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노동청년회 창립 50주년 기념 연속 기획 인터뷰]
전태일 열사의 정신 마음에 품고 현장활동
[1970년 당시, 전태일은 청계천 평화시장 섬유공장의 재단사로 일하면서 어린 여공들의 열악한 노동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다. 여공들이 14~15시간을 일하고 받는 일당은 당시 차 한 잔 값과 같은 50원 정도였다. 그런 장시간 노동과 저임금에 시달렸던 어린 여공들이 폐렴에 걸려 죽어가는 것을 보고, 사용주에게 항의도 해보고 노동부에 진정서도 내고, 사방팔방으로 하소연하고 다녔지만 소용이 없었다. 세상은 듣지 않았다. 전태일 열사는 온몸을 던져서라도 비인간적이고 가혹하리만큼 열악한 노동환경을 사회에 알려야겠다고 결심했다. 끝내 온몸에 신나를 끼얹고 산화해갔다. 불길 속에 휩싸이는 고통 속에서도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라고 외치며 마지막 숨을 몰아쉬었다.-<바자울> 11월호에 게재된 박주미씨의 글 중에서-]
23살의 청년이 온몸에 신나를 끼얹고 산화하면서 처절하게 부르짖었던 "근로기준법을 지켜달라"는 외침은 노동문제에 대한 사회의 인식을 넓히는 계기가 됐음은 물론, 박주미씨에게는 그런 전태일 열사의 삶이 인생의 바다를 헤쳐나가는 등불이 돼주었다.
"비정규직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해 제정된 '비정규직 보호법' 때문에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일터에서 쫒겨났습니다. 이랜드 뉴코아 여성 비정규직 1천여 명, KTX 여승무원들, 기륭전자 비정규직들, 그리고 강남 성모병원 노동자들도 자신을 보호해준다는 '비정규직 보호법' 때문에 오히려 일자리를 빼앗기고 거리로 내몰렸습니다. 헌법에도 보장된 노동자들의 권리, 누구나 행복할 수 있는 권리, 일할 권리, 그리고 단결권과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 등 노동 3권이 온전히 보장되고 있다면 근로 빈곤층이 늘어날 수 없고 소득 양극화로 사회 전체가 극심한 양극화에 이르는 것을 막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우리가 발딛고 서 있는 이 사회가 갈수록 어려운 사람들을 더욱 어렵고 힘들게 하고 있는 것이 안타깝다는 박주미씨. 온몸으로 노도와 같은 노동현장을 지켜온 박주미씨의 중심에는 인간을 사랑하고 노동을 사랑했던 전태일이 있었고, 더 나아가 노동자 예수의 땀과 눈물과 사랑이 함께하고 있었다.
1987년 1월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으로 촉발된 대학생들의 시위에 참가했던 이한열이 최루탄에 맞아 숨지자 이에 분노한 시민들과 학생들에 의해 일어난 6월항쟁은 민주화의 서막으로 울려퍼진다.
1987년 6월항쟁 때 부산 시민들도 가톨릭센터에 모여 농성을 했다. 농성에 참여하지 못하는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후원금을 보냈다.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이 변했다. 1980년 광주의 봄부터 시작된 민주화를 향한 국민들의 염원이 6월항쟁을 정점으로 서서히 꽃피우기 시작한 것. 민주화를 촉구하는 시민과 학생들의 함성으로 사회는 요동쳤고, 그 중심에 한국 천주교회가 있었다. 부산의 시민들이 가톨릭센터에 모여 농성한 것도 그같은 맥락이었다.
결국 당시 여당이었던 민주정의당 대통령 후보 노태우에 의해 발표된 6·29 민주화선언으로 제5공화국 헌법이 개정됐고, 새 헌법은 국민의 대통령 직선제에 근거를 마련해주었다.
1987년 6월항쟁 후 가톨릭 노동상담소 태동, 창립 멤버로 활약
이때부터 노동운동은 급물살을 탔다. 노동자들은 6월항쟁을 통해 꿈쩍도 하지 않을 것 같았던 독재권력이 자신들을 포함한 민중의 힘에 굴복하는 것을 눈으로 확인했다. 이 사회에서 가장 큰 집단을 이루는 노동자집단이 자신의 힘을 깨닫고 노동현장에서의 투쟁을 적극 주도하게 된 것이다.
