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 정중규]

“이 결단을 두고 얼마나 오랜 시간을 망설이고 괴로워했던가? 지금 이 시각 완전에 가까운 결단을 내렸다. 나는 돌아가야 한다. 꼭 돌아가야 한다. 불쌍한 내 형제의 곁으로, 내 마음의 고향으로, 내 이상의 전부인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 곁으로. 생을 두고 맹세한 내가, 그 많은 시간과 공상 속에서, 내가 돌보지 않으면 아니 될 나약한 생명체들.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 조금만 참고 견디어라. 너희들의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하여 나약한 나를 다 바치마. 너희들은 내 마음의 고향이로다. …… 오늘은 토요일. 8월 둘째 토요일. 내 마음에 결단을 내린 이날. 무고한 생명체들이 시들고 있는 이때에 한 방울의 이슬이 되기 위하여 발버둥치오니, 하느님,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주시옵소서.”

노동 현실을 바꾸기 위해 자기 한 몸 바치기로 결심하면서 하늘나라로 가기 석 달 전에 삼각산에서, 가히 겟세마니적 고통과 번민 속에서 전태일 열사가 썼던 어느 날의 일기이다. 이보다 더 인간에 대한 사랑이 절절할 수 있을까. 진보란 무엇인가. 그것이 인간다움에 대한 갈망이요 실천하려는 의지라면 이 이상 더 진보적일 수 있을까. 전태일, 그에게 이념의 잣대를 들이댈 수는 없겠지만, 그는 누구보다 진보사회를 꿈꾸고 그를 위해 자신을 송두리째 바친 청년이었다.

▲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의 한 장면

하지만 1970년 11월 13일, “근로기준법을 지키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는 구호를 외치며 온몸을 불살라 숨져간 ‘노동의 불꽃’ 전태일의 고향이, 지금은 대한민국 정치에서 보수의 중핵 도시로 자리 잡은 대구임을 알고 있는 자가 몇이나 될까. 1948년 8월 26일 대구시 중구 남산동에서 태어난 전태일은 어린 시절을 대구에서 보냈으며, 스스로도 명덕초등학교 운동장에 있는 야간학교인 청옥고등공민학교에서 공부한 1년이 가장 행복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전태일의 고향 대구에서 ‘전태일장학재단’이 1월 중에 첫걸음을 내딛는다. 한국일보 서화숙 기자의 제안으로 천주교 대구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가 주관하게 되는 사업이다. 이것이 지난 수십 년 동안 수구세력의 본거지라는 오명을 지닌 대구에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작은 불씨가 되기를, 죽어있던 대구의 혼이 다시 깨어나게 만드는 계기가 되기를 진심으로 소망한다.

사실 일제강점기와 해방정국 미군정 시기에 이르기까지 대구는 ‘조선의 모스크바’로 불릴 만큼 좌익운동이 왕성하던 진보의 메카였다. 한국아나키즘학회 창립에 동참하면서 접하게 된 아나키즘의 역사를 살펴봐도 아나키스트 1세대는 대부분 대구 지역 출신이었고, 일제시대 독립운동가를 가장 많이 배출한 곳도 이 지역이었다.

학문과 문화적 전통에 있어서도 대구는 뿌리 깊은 지성의 도시였다. 이상화, 이육사 같은 지사적 민족시인들을 비롯하여 국채보상운동의 선구자로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을 일찍이 실천한 대구 지역 거상 서상돈 등과 같은 걸출한 인물은 그런 바탕에서 나왔으며, 이것이 일제시대부터 문무 양면으로 자존심이 센 저항의 도시로 만들었다. 더 멀리는 대구는 조선시대 5현 가운데 김굉필, 이언적, 이황 선생의 출신 지역이며, 개혁세력인 남인의 근거지기도 하였다.

