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하는 신학 - 경동현]

교계제도가 본질적으로 봉사를 위해 있다는 것은 신약성서의 일관된 주제이다. 소위 교계제도(hierarchy)라는 것은 초기에는 공동체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데에 도움을 주는 봉사직무(ministerium)로 이해되었지만, 교회가 지리적으로 또 사회적으로 팽창하면서 많은 계층과 신분을 만들었다. 직무로 번역되는 ‘ministerium’이 작다는 의미의 영어 ‘minor’와 관련되었다는 것은,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순명과 겸손으로 자신의 직무를 받아들였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반면에 19세기부터 사용하기 시작한 ‘교도권’이라는 단어는 신약 성서의 ministerium과는 달리, 크다는 뜻의 magisterium(영어 major와 관련)으로 번역된다. 봉사를 강조한 신약 성서 시대 직무관이 오랜 그리스도교 역사 동안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 하겠다.

▲ <사도 전승>, 히뽈리뚜스 지음, 이형우 옮김, 분도출판사, 1992
3세기 초반에 나온 히뽈리뚜스의 <사도 전승>은 고대 교회가 교회 공동체를 중심으로 직무 임직을 이해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중요한 문헌이다. <사도 전승>의 구성은 3부 43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교계 제도와 성찬 전례에 관한 규범을 알려주는 제1부(2~14장)에서 고대 교회의 직무관을 선명하게 알려준다.

주교, 신부, 부제의 서품 예식은 모두 안수와 서품 기도로 이루어진다. 안수는 성령의 능력을 내려주는 의식이며, 서품 기도는 수품자가 맡게 될 사명과 책임 한계를 규정하면서 이에 맞는 은총을 비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이 직무 임직식에서 결정적인 동기는 성령의 선물이다.

신약 성서의 증언과 마찬가지로 <사도 전승>이 전하는 성령의 선물은 아래로부터 오는 공동체의 행위와 구분되지 않는다. 즉 “직무는 아래로부터 오되, 성령의 은사로서 위에서 오는 것으로 체험된다”(스킬레벡스, <교회직무론>). 공동체 전체의 뜻으로 선출된 지도자가 교회 구성원 모두의 기도로 임직을 받는 곳에서, 곧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신앙이 일치를 이룬 가운데서 성령의 은총은 교회에 전달되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 공동체의 수장으로 선출된 이에게 중요한 것은 교회에 의하여, 즉 구성원 전체에 의하여 공직자로 임명된다는 것이지, 그 지위 자체가 주는 권위나 힘이 아니었다.

▲ 1월 7일 정오 기준 청원 서명인원 중간 집계
‘정의평화민주 가톨릭행동 추진위원회’의 제안으로 지난 1월 3일부터 온라인 서명을 통해 진행되고 있는 새 추기경 청원 운동은 교회 직무를 철저히 교회 공동체 구성원의 인정에 기반을 두었던 초대교회의 전통을 되살린다는 뜻도 담고 있다. 온라인에서만 진행된다는 단점에도 불구하고 서명 시작 나흘 만에 6천명을 훌쩍 넘는 신자들이 서명에 참여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가톨릭행동이 서명 청원문에서 밝혔듯이 독선과 불통의 지도자로 인해 ‘민주주의’, ‘정의’, ‘평화’가 위협받는 한국의 현실 속에서, 이미 교회 안에도 뿌리 깊은 세속주의와 물질주의를 정화시키고 가난한 이들의 벗이 되어줄 추기경을 바라는 마음은 교회 공동체 구성원들의 간절한 염원의 반증이 아닐까! 지난해 6월 프란치스코 교황이 교황대사들과 만난 자리에서 “야심이 있는 이들, 주교직을 노리는 이들을 조심하라”고 말한 것은 교회 공동체 구성원의 염원이나 기대와 상관없이 성직에 서품되는 것에 대한 경고가 아니었을까?

1990년대 해방신학의 고장인 남미 브라질에서 종교학을 공부한 연구소의 선배가 상파울로 대교구의 사제서품 과정에 대해 들려준 이야기가 생각난다. 방학 때가 되어야 잠깐 동안 자신이 속한 본당 공동체에서 지낼 수 있는 한국의 신학생들과 달리 브라질 대부분의 교구는 신학생 시절부터 신학 공부에 못지않게 사목 현장 실습을 밀도 있게 진행한다고 한다. 신학교 수업이 오전에 끝나면 오후에는 대개 자신이 속한 본당 공동체의 현장에서 사목자로 일한다는 것이다. 특히 상파울로 대교구의 신학생들은 대개 빈민촌에 자리한 기초공동체와 연관을 맺으면서 하느님 백성의 일원으로서 가난한 이들과 함께 살아간다.

선배가 참석했던 한 신학생의 서품식은 신학생이 함께 생활한 빈민촌 마을회관에서 열렸다. 평소 한 형제처럼 지내던 빈민촌 사람들의 열광적인 환영 속에서 열린 서품식 광경은 체육관 행사로 굳어버린 한국 교회의 사제서품식과는 사뭇 다른 감흥으로 다가왔을 법하다. 신학자 스킬레벡스의 말처럼 그 신학생에게 사제서품식은 아래 기초공동체로부터 오되, 성령의 은사로서 위에서 오는 것으로 체험되었을 것이다.

교회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쇄신하는 가운데서 교회의 본래 역할과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 한스 큉은 이를 “세계를 위하여 존재하는 교회가 세계사의 변화 속에서 그 근원적 본질에 충실할 수 있는 것은 부동성(immobilismo)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적응성(aggiornamento)에 있다”고 말했다. 교회는 항상 역사와 인간 생활의 변화에 적응해야 하며, 개혁과 쇄신을 통해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의 기쁜 소식을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만약 쇄신에 대한 노력과 이에 따른 제도적 개혁이 따르지 않는다면, 교계 제도의 진정한 권위는 권력화될 것이고, 많은 신앙인들이 교회를 떠날 것이다. 또한 현대 문화를 거부하고 쇄신을 포기한다면 현상 유지를 옹호하는 보수 세력일 뿐이라는 혐의에 대하여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번 새 추기경 청원 운동이 서명에 참여한 모든 형제, 자매들에게 교회쇄신의 필요성을 몸소 체험하는 배움의 장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경동현
(안드레아)
우리신학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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