"1987년 7월과 8월에 노동자 대투쟁이 있은 후 부산에도 가톨릭 노동상담소에 대한 논의가 있었습니다. 6월항쟁 때 모아졌던 시민 후원금 중 650만원의 돈이 남았고,이 돈은 누구의 것도 아니었죠. 이 돈을 종잣돈으로 노동문제 상담소를 만들어 신자 1명, 비신자 1명이 함께 운영하자는 밑그림이 그려졌죠. 그런 한편 노동자들이 정치활동을 하면서 노동자의 권익을 보호하고 찾아야 한다는 담론이 형성되기 시작했어요."
가톨릭노동상담소는 2년 여의 준비기간을 거쳐 1989년에 정식으로 문을 열었고 부산의 노동자 박주미씨가 실무 일을 맡았다. 이 일을 계기로 부산교구 JOC 회장, 전국 JOC 연합회 풀타임 활동 등을 통한 현장을 통한 노동자 운동가를 거쳐 노동자들에게 힘이 되어주는 멘토로 거듭나게 된다.
노동자들의 벗 박주미씨는 2002년부터 2006년까지 외도 아닌 외도를 하게 된다. 이 땅에 찾아온 민주화 이후 노동운동은 수많은 노동자들의 삶의 지위를 높여주었으며 정치현장에도 진출, 노동자들의 권리를 대변하게 된 것. 그녀는 민주노동당 부산광역시의회 비례대표 의원으로 선출되어 의정활동을 하게 된다. 그녀의 시의회 활동은 부산시 공직계에 당혹감을 선사하면서 신선한 반향을 일으켰다.
시의회 보건환경위원회에 소속된 그녀가 처음 맞닥뜨렸던 일은 환경국 소관의 음식물 쓰레기와 관련된 사안이었다. 12억의 예산이 소요된 음식물 쓰레기 처리장을 둘러싼 비리와 부정이 있다는 제보를 받았고 그녀는 그것을 알아보기로 했다. 음식물 쓰레기가 퇴비와 사료로 재활용돼 자원으로 활용된다고 알려진 것과 달리 정작 쓰레기 처리장에서 처리된 재활용 음식물 쓰레기는 퇴비로도, 사료로도 쓸 수 없으며 심지어 해양에 투기돼 바다를 오염시킨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음식물 쓰레기가 어떻게 처리되며 퇴비로는 어느 정도, 어떻게 소요되며 사료는 어떤 농가에 어떻게 보급되는지 알고 싶었다.
시의원 등원 후 환경, 사회복지 부문에 괄약할 활동 펼쳐
"7월에 첫 등원을 했고 7월 말부터 음식물 쓰레기 처리시설을 돌아보기 시작했어요. 새벽 5시부터 음식물 쓰레기장을 다 다녔어요. 여름이라 쓰레기 냄새가 진동했고, 비가 오는 날이면 질퍽거려 현장에 다니기 힘들기도 했어요. 사실 역겹기도 했죠. 하지만 그것이 내가 해야 할 일이라면, 그리고 내가 할 수밖에 없는 일이라면 최선을 다해 조사하고 결과를 밝혀야 했어요. 쓰레기 문제는 시의원 임기 내내 붙들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활동으로 부산시 환경미화원 노조가 결성됐다. 박주미씨가 현장을 다니면서 쓰레기 처리 문제를 파헤치는 것을 보고 힘을 얻었다고 한다. 환경 미화원의 임금문제와 운영체계 문제 등이 계속 거론되면서 개선의 여지가 보였다.
비회기 때도 조사하러 다니는 그녀를 보며 공무원들은 긴장했고, 그녀의 입에서 무슨 말이 터져나올지 귀를 쫑긋했다. 언론의 관심이 집중된 것은 물론이었다. 그녀는 "거북스럽다", "융통성이 없다"라는 비난도 감내해야 했다. 반면 하급직 공무원들의 인기를 받기도 했다. 그들은 새로운 제보를 했고, 또 힘든 일이 있으면 그녀에게 하소연하기도 했다.
박주미씨가 시의원으로 있으면서 스스로도 놀라며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게 된 것은 사회복지 부문이었다. 인생의 절반 이상을 노동현장을 누볐던 그녀에게 사회복지 문제는 어쩌면 관심 밖의 일이었을런지도 모른다.
