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독서콘서트, 공지영의 <높고 푸른 사다리>로 독자들 만나

“소설가가 낙망할 정도로 드라마틱한 이야기들을 만나면서 하느님의 손길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구체적으로 우리 곁에 와 계시다는 걸 느꼈어요. 살다보면 인생에 대한 회한과 허망한 마음을 느끼게 되지만, 마리너스 수사님의 일대기는 인생이 꼭 그런 것이 아님을 말씀해 주시는 것 같아요.”

공지영 작가가 26일 서울 불광동성당에서 열린 가톨릭독서콘서트에서 최근 출간한 소설 <높고 푸른 사다리>의 뒷이야기를 풀어놨다. 공 작가는 이날 강연에서 소설의 모티브를 제공한 미국 성 베네딕도회 뉴튼수도원의 마리너스 수사와 한국에 성 베네딕도회 수도원을 세운 독일의 선교사들의 기적 같은 이야기, 그리고 이탈리아 로마의 봉쇄수도원에서 평생 한국을 위한 기도를 드린 나자레나 수녀의 이야기를 ‘세 사람’이라는 주제로 엮어 인간의 사랑과 삶의 의미를 전했다.

▲ 공지영 작가 ⓒ한수진 기자

<높고 푸른 사다리>의 배경인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은 본래 함경남도 덕원에 있던 수도원이 1949년 공산당의 탄압으로 폐쇄되고, 한국전쟁 이후 남한에 다시 정착해 세운 수도원이다. 공 작가는 당시 덕원수도원에서 수도생활을 했던 독일 출신의 젊은 선교사들이 가졌던 열정에 크게 매료됐다. 소설에서 공 작가가 ‘토마스 수사’로 압축해 표현한 인물이다. 선교사들은 배를 타고 한 달 반이나 걸리는 오지의 나라에 찾아와 인쇄소를 열고, 학교를 세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독일어-한국어 사전을 펴낼 정도로 한국어를 익혔다. 이들의 열정은 많은 이들을 교회로 이끌었다.

그러나 분단은 일제치하에서도 활발히 펼쳐나갔던 이들의 열정을 잔혹하게 짓밟기 시작했다. 공 작가는 덕원수도원의 수도자들이 당했던 탄압의 실상이 너무 끔찍해서 차마 글로 다 묘사하지 못하고 덜어낼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그는 “현실이 어떤 영화나 소설보다 더 엽기적이었다”면서 “북한 공산당이 이념적으로 종교를 용납하지 않아 이들을 탄압했다는 측면도 있었지만, 이보다 집중해서 살펴본 것은 악의 본질”이었다고 말했다. 공 작가는 수도자들이 수감됐던 평양인민교화소와 옥사독수용소에서 아우슈비츠, 삼청교육대와의 공통점을 발견했다.

“공간과 시간이 달라도 이들 수용소의 공통적 특징은 인간다움을 말살시키고, 인간의 모든 존엄성을 파괴하는 데 집중한다는 점입니다. 저는 이것을 바로 ‘악’이라고 봅니다. 그들은 우리가 한 사람, 한 사람 하느님의 창조물이며 존엄한 존재라는 것을 부정하고, 이를 끊임없이 각인시킵니다.”

독일인 수도자들은 고문과 강제노동, 열악한 환경으로 인해 4년 동안 18명이 목숨을 잃을 정도로 혹독한 시련을 겪었다. 그런데 공 작가를 놀라게 한 것은, 그들이 서독 정부의 노력으로 본국에 귀환한 이후 3개월의 요양만 마치고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이었다.

“그들에게 왜 다시 돌아가느냐고 물은 사람은 없었어요. 그들은 피난을 내려온 왜관이라는 곳에서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인쇄공장을 다시 열고, 포도주와 소시지를 만들고, 학교를 지었죠. 지금의 왜관수도원이 그분들과 한국인들이 세운 곳이에요.”

공 작가는 그들에게 또 하나의 질문이 떠올랐다고 했다. ‘끔찍한 곳에서 돌아온 그들은 과연 반공주의자가 되었을까?’ 답은 ‘아니요’였다. 공 작가는 왜관수도원을 수차례 취재하며 여러 수도자에게 물어보았지만 북한이나 공산당을 저주하거나 원망하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다. 오히려 수도자들은 “공산당 정부가 나쁜 짓을 했지만 그들은 다 사라졌고, 북한에 미움을 가질 이유가 없다. 하느님의 보살핌으로 시련을 이겨내고 이렇게 살아남았으니, 다시 통일이 되면 덕원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답했다. 공 작가는 이러한 수도자들의 태도를 “기적”이라고 말하면서 “인간은 또 다른 차원을 갖고 있음을 느꼈다”고 덧붙였다.

