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경쟁은 어떻게 내면화되는가?, 강수돌, 2008, 생각의 나무

 

"독일어에 '팔꿈치사회' 라는 말이 있다. 한마디로, 옆사람을 팔꿈치로 치며 앞만 보고 달려야 하는 치열한 경쟁사회라는 말이다...팔꿈치 사회에서 심각한 문제는 한번 일등 한다고 영원히 일등하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마라톤에서는 번번이 일등 못한다고 하더라도 생존 자체가 위협에 처하는 것은 아닌데 비해, 자본주의 상품경쟁에서는 남보다 계속 뒤처지게 될 때 생존 자체가 큰 위협을 받는다는 점이다. 팔꿈치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거지에 대한 동정은 커녕 자기 자신에게마저도 냉혹해져야만 하는 '경제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본문 중에서

우리 사회, 무엇이 문제인가?

경쟁은 어떻게 내면화가 되는가? 정말 이 물음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일중독과 같은 스스로 행복하지도 않고 원하지도 않는 일에 몰두하는가 하는 물음에 닿아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잘 안다. 경쟁보다는 협력이 더 가치가 있는 것임을. 선택을 할 수가 있다면 아름다운 협력을 선택할 것이며 그것이 행복에 이르는 길에 더 가깝다는 것을 어렴풋하게나마 아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현실이라는 불가항력’에 밀려 살벌한 경쟁구도에 자신을 내맡긴다. 이것을 두고 자발적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더라도 전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 말하기는 힘들 것이다. 분명히 우리는 OECD의 어떤 국가들보다도 일중독 현상이 심한 국가이다. ‘이 특수한 한국적 상황’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강수돌 교수는 경쟁의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접근하지 않고 구조적 문제로 접근한다. 다만, 그것이 불가항력이 아니고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구조의 문제라는 점을 명확히 하면서. 진단은 이렇다. “그렇다면 이러한 ‘경쟁의 내면화’는 왜 이루어지는가? 그것은 한마디로, 강자와의 동일시 또는 스톡홀름 신드롬 개념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부연해서 설명하면, 우리가 상대하기 어려운 엄청난 폭력을 만나게 되면 우리는 엄청난 공포를 느끼고 저항하기보다는 무릎을 꿇은 채 투항한다. 그리고는 강자와 자신을 동일시하면서 자기 내면의 힘과 논리가 아닌 강자의 힘과 논리에 맞춰서 살아가는 것이다.

강자의 논리가 바로 경쟁이다. 경쟁은 강자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하지 약자에게는 전혀 그렇지 않다. 강자는 약자들 사이의 경쟁구도를 유지하고 통제하면서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때문이다. 결국 사람들은 이러한 삶의 방식을 계속하고 경쟁을 내면화하면서 자신을 소외시킨다. 이런 삶은 더 불행해지지 않을 수는 있어도 흔쾌하게 행복한 삶은 아니다.

대안은 무엇일까?

대안은 있을까? 물론 없을 리가 없다. 이 책은 이반 일리치의 삶을 제시한다. 이반 일리치는 두 개의 평화를 제시한다. 하나는 가진 자, 위로부터의 정의와 평화다. 다른 하나는 기층 민중, 아래로부터의 정의와 평화이다. 이 책은 후자에 주목하면서 우리가 갈 길은 민중의 평화임을 매우 설득력 있게 제시한다. 인간은 자율적일 때 행복함을 느끼는데 위로부터의 정의와 평화는 자율성이 아닌 타율성을 기조로 한다. 경제개발, 그리고 이를 위한 경쟁은 위로부터의 정의이며 가진 자의 평화를 보장하지만, "더 느긋하게"라고 외치며 자급문화를 추구하는 것은 가지지 못한 자의 정의와 평화를 보장한다.

우리가 행복한 삶으로 향하는 길목으로 접어드는 방법은, 그리고 선택이 가능한 것은 우정에 기초한 인간관계이다. 이반 일리치는 공동체적 삶에서 일어나는 상호작용 중에서 가장 찬란한 꽃이 우정임을 알려준다. 행복해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이 말은 결국 인간은 더 불행해지지 않기 위해서 불행을 선택한다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일중독과 경쟁의 구도에서 벗어나 우정에 기초한 관계로 나아가는 것은 결국 선택의 문제가 아닐까? 지금 행복할 것인가, 영원히 포기할 것인가 하는 기로에 우리는 서 있는 것이다.

이영남/ 대통령기록관 연구서비스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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