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알청춘일기 - 오디]

연말은 회사원들에게 있어 ‘봉사활동’의 황금기다. 다른 시즌에 비해 유독 연말에는, 봉사활동 할 곳을 구하기 위해 몇 달 전부터 ‘예약’을 해야 했다. 물론 회사에서 봉사활동하러 가는 곳은 ‘적당히 유명하고’, ‘적당히 수도권에 있어 교통이 불편하지 않으며’, ‘법인 기부금영수증 발급이 가능한’ 곳이어야 한다. 이 모든 것을 충족시키는 선에서 찾다 보니 더 한정된 범위에서 찾아야 했고, 그래서 구하기가 좀처럼 쉽지 않았다.

나는 회사에서 사용하는 ‘봉사’라는 말이 너무 싫었다. 굳이 주말에, 아무런 보상도 없는데 자발적으로 봉사활동에 참여하는 회사 직원들은 분명 “착한” 사람들일 것이다. 노숙인을 웃음으로 대하고, 팔이 부러져라 연탄을 나르는 직원들은 분명 다른 사람들로부터 “좋은 일 하셨네요”라는 말을 들을 것이다.

그러나 이 단순하기 짝이 없는 ‘봉사활동’이 나에겐 너무 복잡하게 느껴졌다. 우리로부터 연탄을 기부 받는 판자촌 사람들이, 얼마 전 뉴스에 나온 빨간 띠 두르고 재개발 반대 시위하다가 결국 패하고 집을 잃은 사람들이란 생각은 해보았는지? FTA 타결만 아니었으면 우리한테 후원금 따위 받지 않고도 얼마든지 자기 직업 갖고 살 수 있었던 사람이었던 건 아닌지? 저 고아원 아동이, 평소 당신이 자녀에게 “같이 어울려 놀지 말아라” 하고 당부하는 그 아동은 아닌지? 이런 고민 없이 봉사활동을 하는 것은 오히려 그들(봉사를 ‘받는’ 이들)과 우리(봉사를 ‘해주는’ 이들)을 더 공고하게 가르는 역할을 한다는 생각이 들어 불편했다.

가톨릭학생회에서는 ‘농활’을 ‘농촌공소활동’의 약자라고 한다. 행여나 ‘농촌봉사활동’이라고 말하는 후배가 있을 때, 나는 눈에 불을 켜고 “봉사는 무슨!”이라고 말하곤 했다. 공소활동이란, 농촌에서 신앙공동체 생활을 하며 그 안에서 하느님을 만난다는 것이고, 이를 위해 동아리 회원들은 가기 전부터 사전 교육을 통하여 우리가 무엇을 배우고 느껴야 하는지 고민한다. 농활에 가서도 일만 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프로그램을 만들어 농민들과 친분을 맺는다. 농민들을 일방적으로 ‘돕는’ 봉사활동이 아니라, 농민은 남이 아니라는 마음으로 연대하는 것이다.

그래서 농활은 단순한 일회성 경험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 활동 안에서 사람과 사람간의 관계가 형성되고, 그것은 도시에 돌아온 뒤에도 이어진다. 더 이상 농민의 이야기가 남 이야기가 아니게 되면서, 뉴스에서 접하는 그들의 소식에 함께 가슴 아파하게 되고, 연대하게 되는 등 농촌에서 경험한 신앙공동체가 일상에서도 지속된다.

회사에서 이런 공동체 형성은 바라지도 않는다. 다만 봉사활동도 사람이 사람에게 하는 것인데, 회사에서는 봉사를 ‘받는’ 사람에 대한 이해가 없는 상태에서 활동 위주로만 계획하는 것 같아 안타까웠다. 그러나 회사 사람들을 대상으로 판자촌 사람들이 왜 여기 모였는지, 지금 또 쫓겨날 위기에 있는지, 어떤 대규모 아파트가 들어설지, 재개발이 만드는 양극화가 무엇인지……, 이런 얘기를 할 자리는 없었다. 이들에게 봉사란 단지 하루의 이벤트에 불과했다. 그나마도 ‘착한’ 이들이 이 하루의 이벤트에 자신의 자유 시간을 투자하는 것에 감사할 뿐이었고, 보다 감정적으로 호소하여 ‘돈’을 기부하도록 하는 것이 회사원들을 대상으로 한 ‘차선책’일 뿐이었다.

▲ “농활은 단순한 일회성 경험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 활동 안에서 사람과 사람간의 관계가 형성되고, 그것은 도시에 돌아온 뒤에도 이어진다.” (* 사진은 칼럼 내용과 직접 관련이 없습니다.) ⓒ한수진 기자

하늘이 내 뜻을 아셨나. 나는 회사 봉사활동에 대해 누구보다 눈꼴사납게 바라보던 입장이었는데 뜻밖에 이듬해에 내가 봉사팀 담당자가 되었다. 엄청난 도전이었다. 일이 늘긴 했지만, 회사 봉사활동에 대한 불편함을 내 손으로 해결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면서 설레기도 했다.