그런 대구가 이제와 같은 수구 지역으로 고착하게 된 결정적 계기를, 나는 1946년 10월 1일 대구시청 앞에서 미군정에 경제대책 마련을 요구하는 시위로 시작되어 친일파 척결과 인민자치를 요구하며 대구 · 경북 전체로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갔던 대구항쟁의 좌절에 대한 반동적 행태에 있다고 본다. 동학혁명과 3 · 1운동과 더불어 현대사의 3대 민중항쟁이었던 대구항쟁이 미군정의 무자비한 진압과 우익집단에 의한 좌파세력 소탕전으로 그 기세가 꺾이고 지하로 숨어들면서 대구의 기백과 불굴의 혼도 움츠러들어 깊고 오랜 동면에 들어가게 되었던 것이다.

거기에다 대구 출신 극우 군벌 세력들이 제3공화국 이후 연이어 정권을 잡게 되면서 대구는 메피스토펠레스에게 영혼을 판 파우스트처럼 정신마저 혼탁해진다. 한쪽 날개를 완전히 잃어 극도로 편향되어 버린 대구는 지극히 배타적인 지역색과 몰가치적인 권력지향적 성격만 드러내며 어느 순간 씻을 수 없이 상처받은 외로운 도시가 되어버렸다.

‘전태일장학재단’의 설립은 또 다른 의미로 대구의 상처를 치유하는 역할을 하게 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자신은 늘 배곯는 힘든 처지였는데도 불구하고 더 힘들게 일하는 여공들에게 기꺼이 도움을 주었던 전태일의 사랑을 이어받고자, 전태일장학사업도 성적을 기준으로 지급하는 다른 장학금들과는 달리 저소득계층의 해고된 노동자 자녀들을 우선으로 보살피는 나눔 운동으로 펼칠 예정이다. 그를 통하여 전국 학생 자살률 1위라는 불명예를 안을 만큼 타인을 눌러 이겨야 자신이 산다고 믿는 살벌한 경쟁이 펼쳐지는 비교육적인 도시가 아니라, 대구가 잃어버린 공동체 정신을 회복하고 힘없고 가난한 이들에게 기를 북돋아주는 인간적인 도시가 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박정희의 개발독재 정신을 높이 받드는 이 대구에, 전태일의 살신성인 영혼을 되살리는 일은 바로 대구를 다시 살리는 그런 의미 있는 작업인 것이다. 마침 KTX 민영화 저지 파업을 하고 있는 철도노조 지도부를 검거하겠다면서 박근혜 정권이 민주노총 사무실을 침탈하는 야만을 저질렀는데, 대선 후보 시절 노동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도 청계천 전태일 열사 동상 앞에 헌화하려 시도하던 행동과 대비되어 분노를 일으켰다. 박정희와 전태일의 싸움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기에 전태일이 학창시절을 보냈던 대구 남산동 명덕초등학교(청옥고등공민학교의 현재 터)에 그를 기억할 표지판이라도 만들고 싶고, 2.28기념공원 같은 곳에 전태일 동상이라도 세우고 싶다. 그것은 ‘잃어버린 삼십년’의 대구를 되찾는 것과 인간 전태일을 고향에서 되살리는 한 길이 될까.

▲ 한국일보 서화숙 기자의 칼럼 ‘대구와 전태일’이 실린 대구 정평위 소식지 <함께꿈> 11월호. 서화숙 기자의 제안을 받아들여 천주교 대구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가 주관하는 ‘전태일장학재단’이 1월 중에 첫걸음을 내딛는다.

사실 전태일의 사람 사랑은 예사 사랑이 아니었다. “나는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감정에는 약한 편입니다. 조금만 불쌍한 사람을 보아도 마음이 언짢아 그날 기분은 우울한 편입니다. 내 자신이 너무 그러한 환경들을 속속들이 알고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라는 고백에서 드러나는 그 마음으로 전태일은 버스 값을 털어서, 점심을 굶고 있는 시다들에게 1원짜리 풀빵을 사주고 청계천6가부터 도봉산까지 두세 시간을 걸어가기도 했는데 이런 일은 버릇처럼 되어 그 뒤 그가 죽을 때까지 3~4년 동안 계속되었다고 <전태일 평전>은 전한다. 그것은 전태일이 가난한 이들의 삶을 속속들이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전태일이 지닌 다른 사람의 고통과 슬픔에 함께하려는 동정과 공감의 열린 마음에 바탕하고 있었다. 그것이 전태일로 하여금 노동 현실을 비롯한 비판적 사회의식에 눈뜨게 만들었고, 실천으로 나아가도록 재촉한 것이었다.