"그때까지는 정부에서 시혜적으로 행하는 복지정책을 부정적으로 봐왔지 않나 생각돼요. 하지만 지역사회 내의 복지계 종사자와 시민활동가를 만나면서 복지에 대한 관점이 바뀌었어요. 복지는 관료적, 행정적인 부분도 필요하지만 상당 부분 시민권에서 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지요. 현장의 얘기를 의회에 전하고, 현장의 얘기를 전할 수 있는 통로를 마련했지요.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
사람들은 "박주미 의원이 있어 행복하다"고 말했다. 복지예산 확보운동을 시작했다. 그녀는 2005년 부산시 예산 중 10%를 복지예산으로 확보하기 위해 뛰어다녔다. 부산에서 사회복지연대가 발족됐다. 그녀는 장애인들도 제대로 된 시민의 권리를 찾아야 하고,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였고, 그것을 토대로 제도권에서 복지정책이 실시돼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부산 시민사회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킨 그녀의 의정활동이 끝났지만 사회복지와 맺은 인연은 쉬 정리할 수 없었다. 요즘도 그녀는 사회복지 공동모금회 부산지부 이사를 6년간 연임하고 있고, 그녀가 함께 만든 장애인 자립생활센터 이사, 사회복지 연대 이사 등을 맡아 사회복지를 위해 애쓰고 있다.
"행정 공무원과 설전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복지예산과 관련해 차상위 계층의 지원을 늘여야 한다고 했을 때 복지 과장이 '의원님, 복지는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가는 것이 아닙니다'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그렇게 생각한다면 기획재경부로 자리를 옮겨라'고 응답했어요. 이것이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나기도 했어요."
의정활동은 그녀에게 사회에서 소외되고 고통받는 이들이 인간으로서의 삶의 질을 높이고 권리를 찾기 위한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해 준 또하나의 배움터였다고 한다.
언제 어느 곳에 있거나 자신의 역할이나 해야 할 일에 충실했던 박주미씨는 "이제 그동안 내 삶의 터전 안에서 치열하게 살아냈던 것을 풀어내면서 또 다른 나눔의 삶의 살고 싶다"고 말한다. 그것은 그녀가 정치활동을 접고 바자울 배움터로 돌아온 또하나의 이유이기도 하다.
"이 시대는 정말로 메말라 있습니다. 일터에서나 일터 밖에서나 '인간'에 대한 존중이 점차 없어지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인간성 회복이야말로 우리 사회를 바꿔줄 또 하나의 지표입니다. 노동자들도 스스로 변해야 합니다. 투쟁하면서도 결코 인간의 본성을 잃어서는 안되겠지요. 바자울 배움터에서 인성교육을 통해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내적 작업을 쉼없이 해나갈 수 있는 길을 만들어 주었으면 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 내 안의 나를 찾아가는 여정은 사실 끝이 없는 길이 아니겠습니까?"
해가 바뀌어 전태일 열사가 노동자의 권리를 외치며 세상에 불을 지피고 떠난 지도 39년 째가 된다. 박주미씨는 새해를 맞으며 가만히 자신을 들여다본다. 먼저 간 노동운동가들의 정신을 계승하고, 삶을 살고 있는지에 대해 스스로에게 물음을 던진다.
지금 현재 노동현장은 어떤가? 노동법이 노동자를 보호하고 법에서 규정하는 노동자 권리를 노동자들이 온전히 누릴 수 있는 사회 분위기가 만들어지고 있는가? 우리 사회는 일하는 사람들이 주어진 법의 권한을 찾을 수 있는 제도장치를 실행할 의지가 있는가? 여전히 그녀 가슴속에 불타고 있는 생각들이다. 근로 빈곤층이 날로 늘어나고 있는 것도 그녀에게는 또다른 아픔이다.
'과거에 볼 수 없었던 경제 위기'라는 암담한 현실의 터널을 지나면서 박주미씨는 새롭게 꽃피울 노동자의 봄을 위해 JOC 투사로서의 삶을 불태웠던 그 마음을 곧추세운다. 이 사회가 노동자들에게 '기회의 가능성'마저 빼앗아 가지 않도록 기도한다. (끝)
상인숙/지금여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