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태의 추적! 공자(追跡! 孔子) - 22]

오랜 기간 논어를 읽고 나서 나에게 일어난 변화 중 하나는 외람되게 들릴는지 모르겠지만 “정치가 보인다”는 것이다. 이십년, 삼십년이 넘는 긴 세월에 걸친 변화이니만큼 거기에는 세상살이의 경험 등 다른 변수도 작용하였을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정치를 보는 구도(構圖)라고 할까, 원근법이라고 할까 하는 것은 확실히 논어로부터 얻은 것이다.

논어에는 적지 않은 정치 관련의 단편이 있다. 그 점이 그리스도교나 불교와 비교할 때 다른 점이다. 그러나 막상 그 내용을 보면 과연 이것을 두고 정치에 관한 수준 높은 안목 내지 통찰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만큼 내용이 단순하기 때문이다. 대략 내용을 훑어보면 다음과 같다.

계강자(季康子)가 공자에게 정치에 대해 묻자 공자께서 대답하셨다.
“정치란 바로잡는 일입니다〔政者正也〕. 당신이 올바름으로써 앞장선다면 누가 감히 올바르지 않겠습니까?” 12/18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진실로 자기 자신을 바르게만 한다면〔苟正其身〕 정치를 함에 있어서 무엇이 더 필요하겠느냐? 자기 자신을 바르게 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남을 바르게 하겠느냐?” 13/13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그 자신이 바르면〔其身正〕 명령하지 않더라도 행하겠지만 그 자신이 바르지 않으면 비록 명령한다 하더라도 따르지 않을 것이다.” 13/6

서로 다른 자리에서 언급한 서로 다른 말이다. 그러나 보는 바와 같이 내용은 사실상 모두 같다. 정치는 최고 권력자가 자신을 바르게 유지하는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 같은 말을 공자가 얼마나 기회가 있을 때마다 반복하여 이야기하였기에 표현만 조금씩 바뀌었을 뿐 똑같은 내용의 단편이 세 군데에서나 반복되고 있을까? 그뿐만 아니다. 다른 얘기처럼 들리지만 내용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역시 위에서 얘기한 것과 다를 바 없는 얘기가 또 다른 단편에서 반복되고 있다.

계강자(季康子)가 도둑을 걱정하여 공자께 묻자 공자께서 대답하셨다.
“단지 당신께서 욕심만 부리지 않는다면 설혹 상을 준다 하더라도 도둑질하지 않을 것입니다.” 12/19

계강자가 공자께 정치에 대해 물었다.
“만약 무도(無道)한 자를 죽여서 백성들로 하여금 유도(有道)한 데로 나아가게 한다면 어떻겠습니까?”
공자께서 대답하셨다.
“당신이 정치를 하신다면서 어떻게 죽이는 방법을 쓰십니까? 당신이 선하고자 하면 백성들도 선해집니다. 군자의 덕은 바람이고 소인의 덕은 풀이라서 풀 위로 바람이 불면 풀은 반드시 눕게 됩니다.” 12/20

이뿐이 아니다. 최고 위정자의 존재를 북극성에 비교하면서 북극성이 움직이지 않고 제 자리에 의연히 자리 잡고 있음으로써 다른 별들이 그 주변을 원을 그리며 장엄하게 회전하고 있는 것을 정치적 현상에 비유하고 있는 단편은 매우 영감에 차 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정치를 덕으로써 하는 것은 비유하자면 북극성이 제 자리를 지키고〔北辰居其所〕 뭇 별들이 그를 둘러싸고 도는 것과 같다.” 2/1

다른 단편들도 모양새를 어떻게 하고 있든 결과적으로 보면 모두 앞에서 언급한 단편들과 대동소이한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애공(哀公)이 물었다.
“어떻게 하면 백성들이 따르겠습니까?”
선생님께서 대답하셨다.
“곧은 것을 들어 굽은 것 위에 놓으면〔擧直錯諸枉〕 백성들이 따를 것이나 굽은 것을 들어 곧은 것 위에 놓으면 백성들이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 2/19

현실에 있어서 가장 위에 놓여야 할 것이 무엇인가? 결국 나라에 있어서는 최고 위정자가 될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공자는 원리를 이야기하는 척하면서 “애공 당신이 곧으면 백성들이 저절로 따를 것입니다” 하는 돌직구를 던지고 있는 것이다. 아래 단편도 마찬가지다.

계강자(季康子)가 물었다.
“권장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공경스럽고 충성스럽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엄숙히 정사에 임하면 공경하고 효성과 자애를 다하면 충성스러워집니다. 착함을 거양하여 가르치는 것이 불가능할 때에 권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2/20

권장하려 할 것이 아니라 당신 자신이 공경스럽고 충성스러워지면 백성들은 저절로 공경스럽고 충성스러워진다. 그 방법은 당신이 엄숙히 정사에 임하고 효성과 자애를 다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많은 단편들이 다양성을 보이고는 있지만 그 본령으로 들어가면 이처럼 모두 동일한 것이다.