<높고 푸른 사다리>에서 많은 독자들의 눈물샘을 자극했던 또 다른 주인공은 미국 성 베네딕도회 뉴튼수도원의 마리너스 수사다. 2000년 뉴튼수도원은 오랜 성소자 가뭄으로 폐쇄 신청을 냈고, 이듬해에 수탁 운영과 수도자 파견을 제안 받은 왜관수도원의 대표자들이 뉴튼수도원을 방문했다. 그때 한국 수도자들에게 휠체어를 탄 노수사가 다가와 자신이 한국과 인연이 있다고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가 바로 마리너스 수사다.

놀랍게도 그는 1950년 ‘흥남 철수’ 때 14,000명을 피난시켰던 매러디스 빅토리호의 선장이었다. ‘기적의 배’라고도 불리는 매러디스 빅토리호는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을 구조한 배로 기록에 남아있다. 그리고 영화처럼, 마리너스 수사는 수십 년간 비밀로 감춰뒀던 이야기를 처음으로 꺼내놓은 이틀 뒤에 한국인 수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눈을 감았다.

▲ 공지영 작가는 “살다보면 인생에 대한 회한과 허망한 마음을 느끼게 되지만, 마리너스 수사님의 일대기는 인생이 꼭 그런 것이 아님을 말씀해 주시는 것 같다”고 전했다. ⓒ한수진 기자

“토마스 수사와 마리너스 수사, 이 두 사람은 도대체 한국과 어떤 인연이 있었기에 이런 삶을 살다가 죽었을까요? 내 나라와 내 민족을 위해 기도하기도 바쁜데, 거창한 상을 받거나 알아주는 것도 아닌데 평생의 삶을 투신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답을 찾으려고 많은 생각을 하던 때에 마침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시리아를 위해 단식기도를 하자고 말씀하셨어요. 말하자면, 교황님의 말씀을 들은 누군가가 전쟁으로 고통 받는 시리아를 위해 내 평생을 바쳐야겠다고 떠나는 건데요. 그건 정말 어려운 일이잖아요. 그런데 이런 분이 또 한 분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분을 만나러 여행을 다녀왔어요.”

공 작가는 평생 한국을 위해 기도하고 세상을 떠난 수녀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탈리아 로마의 카말돌리회 수녀원을 찾았다. 그의 이름은 나자레나. 그가 봉쇄를 넘어 ‘봉인’된 생활을 했던 공간은 두 평 남짓한 작은 방이었다. 방 안에는 나자레나 수녀가 직접 주문해 사용했다는 폭이 50㎝ 정도 밖에 되지 않는 십자가 형태의 침대와 작은 성모상, 소박한 십자가, 성경이 놓여 있었다. 여기에 공 작가의 눈길을 끌었던 놀라운 물건이 더 있었는데, 가시가 돋은 채찍과 복대였다.

본래 미국 출신인 나자레나 수녀는 오페라 가수로 활동하다 20대 중반에 ‘더 깊은 곳으로 숨어 나와 함께 있자’는 하느님의 음성을 듣고 봉쇄수도원에 입회해 50년을 살았다. 그가 평생 하느님께 청했던 기도 지향 2가지는 교회 쇄신과 한국의 평화였다.

“너무나 적은 식사를 하고 고행을 바치며 한국을 위해 기도했다는 현장을 보면서, 머리로는 왜 이런 채찍질까지 하며 기도를 바쳤을까 하면서도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리더라고요. 우리가 휴전 상태에서 전쟁으로 가지 않은 것, 이렇게 잘 먹고 잘 살게 된 것, 한국 교회가 성장한 것이 우리가 잘해서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공 작가는 이들의 삶에서 하느님의 뜻을 다시 한 번 발견했다. 그들의 희생과, 하느님만 알고 있는 그들의 보속 덕분에, 그들의 존재조차 알지 못하는 먼 곳에 떨어진 사람들이 무탈하게 살아갈 수 있었다는 것이다. 공 작가는 세 사람이 자신에게 던졌던 질문을 되물으며 강연을 마쳤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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