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예수] 마태오복음 해설 -132

23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아, 여러분 같은 위선자들은 화를 입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박하와 회향과 근채에 대해서는 십분의 일을 바치라는 율법을 지키면서 정의와 자비와 신의 같은 아주 중요한 율법은 대수롭지 않게 여깁니다. 십분의 일세를 바치는 것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겠지만 정의와 자비와 신의도 실천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24 이 눈먼 인도자들아, 하루살이는 걸러내면서 낙타는 그대로 삼키는 것이 바로 여러분들입니다.”(마태오 23,23-24)

네 번째 저주가 나오는 오늘 본문은 십일조와 종교적 의무 중에 무엇이 더 중요한가를 다룬다. 앙념이나 향료로 쓰이는 박하, 회향, 근채에 대한 말은 과장된 것이다. 율법에는 기름, 포도주, 곡식에만 십일조를 언급하였다.(민수기 18,12; 레위기 27,30; 신명기 14,22-) 랍비들의 성서해설서 모음 미쉬나(Mischna)에는 박하에 대한 부분을 찾을 수 없다. 그러나 유다교 문헌에서는 십일조를 좀더 자세히 심하게 다루었다. 레위인의 십일조(민수기 18,21-32; 느헤미야 10,37-39), 예루살렘 성전 순례 때 바치는 십일조(신명기 14,22-27), 3년에 한 번씩 가난한 사람을 위해 바치는 십일조(신명기14,28-; 26,12-)라는 여러 종류의 십일조가 있었다.

율법과 성전과 성전 제사가 유다인에게 중요하다는 생각이 십일조 의무에 전제되어 있다. 그러나 실제로 십일조 규정이 제대로 지켜졌는지는 또 다른 문제다. 2세기에 생긴 미쉬나(Mischna)의 자세한 십일조 규정들은 많은 사람들이 십일조 규정을 지키지 못했음을 암시한다. 갈릴래아 지방 소작농들에게 십일조는 지키려 해도 지키기 어려운 부담이었다. 예수는 갈릴래아 암하레츠(Am ha'araz, 버림받은 하층 계급)에 속했다. 마태오 주석에서 존중받는 개신교 성서학자 루즈(Luz)의 말이다. 예수가 십일조를 폐지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예수는 십일조에 대한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을 알고 십일조와 거리를 두었다.

십일조보다 더 중요한 의무는 정의, 자비, 신의다. 이 세 가지는 공동성서에서 함께 나타나지 않지만, 오늘 본문과 가장 가까운 구절은 있다: “사실대로 공정한 재판을 하여라. 동족끼리 서로 신의를 지키고 열렬히 사랑하여라. 과부와 고아, 더부살이와 영세민을 억누르지 말고 동족끼리 해칠 마음을 품지 말아라”(즈가리아 7,9-10) 정의와 자비는 자주 같이 다루어졌다.(이사야 1,17; 예레미아 22,3; 미가 6,8) 크리시스(krisis)는 정의를 뜻한다. 공정한 재판을 우선 가리키는 뜻으로 유다인들은 받아들였다. 23절 말씀의 뜻은 두 가지로 요약된다. 1. 정의는 공정한 재판에서 시작된다. 2. 정의와 자비는 언제나 같이 다루어야 한다. 그리스도교에는 정의와 자비를 분리해서 다루는 잘못된 경향이 있다.

마태오 공동체가 아직 유다교의 법적 규제를 받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있다. 자비는 예수가 자주 언급한 덕목이다.(마태오 9,13; 12,7) 피스티스(pistis, 신의)가 하느님에 대한 것인지 동료 인간에 대한 것인지 뚜렷하진 않다. 하느님에 대한 것으로 나는 생각한다. 마태오에 8번 나타나는 그 단어는 언제나 하느님과 연관되어 쓰여졌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에게만 해당되는 비판이 아니다. 마태오는 동시에 마태오 공동체의 처신을 겨냥하고 있다.