전태일이 분신하고 난 후 병원 침대에서 숨을 거두기 몇 시간 전에 어머니에게 했다는 “목사님들은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고 설교하지만 내가 봤을 때 목사님들은 없는 집에서 심방을 와 달라고 아무리 부탁해도 안 가는데 있는 집에는 오라고 하지 않아도 심방을 자주 가는데 엄마는 그런 목사가 말하는 예수 믿지 말라”는 고백 역시 소박하지만 교회의 반복음적 행태에 대한 예리한 비판을 담고 있다. 그에게서 발견되는 것이 다른 사람의 고통과 슬픔에 늘 애끓은 예수의 마음이다.

“그 죽음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어, 부끄러운 부끄러운 죄인이 되어 고꾸라질 수밖에 없는 그런 인생, 생명의 소멸이 아니라 사랑으로 목숨을 불살라 버리는 인생, 죽음에 몸을 던져 죽음을 폭발시켜버리고 새 희망으로 햇살쳐 오는 인생이 부활이라는 걸 우리는 믿습니다. 젊은 노동자 전태일의 이야기는 6천만 겨레의 눈물이 되어야 합니다. 눈물로 풀어져 흐르는 맑은 강이 되어야 합니다”라는 문익환 선생의 <전태일 평전> 서문처럼, 전태일의 삶은 그 자체로 민중의 복음이다. 그런 측면에서 전태일을 교회의 아들로 품으려는 대구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의 움직임은 교회사적으로도 대단히 의미 있는 몸짓이 될 것이고, 한국 교회를 교회다운 길로 이끌어내는 한 끈이 될 것이다.

“이 결단을 두고 얼마나 오랜 시간을 망설이고 괴로워했던가? 지금 이 시각 완전에 가까운 결단을 내렸다. 나는 돌아가야 한다. 꼭 돌아가야 한다. 불쌍한 내 형제의 곁으로, 내 마음의 고향으로, 내 이상의 전부인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 곁으로. 생을 두고 맹세한 내가, 그 많은 시간과 공상 속에서, 내가 돌보지 않으면 아니 될 나약한 생명체들.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 조금만 참고 견디어라. 너희들의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하여 나약한 나를 다 바치마. 너희들은 내 마음의 고향이로다.” 여기에서 전태일이 돌아가고자 했던 곳은 물론 청계천 평화시장이겠지만, 왠지 그가 유일하게 행복한 시절로 기억하는 마음의 고향 대구도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고향 대구가 다시 깨어나기를 바라는 것에 전태일 역시 마다할리 없을 것인 까닭이다.

내가 부산에 살 때 ‘부산이 일어나야 대한민국이 바뀐다’는 말을 많이 들었고 사실로도 부마항쟁과 6월 항쟁을 비롯하여 부산은 민주화 여정에 핵심적 역할을 하였다. 그 역사의 현장에 함께했던 감동을 어찌 잊을 수 있으랴. 그것은 한평생 나를 이끄는 원초적 체험이다. 이제 그 말을 ‘대구가 일어나야 대한민국이 바뀐다’로 바꿔도 무방할까. 지극히 냉소적이고 부정적인 표현으로 느껴지는 고담(Gotham) 대구가 고결한 기백이 살아 숨 쉬는 고담(枯淡) 대구로 되살아나기를! 희망은 그렇게 미래로 나아가는 것이다.

* 전태일장학재단 (연락처 010-2784-5651 / 후원계좌 농협 352-0677-3152-83 박병규)


정중규

대구대학교 한국재활정보연구소 부소장,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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