리야말로 약자의 유일한 무기였다. 논리로써 사람을 구해내야 할 때, 논리는 그 자체로 용광로가 된다. 끓어오르되 넘쳐서는 안 된다. 철저한 질서와 법칙의 테두리 안에서 온도를 서서히 올려가다가, 마침내 주변의 모든 제련되어야 할 것들을 녹여 새로운 질서로 재편시킬 뿐이다. 그래서 법은 타락하면 안 된다. “니들 기억이 자꾸 틀려” 따위의 대사는 다시는, 다시는 없어야 한다.

지금, 상식은 어디에

송우석의 논리는 질서정연했기 때문에 ‘국보법’의 비논리와 비이성을 꿰뚫었다. 단지 그가 우직하고 정의로워서 이뤄낸 결과가 아니었다. 그 빛나는 명석함을 통해 송우석 변호사가 보여준 것은 상식의 힘이었다. 공포정치가 조작해낸 시국사건에서, 그 조작된 스토리텔링 자체의 결함과 모순을 밝혀내고 증거 부족을 입증시킬 수 있는 방법은 더 논리적인 법리 해석뿐이었다.

그게 법조인들의 몫이다. 그는 변호인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다. 부동산이나 조세 전문일 때처럼 인권변호라는 새 임무에 성실했을 뿐이다. 그런 임무에 성실하면 어떻게 되는 사회인지, 그것을 소상히 알고 있는 관객들은 눈물을 쏟을 수밖에 없다. 송우석의 모델인 노무현 대통령의 이후 행보 또한 자연스레 겹친다.

영화 <변호인>은 허구와 사실이 서로 보완하며 극적 효과를 높이고 있다. 이 영화의 진짜배기 ‘사실’은 바로 법정 장면이 아닐까 한다. 실제 부림 사건의 공판 기록을 활자가 아닌 영상으로 육화시켜 생생하게 숨을 불어넣었기 때문이다. 공판 기록이 살과 뼈를 갖춘 입체영상이 되면서, 흘러가버린 줄 알았던 역사가 후손들의 눈앞에 ‘현실’로 소환되었다. 어쩌면 영화만이 할 수 있는 방식의 “과거와 현재의 대화”였다.

불과 30여 년 전에 이런 일들이 있었다. 소소한 세부 사항은 픽션이 가미됐을지언정, 사건 자체는 실제로 있었다. 피해자들은 아직도 고통 속에서 사는데, 용서를 구하는 ‘관련자’들은 없다. 그러기엔 그들이 너무나 세속적으로 성공했다.

최종적인 법적 판단은 아직도 내려지지 않았다. 부림 사건 피해자들 일부에게 ‘무죄 판결’을 내렸던, 그래서 좌천됐던 판사는, 세월이 흐른 뒤 자신의 판결을 후회하며 ‘종북 신부 척결’에 앞장서고 있다. 무엇이 더 영화 같고 무엇이 더 허구 같은가. 자막이 다 올라가도 영화는 끝난 것 같지 않고, 극장 밖으로 나와 보는 세상은 여전히 영화 속 같기만 하다.
 

 
 

김원 (로사)
문학과 연극을 공부했고 여러 매체에 문화 칼럼을 썼거나 쓰고 있다. 어쩌다 문화평론가가 되어 극예술에 대한 글을 쓰며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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