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하는 신학 - 황인수]

남녘에 있는 작은 수녀원에 다녀왔다. 복자 샤를 드 푸코의 영성을 사는 작은 자매들의 집이다. 손님방에서 하룻밤을 묵고 일어나 식당에 갔더니 한쪽에 연탄난로가 있고 그 곁에 집게가 꽂힌 예비용 연탄 한 장이 놓여 있다.

수녀님이 물으신다. “수사님, 호박죽 좋아하세요?” “예, 좋아하지요.” 수녀님이 웃으신다. “잘 됐네. 어제 끓인 호박죽이 있는데 미사 끝나고 먹으면 되겠네요.” 그러고는 호박죽 냄비를 연탄난로 위에 놓인 들통 위에 얹으신다. 내가 사는 서울 수도원에서라면 아마 전자 오븐에 넣고 몇 분 돌렸을 텐데. 연탄난로와 들통, 연탄집게. 요사이 보기 힘든 살림살이들이다. 잠시 불을 쬐며 들통 위에서 데워지는 호박죽 냄비를 보고 있으려니 ‘아, 이 집에서는 가난이 지켜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가난을 지키는 것은 예수님을 모시는 가장 좋은 길이다. 우리 주님은 무엇보다도 가난한 분이셨으니 가난을 지키다 보면 절로 주님을 모시게 되지 않겠는가. 미사를 마치고 수녀님들과 함께 먹은 호박죽은 꿀맛이었다. 가난의 집은 환대의 집이기도 하다. 가난한 사람들은 형제, 자매들을 알아보는 눈을 가진 사람들인 까닭이다.

무위당 장일순 선생이 어디선가 당신의 감옥 체험을 나누신 적이 있다. 자유당, 민주당의 국회의원들과 함께 갇힌 적이 있었는데 그이들은 사식이 들어오면 돌아앉아 혼자서 먹지만, 이른바 잡범이라 불리는 사람들은 자기 사식을 같은 방 사람들과 나누더라는 것이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되어라.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니”(마태 5,3). 중요한 것은 이웃을 형제, 자매로 볼 줄 아는 마음이고, 사람은 저 혼자 사는 것이 아님을 아는 것이 마음의 가난이라고 가르치시는 것 같다. 사실 이 ‘가난한 사람은 복되다’는 말은 신약성서에서 예수께서 처음 입을 열어 가르치신 말씀이기도 하다. 마태오 복음의 산상수훈이 바로 이 말씀으로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이 말씀으로 당신 가르침을 시작하셨을까? 다른 말씀으로 시작하실 수도 있었을 텐데.

▲ <인노첸시오 3세의 꿈>, 지오토, 1299년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처음 머무신 곳은 가난의 집이었다. 그리고 세상에 오신 그분을 맞아준 이들 또한 가난한 이들이었다. 예수님은 나자렛의 목수 요셉과, 역시 대단할 것 없는 마리아의 가정에 태어나셨고, 그분을 처음 찾아준 이들도 왕궁의 헤로데나 예루살렘 성전의 제관 같은 이들이 아니라 들에서 밤새 양들을 돌봐야 하는 양치기들이었다. 세상에 오셨을 때 그분을 맞아준 이들이 이렇듯 가난한 사람들이었으니 예수님이 지상에서 펼친 첫 가르침을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축복으로 시작하신 것은 당연한 일인 것 같기도 하다.

그 뒤 세월이 흘러 그분의 집이 허물어지고 돌보는 사람이 없어졌을 때, 이탈리아의 한 젊은이가 주님의 목소리를 듣는다. “가서 나의 집을 재건하여라.” 아시시의 성자 프란치스코의 이야기다. ‘거룩한 가난뱅이’(santo poverello)라고도 불리는 프란치스코의 소명은 하느님의 집인 교회, 즉 가난의 집을 재건하는 것이었다. 탐욕 속에서 무너져가는 하느님의 집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일이었다. 그리고 성 프란치스코의 시대로부터 800여 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다시 프란치스코의 목소리를 듣는다.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은 인간 생명의 가치를 보호하는 분명한 한계를 제시합니다. 이와 같이 오늘 우리는 ‘불평등과 배제의 경제에 아니요’라고 말해야 합니다. 이 경제는 살인하는 체제입니다. 길거리에서 노숙하다 죽은 노인 이야기는 뉴스가 되지 못하지만 주가가 2포인트 떨어진 것이 뉴스가 되는 현실, 이것은 안 되는 일입니다. 이것은 배제입니다. 굶주림으로 고통당하는 사람들이 있는데도 한쪽에서는 음식이 버려지는 현실이 더 이상 용납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불평등입니다. 오늘날에는 모든 것이 약육강식의 논리, 경쟁의 논리에 매몰됩니다. 이 논리 안에서는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잡아먹습니다.” (<복음의 기쁨> 53항에서)

교황 프란치스코는 권고 <복음의 기쁨>에서 탐욕으로 물들어 버린 우리 시대의 경제체제를 강한 어조로 비판한다. 구미 언어에서 쓰이는 ‘경제’(economy)라는 말은 그리스어 ‘집’(oikos)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교황의 말을 빌리면 우리의 경제체제는 ‘배제(exclusion)의 경제’다. 이 경제체제, 즉 이 ‘집’은 사람들을 밀어내고 배제하는 집이다. 예수께서는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요한 14,2)고 하셨지만 우리들의 집은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잡아먹는” 집인 것이다.

얼마 전, 세계 이곳저곳을 다니며 피정 지도를 하는 분을 만난 적이 있다. 그분 말씀으로는 나라마다 특징적인 죄들이 있는데 한국인들에게 특징적인 죄는 ‘미움’인 것 같다는 것이다. 그 말씀을 생각하다가 과연 그렇다는 결론을 얻었다. 이 땅의 사람들은 남북으로 갈려 싸우는 것도 모자라 이제 동서로 나뉘고 계층과 세대, 도시와 농촌, 온갖 부분으로 분열되어 서로 미워하고 적대시한다. 왜 그럴까. 이념이니 종북이니 말이 많지만 분열을 부추기는 것은 실은 탐욕이다. 나누지 않으려는 마음, 혼자서만 누리려는 욕심이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무너져가는 당신의 집을 다시 세우라는 하느님의 초대, 프란치스코의 초대에 귀 기울이는 일이 아닐까. 무너져가는 가난의 집을 다시 세우고 거기 형제, 자매들이 들 자리를 만드는 것, 그렇게 하느님의 집을 재건해 달라는 초대가 2014년 새해 우리 앞에 놓여 있다.
 

 
 
황인수 신부 (이냐시오)
성바오로수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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