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당에서 마주친 교회]

흔히 서품식 즈음에 새 사제에게 ‘착한 목자’ 되시라며 축복을 하기도 한다. 그런데 정말 사제를 ‘목자’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인지 고민해 봐야 하지 않을까?

물론 ‘신자를 양 떼에 빗대어, 신자를 이끌고 보살피는 성직자를 일컫는 말’이라고 어떤 사전에서 정의하고 있기도 하고, 신학적으로나 보편적인 인식에서나 필자의 의견은 부족하고 편협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점을 미리 고백한다.

사제는 목자인가?

▲ <착한 목자 예수>, 3세기경 카타콤바에 그려진 그림
“주님은 나의 목자, 나는 아쉬울 것 없어라”(시편 23,1)라는 성경 구절이 있다. 이 성경 구절을 두고 보면 목자라고 불릴 수 있는 사람은 주님, 그러니까 하느님뿐이다. 인간 가운데 하느님과 삼위일체를 이루는 존재는 아들 예수가 유일하다는 것이 성경과 교리를 통해 알려진 상식이다. 게다가 예수는 목자이면서도 하느님의 어린양이 되어 자신을 스스로 하느님 제단에 봉헌하지 않았나. 예수마저도 하느님 앞에서는 ‘어린양’이 되었다는 말인데, 인간일 뿐인 사제를 목자라고 부르는 것은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것이 아니라 성부 · 성자 · 성령의 삼위일체에 도전하는 것이 될 수도 있는 일이다.

결국 사제도 그저 한 마리 양일 뿐이니 목자라는 말은 지나쳐도 너무 지나친 호칭이 되고 만다. 사제에 대한 존경으로, 좀 더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면 양 떼 가운데 우두머리 양 정도라고 해줄 수는 있을 것이다. (몇 년 전, 어느 사제의 강론에서 이런 논조의 얘기를 듣고 깊게 공감했다. 그 사제도 사제를 목자라고 부르는 관행이 지나치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라 믿고 싶다.)

사제는 하느님의 어린양인 예수를 닮고 따르겠다고 하느님 앞에 선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세상 모든 사제는 그래서 예수의 어느 한 부분만을 닮은 사람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예수의 전 존재를 닮은 사람이란 세상에 존재할 수 없는 일이고, 한 명의 사제가 예수의 어떤 점 한 가지라도 닮는다면 그것이 진정 은총이라고 했던 것 같다.

누군가는 인간을 측은히 여기며 사랑하는 마음을 닮았을 것이고, 누군가는 기꺼이 세례자 요한에게 무릎을 꿇어 세례를 청하는 겸양과 용기를 닮았을 것이다. 전국 곳곳에서 벌어지는 시국미사에 함께하는 사제들처럼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 옆을 지켜주는 의리, 그들과 친구 되려는 노력을 닮기도 했을 테고, 정 닮은 것이 없으면 예수를 그린 여러 그림에 보이는 긴 머리칼, 멋진 수염이라도 닮았을 것이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

내 주변 가톨릭 신자들 사이에서 흔하게 술자리 안주가 되는 ‘달걀과 닭’ 논란이 있다. 사제의 ‘권위주의’는 어디에서 비롯되는가에 대한 것이다. 누군가가 어떤 신부는 이러저러하더라 하는 이야기를 꺼내면, 다른 이가 교회에서 힘 좀 쓴다는, 권위 좀 부리는 신자들이 신부들을 어떻게 대하더라, 또 여러 가지 편리를 제공해 사제들을 길들이기도 하는 것 같다는 얘기로 맞받아치며 다양한 일화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성당에서 신자로 활동하며 겪었던 어려움을 토로하곤 한다.

사실 사제의 권위가 교회를 지탱하는 기본 골격인 셈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가톨릭 신자는 거의 없다. 그래서 아들을 낳고 그 아이를 ‘교회에 봉헌’하겠다면서 신학교로 보내고 싶어 하는 부모들이 끊이지 않는지도 모르겠다. 성당 사무실에서 일하다 보면, 사제의 부모님들에 대해 ‘자기들이 신부인 줄 아나봐’ 하는 느낌이 들 정도로 알게 모르게 권위를 부리고 다닌다는 뒷이야기도 쉽게 듣게 된다. 또 사제들의 권위에 무임승차하곤 하는, 사제들과 무척 가까운 측근들의 활약(?)에 대한 이런저런 수다도 오가기 마련이다.

사제가 되려는 사람이 없고, 수도자도 부족하다는 가톨릭교회의 위기론이 만연한 요즈음은 본당에서 ‘신학생’이 나오기만 하면 잔치 분위기를 내기도 한다. 대신학교(서울대교구의 경우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에 들어간 신학생들을 ‘학사님’이라고 불러주면서 그 신학생과 부모에게 온갖 축하와 격려가 넘친다.

‘학사(學司)’가 무슨 뜻인가? 대학 졸업하면 받는 학사(學士) 학위를 받을 사람이라 학사라고 부른다는 설도 있지만, ‘신부〔司〕 공부〔學〕하는 사람’이란 뜻이 맞는다는 주장도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까지는 대신학교에 입학하면 ‘구마품’을 받고 성직에 입적하게 되어 있었고, 신부는 아니지만 성직에 입적하는 것으로 인정해 흔히 ‘학사님’이라는 존칭을 썼다고 한다. 현재는 ‘신학생’이란 용어를 사용하게 되어 있지만, 여전히 ‘학사’라는 호칭이 애용되고 있다.

20대 초중반부터 강사로 생계를 유지해오다 유명세를 얻은 사람 한 명를 알고 지냈다. 워낙 젊을 때부터 ‘○○○ 선생님’이란 호칭을 들어오던 그이의 경력이 10년가량 되었을 어느 때쯤, 누군가가 ‘○○○ 씨’라고 불렀을 때 “저 사람은 뭔데 나를 ○○○ 씨라고 부르는 거야” 하며 화가 났다는 얘기를 들으면서 잠시 멍했던 기억이 있다. 권위의식이 사람을 잡아먹는 건 순식간이라고 생각했다. 교회에서 활동하고, 교회 노동자로 일하면서 그이의 권위의식이 수시로 떠오른다.

그래서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생겼나 보다. 나이로 선후배 따지는 ‘나이주의’에 반대하는 입장에 있는 나도 가끔은, 본당 주임신부가 자기보다 훨씬 높은 연배의 신자나 직원에게 함부로 대하는 것을 볼 때, 기가 막혀 말을 잃는다. 신자들이 신학생과 사제에게 지나친 존중을 표하면서 결국 이러저러한 경우에서 보듯 사제들에게 권위의식을 심어주는 것은 아닌지 고민하게 된다. 그들도 처음엔 신자들의 과한 존칭과 대우가 어색했을 것이다. 그러나 ‘가랑비에 옷 젖듯’ 스스로 신자들의 대우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고, 그렇지 않은 경우 ‘공손’과 ‘격식’이 부족하다며 화를 내거나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는 일이 잦아진다면, 그는 이미 권위주의에 적응해 버렸다고 할 수 있다.

그런 권위의식, 권위주의는 다른 존재들에 대한 존중이나 공감이라는, 성직자의 의무에 해당하는 가치들을 배반하는 행동을 거침없이 하게 만든다. 사제에게 ‘성인사제(聖人司祭)’가 되라고 말만 하지 말고, 제발 부디, 우리 이제 사제들에 대한 조건 없는 ‘예우와 존경’을 철회할 수는 없을까?
 

림보 (필명)
장래희망 있는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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