공동성서에서 말하는 정의는 로마인들이 말하는 형식적 정의가 아니다. ‘모든 시민은 법 앞에서 평등하다’는 로마식 명제에는 부자와 권력자가 유리하게 이득을 취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 공동성서에서 정의는 약한 자를 보호하고 이롭게 하는데 있다. 정의와 자비는 우리 현대인들이 느끼는 것보다 훨씬 더 가까이 연결되어 있다. ‘모든 사람은 법 앞에 평등하다’라는 표현과 마찬가지로 ‘하느님은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똑같이 사랑하신다’ 라는 표현에서 부자와 권력자에게 유리한 해설이 생길 수 있다. 그런 아름다운 명제 속에 숨어 있는 논리적 허점을 잘 보아야 한다. ‘하느님은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똑같이 사랑하신다’ 보다 ‘하느님은 약자를 우선 사랑하시고 보호하신다’ 라는 표현이 성서 메시지에 더 걸맞다. 부자나 권력자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자기들에게 요청할 수 없다. 가난한 사람에 대한 우선적 사랑은 하느님이 선택하신 결정이다. 부자들은 하느님과 논쟁하거나 협상할 셈인가.

율법이 금지한 벌레가 음료수에 들어가지 않도록 바리사이들은 음료수를 천으로 걸러내었다. 하루살이처럼 땅에 기어다니는 벌레를 먹어서는 안 되었다.(레위기 11,41) 신 포도주를 하루살이는 좋아한다. 하루살이에 비해 낙타는 아주 크고 또한 불결하게 여겨진 짐승이다.(레위 11,4) 큰돈과 더러운 돈을 사양하지 않고 받아먹는 행위를 비판한 것이다. 종교인들이 큰돈을 받아먹거나 더러운, 즉 불의한 돈을 받아먹는 행위는 우리 시대에 없는가. 조용기, 정삼지, 전병욱 같은 사람들이 버젓이 종교인 행세하는 땅이 우리 대한민국이다. 옳지 못한 사람들이 정치나 종교에서 떵떵거리며 사는 대한민국은 대체 어느 시대 나라인가.

‘십일조를 6개월 내지 않으면 교인자격을 박탈한다’고 협박할 것이 아니라 ‘정의와 자비와 신의를 실천하지 않으면 교인자격을 박탈한다’고 말해야 옳지 않을까. 돈이 없는 가난한 신도를 겁주지 말고 돈으로 사기 치는 종교인을 앞장서 처벌해야 옳지 않을까. 예수라면 십일조를 내지 못하는 가난한 사람을 보호하고 불의 앞에 침묵하는 종교인을 비판할 것이다. “여러분은 박하와 운향과 그 밖의 모든 채소는 십분의 일을 바치면서, 정의를 행하는 일과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은 대수롭지 않게 여깁니다.”(루가 11,44)

종교와 국민의 의무가 통합되던 유다사회와 오늘 한국사회는 그 상황이 아주 다르다. 한국 신자들은 국가에 내는 세금 뿐 아니라 종교에 돈을 따로 내야 한다. 그 이중 고통을 생각하면 가톨릭과 개신교는 헌금에 대한 관행과 실태를 검토하고 반성해야 한다. 신자들이 지금보다 훨씬 적게 헌금하는 방향으로 개선하길 바란다. 유럽 개신교에는 십일조 의무가 없다. 십일조를 요구하는 개신교는 세계적으로도 아주 드물다. 한국 개신교에서 십일조를 아예 폐지하면 더 좋겠다. 그렇게 한다면 사람들은 개신교를 눈비비고 다시 보리라. 교회와 성당에서 돈 이야기를 적게 했으면 좋겠다. 빚, 실업 등에 고통 받는 많은 신자들이 불쌍하지 않은가.


 
 

김근수 (요셉)
연세대 철학과, 독일 마인츠대학교 가톨릭신학과 졸업. 로메로 대주교의 땅 엘살바도르의 UCA 대학교에서 혼 소브리노에게 해방신학을 배웠다. 성서신학의 연구성과와 가난한 사람들의 시각을 바탕으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역사를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마르코 복음 해설서 <슬픈 예수 : 세상의 고통을 없애는 저항의 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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