나는 기왕 하게 된 거 ‘착한’ 봉사보다는 ‘의미 있는’ 봉사를 하고 싶었다. 회사에서 해줄 수 있는 차선이 ‘돈’이라면, 그렇게라도 하자. 국회의원들이 줄을 선 곳보다는 별로 유명하지 않은 곳을 찾아보고자 발품을 팔았다. 그러나 지나치게 영세한 단체는 기부금영수증을 끊어줄 만한 여건이 안 되었다.

또한 회사에서는 ‘인증샷’도 무시할 수 없는데, 기존에는 ‘○○단체에 ○○봉사활동을 하러 갑니다’라는 말 하나면 끝이었지만 너무 새로운 곳을 갈 경우에는 여기가 뭐 하는 곳인지 구구절절 써야 했고, 한번도 못 들어본 곳에 선뜻 동참하겠다고 나서는 직원이 얼마나 있을지도 미지수였다. 위치가 너무 멀거나, 봉사활동 소요시간이 너무 길어도 제외되었다.

결국 내가 맡은 후에도 별로 달라진 건 없었다. 다만 쉽게 할 수도 있는 일을 어렵게 재차 고민만 하다가 결국 기한이 다가와서, 괜한 자괴감에 가슴만 내리치며 기존에 했던 대로 하는 등의 패턴을 반복하였다. 봉사활동을 다녀와서 사내 소식지에 기고할 글을 쓸 때마다, 봉사를 ‘받는’ 사람들의 안타까운 현실에 대해 알리는 문장을 어떻게 하면 세련되고 설득력 있게 쓸 수 있을까 고민하였지만, 어설프게 썼다가 설득은커녕 괜히 불편하게 만들고 거부감만 조성할까봐 썼다 지우기를 반복했다.

내 안에서의 고민만 돌고 돌았다. 이런 식의 봉사활동을 관습적으로 반복함으로써 오히려 ‘가난한 이들의 존재’를 우리의 봉사활동을 위해 있어야 하는 당연한 존재로 못 박게 되진 않을까. 봉사활동이 없는 사회를 꿈꾸기보다 내가 다양한 봉사활동을 하게 됨에 만족하게 되는 건 아닐까. 그러면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 계급이 공고해지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한편 봉사활동 참가자들의 ‘착한 마음’을 일상에서의 고민으로 이어보고 싶은 욕심도 들었다. 그때 봉사활동을 함께했던 동료들은 참 착하긴 했다. 궂은 봉사활동이 끝나고 우리끼리 가진 회식 자리에서 “어려운 사람들 보고 나왔더니 고기 먹기 참 미안하다”고 말했던 그 선한 눈빛을 아직도 기억한다. 조금 더 시간이 있었다면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을 텐데. 회사를 다니는 동안에는 나 역시도 좀 더 마음을 열고 대화를 나눠볼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착하기만 한 것은 능사가 아니다. 감정적으로 ‘불쌍하다’, ‘슬프다’에서 끝내는 것은 그들과 함께 사회를 살아가는 구성원으로서 좀 무책임하다. 엄연히 성인이고, 이 사회에 정확히 한 표의 책임이 있는 유권자인데 말이다. 진짜 불쌍하다고 느껴진다면 보다 실천적으로 나아가야 할 필요성도 있다고 본다.

봉사활동이 필요 없는 사회를 꿈꾼다. 한쪽이 다른 한쪽에게 일방적으로 주기만 하는 봉사활동보다는 서로 부족한 부분을 메워주며 공생하는 사회를 꿈꾼다. 그런데 나는 그런 사회를 만들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여러 고민을 하다 보면, 회사 내부에서는 불가능하더라도 대신 좀 더 유연한 사조직을 만들면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결론이 난다. 독서 모임, 영화 모임, 종교단체 모임 등 회사 밖에서는 좀 더 심도 있는 대화가 가능할 것이란 기대가 있다. 가톨릭학생회에서 함께 먹고 자며 보냈던 공소활동처럼, 활동과 관계, 그리고 의식이 이어지는 모임이 있었으면 좋겠다. 내가 말했으니 이거 내가 만들어야 하나? 말 나온 김에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하겠다.

(* 고백합니다. 저 사실, 회사 이력서 넣을 때 경력에 ‘농활’을 썼는데, ‘농촌봉사활동’이라고 썼어요. 그래서 죄를 용서받고자 첫 월급 탄 이래로, 농활 갔던 안동 가톨릭농민회에서 꾸준히 소비 중이에요. 하하하;;;)


오디
(필명)
서울 가톨릭 대학생 연합회 출신. 참여연대 회원 노래모임 참좋다 7년째 활동 중.
회사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음악으로 풀다가, 회사를 관두고 음악치료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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