어쩌면 그런 동일성은 굳이 정치를 이야기하지 않는 다른 내용의 단편들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그렇게 묶을 역량이 부족하여 그렇지 만약 역량이 되어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논어의 모든 말들도 하나로 묶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공자 스스로가 말한 바에 의하면 모든 것이 “하나로 꿰어져 있다〔一以貫之〕”기 때문이다. 다만 정치에만 한정한다면 우리는 무딘 안목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그 문제에 관한 일관된 하나〔一〕를 실제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일관된 논지는 내가 볼 때 다음 단편에 이르러 어쩌면 가장 높은 수준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다스린 자는 곧 순임금이실 게다. 실로 무엇을 하셨겠느냐? 스스로를 공경히 한 채 똑바로 남면하셨을 뿐이다.”
子曰; 無爲而治者, 其舜也與. 夫何爲哉? 恭己正南面而已矣. 15/5

앞의 단편들과 구조적 일관성을 보여주고 있으면서도 이 단편에 이르러 처음으로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無爲〕’는 새로운 개념이 선을 보이고 있다. 노자의 철학에 이르러 핵심적인 개념으로 등장하게 되는 바로 그 ‘무위’다. 그 유명한 개념이 바로 공자의 사유에서 비롯되었으며 그것도 정치적 사유에서 출현하였다는 사실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궁극적으로 정치란 ‘무언가를 하는 것〔有爲〕이 아니다’라는 말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당연히 정치는 무언가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공자는 그런 통념을 거슬러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다스리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상식적으로 볼 때 말이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상식을 뒤엎는 공자의 논리에 대하여 나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류가 정치에 대해 수많은 언급을 해온 이래 이보다 더 수준 높은 언급은 없다고 본다.

동의할 수 있겠는가? 정치에 대한 공자의 규정 안에는 인간 문제를 보는 공자의 기본적 관점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그의 정치관에는 그의 독특한 인간관이 맞닿아 있다는 것이다. 위정자의 정치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기 이전에, 공자에게 있어서는 바람직한 인간 그 자체도 이 세상을 위하여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것이 공자가 주장하는 진리라는 것이다. 믿을 수 있겠는가? 다음 단편을 눈여겨보자.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옛날의 배우는 사람들은 자기를 위해 배웠으나 요즈음의 배우는 사람들은 남을 위해 배운다.” 14/25

자공(子貢)이 말했다.
“만약 백성들에게 널리 베풀어서 많은 사람을 구제할 수 있다면 어떠합니까? 가히 어질다 할 수 있겠습니까?”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어떻게 어진 정도이겠느냐? 반드시 성인의 경지일 것이니 요임금과 순임금도 그 문제만은 부심했었다. 실로 어진 자는 스스로 서기를 바라서 남을 세우고〔己欲立而立人〕 스스로 통달하기를 바라서 남을 통달시키며〔己欲達而達人〕 가까운 데서 능히 예(例)를 드니 그것이 어짊의 비결이라 할 수 있다.” 6/30

자공(子貢)이 물었다.
“한 마디 말로서 일생 동안 그것을 행할 만한 것이 있습니까?”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그것은 서(恕)다. 자기가 하고자 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베풀지 말아라〔己所不欲,勿施於人〕.” 15/24

정치를 떠나 개인적 삶에 있어서도 공자는 “남을 위해 배우는 것〔爲人之學〕”을 잘못된 배움으로 규정하고 있다. “스스로 서기를 바라서〔己欲立〕 남을 세우고 스스로 통달하기를 바라서〔己欲達〕 남을 통달시키는” 방법을 제시하였으며 “스스로 하고자 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베풀지 말라”고도 했다. 구태여 말하자면 그 외형만을 보면 위아론(爲我論)의 양주(楊朱)와 닮아 있고, 그 내용도 극단적으로 보면 “내 몸의 터럭 하나를 뽑아 천하를 이롭게 할 수 있다 하더라도 하지 않을 것”을 주창한 위아론과 유사해 보인다. 이 상식에 어긋나는 구도에 바로 공자의 역설적 인간관과 정치관이 있다. 이 역설을 넘어서지 못하면 공자를 이해할 길이 막혀 버린다.

조용히 실제 정치를 공자가 언급했던 저 독특한 구도를 통해 바라보고 관찰해 볼 필요가 있다. 정치란 무언가를 하는 것이 아니라 최고 위정자가 자신을 어떻게 나라의 정점에 놓고 스스로를 저 선함〔善〕과 의로움〔義〕과 공명정대함〔正〕과 치우치지 아니함으로 유지하는지를 살펴보라. 지금 북극성이 뭇별들이 둘러싸고 돌 수 있는 정확한 북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지를 보라. 그리고 그것을 하고 있고 못하고 있음에 따라 어떻게 나라가 정위(正位)하고 기울고 때로는 도립(倒立)하는지를 관찰해 보라. 그러면 공자의 이 간단한 정치관 안에 들어오지 않는 정치가 없고 파악되지 않는 정치 현실이 없다는 사실에 누구나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수태
연세대학교 법학과 졸업 후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32년간 공직생활을 했다. 평생의 관심은 철학과 종교학이었다. 그 동안 낸 책으로는 <새번역 논어>와 <논어의 발견> 외에 에세이집 <어른 되기의 어려움>, <상처는 세상을 내다보는 창이다> 등이 있다. 제5회 객석 예술평론상, 제1회 시대의 에세이스트상 등을 수상한 바 있다. 퇴직 후 현재는 강의와 집필에 전념하고 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